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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11-20

恒照 2019. 12. 30. 10:28

 # 列國誌 11



**  승승장구하는 呂不韋!...



한편, 식객들에게 前 편에서와 같이 歷史書 편찬에 대한 지침을 주고 그들의 뒤를 보살펴주던 어느 날, 여불위는

장양왕의 부름을 받는다.


"대왕 전하 ! 

찾아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丞相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王이 臣下에게 <부탁>이라니 ! 봉건왕조시대에 있어서는 당치 않은 말이지만, 장양왕은 일찍이 趙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여불위에게 크나큰 신세를 진 일이 있었던바, 여불위에게 만큼은 일반 신하들에게 하듯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 거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下命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과인이 볼모로 잡혀가서 趙王에게 7년 동안이나 박해를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몰라도 趙나라만큼은 꼭 손을 좀 보아주어야 하겠소. 그러니 승상은 과인의 심정을 헤아려서, 趙나라를 징벌하해주기바라오."

여불위는 장양왕이 趙나라에 품고있는 恨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곧 御命을 받들어 趙를 치도록 하겠사옵니다."


呂不韋는 물론 武將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려면 무엇인가 뚜렸한 업적을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행히 秦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猛將이 수두룩하였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사전에 충분히 주물러 두었던터라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呂不韋가 王命을  그대로 받들 자세를 보이자, 흡족한듯 장양왕이 물었다.

"싸우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겠지요?"

"예, 趙나라를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멸망시키는 일은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성읍

(城邑) 몇 십개쯤 빼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恨을 다소나마 풀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신금(宸襟)을 평안토록 해 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퇴궐하는 길로, 몽오(蒙鰲), 장한(章悍), 왕전(王剪) 장군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명했다.

"우리는 御命에 의해 趙나라를 치게 되었소. 몽오 장군은 원수(元帥)가 되고, 장한 장군과 왕전 장군은

좌 우익(左 右翼) 사령관이 되어, 20만 군사를 3隊로 나누어 趙를 치도록 하시오. 세 장군이 합심하면

승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묵직한 전축금(前祝金)을 건네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오. 하여, 세 분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바이니, 합심 일치 단결하여 기필코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시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子子孫孫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여불위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재주와 用人術이 남달리 비상하였다. 엄할 때에는 추상 열일(秋霜烈日) 같다가도,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에는 慈愛로운 어머니같은 살가운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지우(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승상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라며 굳은 맹세를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3 隊로 나뉘어 趙나라를 쳐들어가는데, 그 모습은 실로 壯觀 이었다.

騎馬는 산야에 넘치고, 정기(旌旗)는 하늘을 덮어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趙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제(齊), 초(楚)와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나, 그 크기는

秦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秦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秦軍이 또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趙나라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진군은 이렇다 할 싸움도 안하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의 城을 무혈점령하고,

조나라의 요충(要衝)인 태원성(太原城)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했다.


趙나라는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한단>이 위태로워질 형편이었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10여 일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나와,

몽오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왕은 그 급보를 받고, 긴급히 대책 회의를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성루(城壘)를 높이 쌓고 외곽으로 돌아가며 늪(池)을 깊게 둘러 파서, 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사옵니다. 적이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軍糧 조달 문제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위(魏)와 초(楚)에 사신을 보내어 응원군(應援軍)을 청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사를 총동원하여 늪을 깊게 파고 성루를 높이 올려 쌓게 하였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中世의 古城에는 일반적으로 城 주위를 깊고 넓게 판 다음, 江물을 끌어들여 敵軍의 침략에 대비해온 모습을 보셨을터!

그것은 우리 국민이 자주 찾는 가까운 日本의 오사카 城도 마찬가지..)


秦軍이 한단성으로 진격 해 온것은 그로부터 며칠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秦軍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趙軍은 죽은 듯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 안에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趙나라 丞相 인상여가 예상한 대로 秦軍은 20 萬이란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또한 계절이 한 겨울로 들어서자 군사들이 동상(凍傷)과 기한(飢寒)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이에, 몽오 장군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城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몽오 장군이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겠다 ! "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왔다.


이에 장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선 37 개의 城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나의 恨이 많이 풀렸소. 呂 丞相과 장군들이 모두 힘을 합해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라 고맙기 그지없소 ! "


이리하여 여불위는 丞相으로서 업적을 크게 세웠다. 그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서,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않았다.


이렇게 秦나라의 國勢가 크게 확장해 나가자 呂不韋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참으로, 여불위는 사람 장사, 한 발 더 나아가 용인술을 기막히게 잘 하는 사나이였다.




          <계속>



        # 熱國誌 12


 

** 趙나라의 平原君



趙王은 秦軍에게 37개의 城을 빼앗긴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오겠노라"는 사전 통고까지

받고보니, 국가의 安危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四公子'로 불리는 아우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秦軍이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고 公言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

평원군이 대답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楚, 魏등과 군사 동맹을 맺어 공동 방위 태세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다하겠습니다."

"楚와 魏가 우리와 함께 싸워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으나, 그들이 秦의 미움을 극복하고 우리와 손을 맞잡으려고 하겠는가 ?"

"물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는 없사오니, 되든 안 되든 제가 직접 나서서 우선 楚나라 부터 설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평원군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3 천 여 명의 식객을 거느려오며, 그들을 친형제 처럼 소중하게 대해 왔었다. 평원군은 楚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事理에 밝고 설득력은 물론 변설이 능한 색객 중 20 명 정도의 조력자가 필요하였다.

19 명은 곧바로 추려낼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적격자가 없어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원하고 나섰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저를 데리고 가 주시옵소서."

평원군이 모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니,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평소에 신통치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몇 해나 되었소 ?"

"공자의 신세를 진 지가 어언간 3년이 넘었습니다."

"3년 !.... ? "


평원군은 내심 실망하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 지 모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은 囊中之錐(낭중지추) 와 같다고 하였소. 송곳 끝은 반드시 주머니 밖으로 솟아나오게 마련인데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3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나에게 송솟 끝을 보여 준 일이 없으셨으니, 내 어찌 선생더러 초나라에 동행하자고 말 할수 있겠소 ? '


모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송곳 끝이 주머니 밖으로 솟아 나오려면, 그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公子께서는 저를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주십사 하는 뜻에서 배행을 자처하는 것이옵니다."


평원군은 모수의 뛰어난 논리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를 수행원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19명의 수행원들은 모수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사실을 알고는 모두들 코웃음을 치며

반대했다. 그러나 평원군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모수를 대동하고 초나라로 출발하였다.


며칠 후, 楚나라에 도착한 평원군 일행은 楚왕과 회담을 개시하였다.

楚왕과 평원군은 단상에 단둘이 마주앉았고, 수행원 들과 초나라 중신들은 단하에 마주보고 이열

횡대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회담석상에서 평원군은 趙, 楚, 魏 等, 인접 삼국은 군사 동맹을 맺어, 강적 진나라의 침략에 맞서 함께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입이 닳도록 역설하였다.

그러나 楚王은 좀처럼 應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趙나라와 섣불리 군사 동맹을 맺었다가 秦의 미움을 사는 날이면,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회담은 아침부터 시작되었지만, 날이 어둡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모수는 진종일 참고 지켜보다 못해, 마침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楚王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양국이 군사 동맹을 맺고, 秦나라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은 다같이 이로운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처럼 시간을 끄십니까?"

楚王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평원군을 보고 물었다."

"이자는 누구요 ?"

"제가 데리고 온 수행원 입니다."

그러자 초왕은 大怒하며 벼락같은 호통을 질렀다.

"네 이놈 ! 썩 물러가거라.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 "


이에 모수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초왕의 가슴에 들이대며 말했다.


"대왕께서 소인을 꾸짖는 것은 楚나라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오. 그러나 대왕은 지금 바로 제 눈앞에 있고, 대왕을 도와줄 사람들은 멀리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어보신 뒤, 可不를 答해 주소서.. 초나라는 영토가 秦나라 못지않게 넓을 뿐만 아니라, 군대도 백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楚와 같은 강대국이 秦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이웃 나라와 화친 맺기를 꺼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楚나라가 이처럼 비굴하기 때문에 秦나라에게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이오이다. 우리가 군사 동맹을 맺자는 것은 우리 나라 뿐아니라 楚 와 더불어 공생 공존(共生共存) 하자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옵니까? 진실로 떳떳한 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秦나라에 대한 공포심부터 버리십시오."


楚王은 칼날같은 모수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내가 지나치게 비겁했던 것 같구려..좋소. 귀국과 군사 동맹을 맺기로 합시다."

군사 동맹은 이렇게 일순간에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모수는 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수는 단하에 있는 楚나라 重臣들을 굽어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셨으니, 이제는 혈맹(血盟)의 의식을 하도록 합시다.

지금 곧 닭과 말의 피를 속히 구해 오도록 하오 !"

초나라 중신들이 동물의 피를 구리 쟁반에 가득 담아 오자, 모수가 楚王에게 정중히 받들어 올리며

말했다.


"혈맹의 의식을 거행함에, 대왕께서 피를 먼저 드신 뒤에, 중신들에게도 골고루 나눠 마시게 하시옵소서. 평원군과 저희들은 그 다음에 들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군사 동맹의 의식이 끝나자, 초왕은 모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 오늘, 선생의 깨우침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비겁한 왕이라는 조소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우리나라의 貴客이기도 하오."


모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臣은 다만 조초(趙楚) 양국의 國運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대왕전에 무례를 저질렀사오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초왕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것이 바로 충성심이거늘, 내 어찌 충신에게 벌을 내릴 수 있으리오. 만약 이후에 또다시 秦軍이 귀국을 침략한다면, 우리는 춘신군(春申君)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달려가 귀국을 도와 드리도록 할 것이오."

사태가 이렇게되자, 모수를 경멸해 오던 19명의 수행원들은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평원군이 군사 동맹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趙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公子가 아니었던들 이런 어려운 일은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오."

그러자 평원군은,

"아니옵니다. 이번 일은 모두가 毛遂 선생의 공로 입니다. 모수 선생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이옵니다."

하고 모든 공을 모수에게 돌렸다.


그리고 모수를 따로 모셔다가 융숭하게 대접하며,

"오늘날까지 나는 사람을 보는 눈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건만 선생을 너무도 잘못 보아 왔으니, 이런 부끄러운 일이 없소이다. 선생의 세치 혀는 백만 대군보다도 강했고, 선생의 비범한 기상은 천하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섭섭한 마음이 계셨다면  잊으시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옵니까 ! 공자께서 평소 고매하신 의리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던들, 저 같은 것이 무슨 성명이 있으오리까."

의리로 맺어진 두 사람의 겸손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플루타크는 그의 著書 '英雄傳'에서 正義를 이렇게 말했다.


"정의란 힘 있는 자의 雄辯이다 ! "..



             

             <계속>


         # 熱國誌 13 



** 魏나라의 信陵君



楚나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魏나라와 군사 동맹을 추진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平原君은 魏나라와의 교섭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賢者 '四公子'중의 한사람인 신릉군은 魏王의 아우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 평원군과는 평원군의 손아래 동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평원군이 신릉군의 고매한 인격에 매료되어 자신의 처제와 혼인을 시켜 동서지간이 되었던 것이다.


평원군이 신릉군을 찾아가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하니 신릉군은 즉석에서 찬성하고, 위왕의 허락을 간단히 받아 왔다. 魏王은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진비(晋鄙) 장군으로 하여금 국경 지대에 10만의 군사를 주둔시켜 두었다가, 秦이 귀국을 침범 하기만 하면, 즉각 병력을 출동시켜 귀국을 돕겠소."

그리하여 평원군은 큰 성과를 거두고 趙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면 신릉군이란 어떤 인물인가?


신릉군은 본시 병학가(兵學家)로서, 식객 3천 여명을 거느리고 있는 현인 <四公子>의 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누구에게나 겸허하였고, 어딘가 賢士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리를 마다 않고 몸소 찾아가 집으로 모셔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번은 大梁城의 문지기를 하고 있는 '侯生'이라는 70 세된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자기 집으로 모셔 오고자 애쓴 일이 있었다.


그러나 侯生 노인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다 죽게 된 소인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공자께서 저를 데려가려고 하시오. 찾아 주신 뜻은 고마우나, 저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오."

信陵君은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거듭 요청했으나, 후생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신릉군은 하는 수 없어 목로집에서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고 헤어지자고 했는데, 신릉군은 그 자리에서도 후생 노인을 깍듯이 上座에 모셨다.

그러자 후생 노인은 신릉군의 겸손한 태도에 깊이 감동되었는지 술이 몆 잔 들어가자 이런 말을 했다.


"소인은 너무 늙어 공자를 따라갈 생각이 없지만 , 그 대신 좋은 사람을 한 분 소개해 드리리다"

신릉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오나, 선생이 천거하시는 분이라면 꼭 찾아가 뵙겠습니다. 그 어른은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

"여기서 동쪽으로 10 리쯤 가면 푸줏간이 하나 나올 것이오. 그 푸줏간에서 칼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주해(朱亥)라는 사람이오. 세상이 그를 몰라주어 비록 푸주간 칼잡이를 하고는 있지만, 그 사람이야 말로 쓸 만한 인물일 것이오."


푸줏간에서 칼잡이를 하고 있다면 백정(白丁)이다.

백정이란, 누구나 멸시하는 최 하층 賤民이다.

그러나 신릉군은 평소부터 직업에 대한 귀천 관념 같은 것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정신이 썩어빠져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천민이요, 아무리 천민이라도 정신과 그에 따른 행동이 살아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귀족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러기에 백정이라는 직업은 신릉군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후생 노인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면 예삿 인물이 아닐 것 같아서, 신릉군은 그 길로 주해라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과연 푸줏간이 나왔다. 40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고기를 썰고 있었다.


"말씀 좀 물어 보겠습니다. 이 곳에 혹시 주해라는 분이 계십니까 ?"

"내가 주해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

주해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기를 찾아 온 손님이 귀찮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주해의 인상은 무척 순박하게 느껴져서 신릉군은 미소를 지으며,

"실은 후생 노인의 소개로 선생을 일부러 찾아 온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며 , 자기 소개를 한 뒤, 자기 집으로 동행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주해는 콧방귀만 뀔 뿐 상대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후생 노인이 망령이 드신 모양이구려.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갑니까 ?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거든 집에 돌아가 낮잠이나 자시오. 나는 바쁜 사람이오."

하며 아예 접근조차 할 수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릉군은 어쩔 수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주해라는 인물에 이상한 매력이 느껴져서 신릉군은 그 후에도 4, 5차례 찾아갔었지만,

주해는 번번히 퉁명스럽게 내밷더니 나중에는 아에, 묻는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秦나라 장양왕은 , 魏나라가 趙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고, 자기네 국경 지대에 위군을 10 萬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면서 魏王에게 다음과 같은  협박장을 보내 왔다.

"우리는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켜 조도(趙都), 한단성을 점령하려 하는데, 魏나라가 趙나라를 돕기 위해

우리 국경에 10萬의 병력을 주둔시켜 두고 있다고 하니, 만약 貴國이 趙나라를 돕고자한다면 우리는 방향을 돌려 魏나라부터 정벌할 것이오. 그런 줄 알고, 귀국이 亡하지 않으려면 일체의 군사 행동을 삼가시오."


秦나라 장양왕의 협박장을 받은 위왕은 크게 걱정을 하였다.

이에 신릉군은,

"秦은 六國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생각으로 우선 趙를 정벌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를 정벌하려는 各個擊破의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옵니다. 秦은 예의도, 信義도 없는 오랑캐 족속들이온데, 우리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어찌 생명인들 유지할 수 있으오리까 ! 하오니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趙를 비롯하여 韓, 燕 等, 모든 국가들과 힘을 합하여 秦에 대항해야만 하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魏王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秦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하나하나의 힘은 약할지 모르오나 여섯 나라가 힘을 합하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미 군사 동맹까지 맺었는데, 그것을 배신한다면 국가간의 신의를 어떻게 유지해

나갈 수 있겠사옵니까? 趙나라를 돕는데 지금, 작은 손실이 있더라도 내일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趙나라와의 군사 동맹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을 해도 될 일, 당장 오늘 멸망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魏王은 끝내 趙나라와의 군사 동맹을 배신할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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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여러분 중, 朱姬가 보고싶다는 의견도 있으나^^ 물론 때가 되면 朱姬도 등장하게되지만 향후, 朱姬 못지않은 傾國之色 들이 줄을 서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기요.


"참는 자에 福이 온다"는 말 기억하시지요?^^

       

  


               <계속>



          # 列國誌 14



** 趙를 침공하는 秦, 신릉군과 평원군의 의리. 장양와믜 죽음과

진시황의 등극



신릉군은 안타깝고 괴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그때, 趙나라에서 急使가 평원군의 서찰을 가지고 달려왔다.

내용인즉,

"나는 信陵君을 信義 있는 사람으로 믿고 나의 妻弟와 결혼까지 시켰던 것이오. 헌데 우리는 지금 秦軍에게 都城이 함락될 누란지위의 상황에 처해있건만, 貴國은 군사 동맹까지 맺어 놓고도 팔장만 끼고 있으니 正義의 賢士로 일컬어 오던 신릉군이 이럴줄 몰랐소. 만약 우리가 귀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이대로 亡한다면, 다음 번에는 魏나라도 우리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말 것임을 명심하기 바라오. 처음에 굳게 약속한대로 信義를 잊지 말고, 지원군을 속히 보내주기 바라오. 마지막 부탁이오."


신릉군은 이와 같은 편지를 읽고나자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大王께서는 趙나라와의 군사 동맹까지 맺어 놓고도 조의 위급함을 구해 주려고 하시지 않으니, 우리들 만이라도 들고 일어나 趙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소? 사나이로 태어나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뜻이 있는 분은 나와 행동을 같이해 주시기 바라오."

그러자 3천에 이르는 식객 모두가 하나같이 주먹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외친다.

"공자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저희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동을 같이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3 천 여 명의 식객들이 맨주먹으로 백여 대의 수레에 나눠 타고 趙나라로 떠나려고 하는데,

별안간 후생 노인이 나타나더니 손을 높이 들고 출발을 막으며 말한다.

"公子께서는 출발을 멈추시고 소생의 말씀을 잠깐만 들어주소서."

信陵君은 초조한 마음으로 후생 노인에게 말했다.

"지금 갈 길이 바쁜데,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


"아무리 바쁘셔도 제 말씀은 꼭 듣고 가셔야 합니다. ..... 공자께서는 지금 3천 명이나 되는 선비들을 데리고

가서 거의 맨주먹으로 秦軍과 싸우려고 하시는데, 그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맨 몸으로 뛰어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 "


"그렇다고 한 번 맺은 군사 동맹을 배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물론 군사 동맹은 지키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국경에 주둔중인 진비 장군의 10만

군사를 공자께서 직접 이끌고 가셔서 싸우셔야 합니다."

"진비 장군이 나에게 군사를 내어줄 리가 없지 않소 ?"

"대왕께서 가지고 계시는 兵符를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대왕께서는 그 병부를 寢전에 보관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하니 그 병부를 훔쳐서라도 진비 장군의 군사를 물려받도록 하시옵소서."


신릉군은 후생 노인의 말을 듣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참으로 좋은 방책을 말씀하셨소이다. 그러나 대왕께서 침전에 숨겨 두신 병부를 무슨 재주로 훔쳐낼 수가 있겠소이까 ?"

그건 "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後宮 '如姬'를 이용하시면 쉽게 훔쳐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공자께서

일찍이 후궁 여희의 부친의 원수를 갚아 드린 일이 계셨기 때문에 공자께서 직접 부탁하시면 , 如姬는 두 말 없이 兵符를 훔쳐내올 것이옵니다."


신릉군이 후생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 성싶었다. 후궁 如姬는 일찍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에게 원수를 갚지 못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알고, 신릉군이 사람을 고용해 원수를 갚아준 일이 있었다.

신릉군이 후궁 如姬 를 만나 부탁하니, 여희는 바로 그날 밤으로 병부를 훔쳐내왔다.

신릉군은 크게 기뻐하며 병부를 가지고 진비 장군의  주둔지로 달려가고자 하였다.


그러자 후생 노인이 만류하며 다시 말한다.

"장수가 戰場에 나가 있을 때에는 사정 여하에 따라서는 王命에 복종하지 않아도 무방한 경우가 있사옵니다. 따라서 공자께서 진비 장군에게 병부를 내보이셔도 진비 장군이 공자에게 군사를 넘겨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사태가 그렇게 되면 부득이 진비 장군의 목을 칠 수 밖에 없사오니 그런 때를 대비하여 주해(朱亥)를 꼭 데리고 가시옵소서."


"그 사람이 나를 따라가 주겠습니까 ?"

"이런 경우라면 공자께서 직접 찾아가 사정을 말씀하시면 반드시 따라 나설 것이옵니다."


신릉군은 후생 노인의 말을 반신 반의하면서도 부랴부랴 푸줏간으로 주해를 찾아갔다.

주해는 마침 푸줏간에 있었다.

그러나 주해는 신릉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전히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소 ?"

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신릉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찾아오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朱亥는 신릉군의 설명을 묵묵히 듣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옷을 갈아 입으며,

"그런 일로 오셨다면 같이 가십시다. 지금 곧 떠납시다!" 라고 하는게 아닌가?

義를 위해서는 주저함이 없는 주해였던 것이었다.


주해와 함께 길을 떠나려는데, 후생 노인이 전송차 따라 나선다.

"빨리 가야 하니, 선생께서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후생 노인에게 작별을 고하는 신릉군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생 노인이 그 눈물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


" 그건 두 가지 이유로 눈물이 납니다."

"그 두 가지 이유란, 무엇인지요?"

"첫째는 대왕의 뜻을 거역하는 不忠때문이고, 둘째는 국가에 공이 많은 진비 장군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후생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실로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충성에도 大忠이 있고, 小忠이 있는 법이옵니다. 대충을 위한 소충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후일 , 대왕께서 공자의 높으신 뜻을 이해해 주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안심하고 장도에 오르시옵소서."


그리고 10리 까지 따라오다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소생도 공자를 따라가고 싶사오나 너무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겠기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공자를 따르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사와 公子께서 진비 장군의 목을 치고 군사를 넘겨 받으셨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저는 공자의 성공을 비는 마음에서 그날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후생 노인은 그 후, 자기가 약속한 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生을 마감하였다.)


信陵君은 그길로 곧장 진비 장군의 주둔지로 달려가 兵符를 내보이며 군대를 물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생노인의 예측대로 진비 장군은 군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국경을 수비하는것은 대왕께서 저에게 부과하신 거룩한 책무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조서(詔書)도 한장 없이, 병부만 가지고 오셔서 무턱대고 군사를 내 달라고 하시니, 제가 그 말씀만 믿고 어떻게 군대를 내어드리겠습니까 ?"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때였다. 朱亥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품 안에 숨겨왔던 40근짜리 철퇴(鐵槌)를 꺼내 진비 장군을 일격에 쳐죽여 버렸다.

(흡사 수양대군이 수하인 林於乙云을 시켜 김종서 장군을 철퇴로 쳐죽인 것처럼..)


신릉군은 진비 장군을 처치한 뒤, 10 萬 군사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자 모든 군사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내렸다.


"너희들 중에 父子가 같이 나온 경우, 아비는 집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같이 나온 사람도 형은 돌아가고 아우는 남으라. 그리고 자신이 외아들인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도록 하라."

이렇게 정리하고나니, 10 萬 군사가 8 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8만의 군사들은 새로 지휘관에 오른 悳將 신릉군의 자애로운 조치에 감동되어 사기가 크게 오르게 되었다.


그 무렵 秦軍은 조도(趙都)인 한단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성안으로 화살과 돌 등으로 우박이 쏟아지듯,

공격을 퍼부어대니 한단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신릉군이 진군의 후방을 전격적으로 기습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後方의 대비가 소홀했던 진군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많은 군사를 잃고 패퇴하고 말았다.

신릉군은 평원군과의 약속대로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군을 괴멸시키고 승전보를 올리게 되었다.


趙王은 신릉군과 그의 군사들을 城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이며 말했다.

"공자의 도움이 없으셨던들 우리는 지금쯤 진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평원군도 신릉군의 손을 마주잡고 눈물로 감사한다.


진군이 격퇴되고 난 후, 신릉군은 데리고 온 군사들을 고국인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신릉군은 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왕명을 사칭하고 대장군 진비를 살해하고 군사를 무단으로 조나라 지원군으로 몰아 왔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고국에 돌아 갈 형편이 못되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조왕은 신릉군에게 5개 성시(城市)의 영주(領主)로 봉하여 생활을 보장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을 따라온 식객 하나가 이렇게 간한다.


"무릇, 모든 일에는 잊어야 할 일과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덕은 하루속히 잊어버리셔야 할 일이옵고, 대왕의 뜻을 거역하여 진비 장군을 살해하고 군사를 빼앗아 왔던 일은 결코 잊어버리셔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잊어야 할 일에 대한 공로로 5개 성시에 영주가 되신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되옵니다."

신릉군은 그 말에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영주로 취임할 것을 끝까지 사양하고 오로지 兵學에만 몰두하여 몇 해가 지난후, <魏公子兵法)>이라는 兵書를 저술하였다.


한편, 秦軍이 신릉군의 참전으로 여지없이 참패하고 돌아가자, 차제에 신릉군을 없애 버릴 계획으로 魏나라에 첩자를 대거 밀파하여 갖은 유언 비어로 신릉군을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신릉군은 魏王을 내쫒고 자신이 王이 되고자 지금 趙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의 諸侯들과 긴밀이 내통하면서 기회를 옅보는 중이다.>


이에 魏王은 크게 怒하여 < 역적 신릉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으면 三族을 滅함과 동시에, 그를 잡아 오거나 죽여 없애는 자에게는 천만금을 주겠다>는 榜文 까지 써붙였다.

신릉군은 趙나라에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괴로운 심사를 달랠 수가 없어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진나라 진양왕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있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조를 치는 것을 평생의 숙원처럼 여기고, 두 번째로 정벌군을 출정시킨 것인데 난데없는 위군의 기습으로 참패를 당한 군사들이 돌아오자 위나라에 대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즉시 승상 여불위를 비롯한 모든 장수들을 소집한 뒤 말했다.

"우리가 조를 치고 있는데, 사전에 경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가 후방에서 우리를 기습해 온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군사 20만을 줄테니 누가 나가서 위를 격파할 것인가 ?"


이에 대장군 몽오(蒙鰲)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륀다.

"臣이 魏를 격파하여 삼가 대왕의 진노를 풀어드리겠나이다."

몽오는 그날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위의 도성인 대량성(大梁城) 30리 밖에 진영을 구축하고 일거에

쳐들어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위의 중신들은 크게 놀라 왕에게 고했다.

"적장 몽오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30리 밖에 와 있으니 군사를 속히 일으켜 적을 격퇴시켜야

합니다."

위왕은 대경 실색하며 위공(僞公)과 가공(假公)의 두 장수를 불러 명했다.

"그대들에게 군사 각 5 만 씩을 줄테니, 좌,우 장군이 되어 적을 協攻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위공과 가공은 몽오 장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각 10여 합씩 싸워 보다가 급히 쫒겨 돌아와 위왕에게 고했다.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사오니 城門을 굳게 걸어 잠그고 새로운 계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魏王은 한숨을 쉬며 탄식한다.

"아아, 나라를 지켜 줄 장수가 한 명도 없으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오! "


그러자 위공과 가공이 모두 품하는데,

"나라를 구출할 능력을 가진 분은 지금 조나라에 가 계신 신릉군밖에 없사옵니다. 그 어른이 진비 장군을 죽이고 군사를 빼앗아 간 것은 趙나라와 맺은 군사 동맹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여겨지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왕께서 친서를 보내시어 귀국을 허락하신다면 신릉군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魏王은 사정이 워낙 다급한지라 신릉군 앞으로 편지를 써주며 말한다.

"그대들은 이 편지를 직접 신릉군에게 전달하고 급히 데려오도록 힘써보시오."

두 사람이 위왕의 친서를 가지고 조나라에 있는 신릉군을 찾아갔다.

신릉군은 왕의 친서를 읽어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진비 장군을 죽이고 군사를 빼앗아 왔던 사람이오. 그러나

대왕께서 나를 역적으로 몰아 나의 목에 천만금의 상금까지 걸어 놓으셨다고 하니, 내가 돌아가 본들 어찌 무사할 수가 있겠소."

신릉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렇게 신릉군이 귀국을 거절할 기색을 보이자, 모원(毛元)과 설의(薛義) 두 식객은 즉석에서 이렇게 간한다.


"공자께서 오늘날 만인에게 추앙을 받으시는 것은 국가에 충성하고 義를 명예롭게 여기셨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진군이 무차별로 공격하여 우리의 도성을 점령하고 종묘 사직을 불살라 버린다면, 공자는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실 수가 있으오리까. 하오니 속히 귀국하셔서 나라를 구하셔야 합니다."

신릉군은 그제서야 자신의 불찰을 깨닫고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위왕 앞에 엎디어 고한다.

"신은 백 번을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사온데, 대왕께서는 至親의 정으로 용서를 내려 주셔서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신은 제후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기필코 격파해 버리고 말겠습니다."

위왕은 아우의 손을 눈물로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賢弟를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은 나의 불민함이었소. 오늘로서 경을 (上將軍에 임명하니, 적을 무찔러 나라를 구해 주기 바라오."

신릉군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어전을 물러나오자, 곧 초(楚),연(燕), 한(韓),제(齊), 조(趙)등 다섯

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육국 연맹(六國聯盟)으로 진에게 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현명한 <四公子>의 한 사람인 신릉군은 평소에 모든 나라에 신망이 두터웠던 관계로 다섯 나라에서는 각각 지원군 5만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방 팔방에서 대량성을 둘러 싸고 있는 진군을 공격했다. 수세에 몰린 진군 대장 몽오가 죽기를 각오하고 마주 달려나와 싸우는데, 그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일진 일퇴를 거듭하는 싸움이 길어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띠고 진군과 마주 싸운던 신릉군은 한 계책을 내어, 젊은 병사 하나를 진군의 초마(硝馬)로 가장시켜 몽오 장군에게 달려가 품하게 했다.

"대왕께서 급서(急逝)하셔서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급히 회군하시라는 전갈이옵니다."

하고 말하니 몽오 장군은 크게 놀라면서 사기가 갑자기 저하 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합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대니 진군은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연합군은 간단한 술수 하나로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몽오가 급히 남은 군사를 이끌고 回軍하여 고국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敵의 모략이 아닌가 ?

장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이를 갈며 분노했다.


"여섯 나라가 공동으로 덤벼 왔다면, 이제부터 여섯나라는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 나는 여섯 나라 모두를 모조리 정복하리라."

그러나 장양왕은 그날부터 울화가 사무쳐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신릉군이 예측한대로 왕위에 오른지 4년 半만에 어이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하여 후일, 최초의 천하 통일을 이룩한 진시황 ,呂不韋의 아들인 太子 '政'이 등극하니, 이때 新王의 나이는 불과 13세였다.


* 이제 바야흐로 진시황의 시대가 도래한다.

또한 그의 어미이자 여불위의 여인이기도한 朱姬

도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지나치게 강한 요구에 여불위는...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계속>


          # 熱國誌 15 



    **呂不韋의 고민



장양왕이 急逝하고 후일에 천하를 통일하는 秦始皇

소년 '政'이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丞相인 呂不韋가 國政을 전담하게 되었다.


(내 아들이 王이 되었고, 태후인 朱姬는 나의 情婦니, 이제 秦나라는 사실상 나의 나라다 ! ..)

사람 장사에 올인한 뒤 큰 일을 도모한 지 14년, 呂不韋는 마침내 秦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남편인 장양왕이 죽고 나자, 주희의 정욕은 더욱 강렬해 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남편을 속이느라고 애를 태웠지만, 이제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체질적으로 음욕이 남달리 강한데다, 여인의 나이 서른한 살이면 생리적으로도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욕정이 발동하기만 하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丞相府로 시녀를 보내,

여불위를 太后宮으로 불러들이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呂不韋가 丞相府에서 國務를 보고 있는데, 태후궁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태후마마께서 승상을 태후궁으로 급히 듭시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고 아뢰는게 아닌가?


(또야 ? 이 백주에 또 그짓을 하자는 말인가 ? ...)

여불위는 태후의 뜻을 대뜸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불위 자신도 계집을 좋아하는 점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정력가다.

그러나 남녀 관계란 남자편에서 여자를 정복해야 맛이 있는 것이지, 여자가 먼저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적극적으로 덤벼들면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감 ?

그러나 朱姬는 이런저런 앞 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체질적으로 워낙 욕정이 강하다 보니 자신을 억제할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아무리 승상이라도 태후의 부르심을 묵살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朱姬는 정권의 실권자는 아니더라도 公的으로는 왕의 親母인지라 엄연히 왕실 최고의 인물었기 때문이다.

(또 한 차례 고역을 치루게 생겼군.)

여불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태후궁에 들어갔다.


태후는 좌우에 시녀를 한 명씩 거느리고 의자에 높이 앉아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얼굴에는 怒氣가 서려 있었다.


"태후마마, 찾아 계시옵니까?"

시녀들이 있는 앞이라 여불위는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朱姬가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丞相은 그것을 몰라서 물어 보시오 ? 승상을 부른 것이 언제인데 이제야 오시는게요?

승상은 태후인 나를 뭘로 알고 분부 거행이 이처럼 더디시오 ?"


여불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 太后 좋아하시네 ! 누구 덕으로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

이것이 이제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없나보군..)


그러나 呂不韋는 시녀들이 보고있는 앞인지라, 깍듯이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공하옵니다. 國務가 다망하와 분부 거행이 부득이 늦었사오니 관용을 베푸소서."


그러자 朱姬는 정색을 하며,

"국무에 바빠서 그랬다니 오늘은 특별히 용서하리다. 그 대신, 차후에는 분부 거행에 일각의 지체도 없도록 하시오. 알겠소 ? '

하고 앙큼하게 나온다.


"명심하겠습니다."

주희는 그제서야 좌우의 시녀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하고 命한다.


시녀들이 방에서 나가자 주희는 여불위에게 미친 소처럼 덤벼 드는데, 여불위가 그제사 자세히 보니

주희는 걷옷만 걸치고 있었을 뿐, 정작 전신은 완전한 나체였다.


呂不韋는 朱姬를 힘차게 껴안으며 나무랐다.

"이것아 ! 네가 무슨 태후라고 감히 나를 꾸짖는단 말이냐?."


"당신을 기다리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 나의 애타는 심정도 알아 달란 말이에요."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시녀들앞에서 승상의 체통은 지켜 주어야 할게 아니냐!?."

"나만 사랑해 주었으면 그만이지 승상이 무슨 대수예요? 

당신이 너무너무 그리웠어요. 어서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 주세요."


이렇게 미친듯이 교태를 부리는 朱姬의 下門에서는 벌써 소의 침처럼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 이것이 벌써!..)


여불위는 주희의 하문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을 보자 , 일순간 거시기가 불끈 발기되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선 채로 방망이처럼 달아 오른 자신의 물건을 주희의 玉門 속으로 힘차게 밀어넣었다.


"아, 아" ...

환희의 신음을 지르는 주희는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 붙듯이 알 몸으로 여불위에게 찰싹 붙어 매달렸다.


여불위는 주희를 매단채로 비단 금침이 깔려 있는 침전으로 한발짝 씩 다가갔다.

침전에 주희의 등이 붙자, 여불위는 우람한 자기의 체중을 실어 사정 없이 주희의 아랫도리를 윽박

질렀다. 주희는 자신 보다 두 배나 큰 여불위에게 짖눌려서 할딱 거리며 거친 숨을 뿜어냈다.

여불위도 자신의 男根에 모든 것을 실어 주희를 아낌 없이 탐했다...


격정의 폭풍이 지나고 나자,

"이제 그만, 내일이 또 있지 않느냐?"

여불위가 그만 물러설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주희는 ,

"내일은 내일이고, 이제 막 시작인데 벌써 그만두면 어떡해요."

하고 앙탈을 부린다.

여불위는 기가막혔다. 아니, 朱姬의 정욕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절제와 한도가 있어야 하는데. 주희의 애욕은 그 어느 것도 막아 낼 방도가 없단 말 인가 ? )

...


여불위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천정을 바라보며 누웠다. 그러자 주희는 한차례 방사를 저질러 한풀 꺾인 여불위의 거시기를 신기한 물건인양 자기의 손으로 연신 조물락거리며 발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한 번 더, 응? .."

벗은 가슴에 기댄 주희의 재촉에 여불위는 문득 자기 집에 거는리고 있는 미녀들을 연상하였다.


그들은 17, 8세의 소녀들이어서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신선한 맛이 넘쳐 흘렀다.

그래선지 여불위는 그녀들과 접촉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며 몸 조차 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주희와의 정사는 농후한 쾌락이 있는 반면에, 피로감이 현저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내 난 암코양이같은 주희에게는 감히 자신의 그런 기분을 말할 수는 없었다.


( 내 나이 이미 40이 넘었으니 이제는 주희를 멀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 ?)

이것은 여불위로서는 남모르는 고민이었다.


"한 번 더, 응!?..."

재차 재촉하는 주희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듣는 순간, 주희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여불위의 그것이 또다시 불끈 솟아올랐다.


(이것 참,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 ! )

여불위는 내키지 않는 몸을 일으켜 , 또다시 주희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


주희는 여불위와의 쾌락의 시간을 자그마치 다섯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어 말한다.

"오늘은 당신과 상의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와 상의할 일이 있다고 ...? 

무슨 일인데...? "


주희는 여불위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지금 이나라의 왕은 누구의 아들이죠 ? "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 그러나 그런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돼 !"

여불위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하면서 주희에게 자신의 둘째 손가락을 입술에 다면서 말했다.


그러자 주희는 오히려 여불위를 나무라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 애를 이만큼이나 속여 왔으니, 이제는 親父가 누구라는 것을 사실대로 알려 줘야 할 게 아니예요 ? 아버지가 아닌 사람을 10여 년간이나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느라고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 애한테 모든 비밀을 털어놓기로 합시다."

어미로서는 당연한 심정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불위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미쳤냐 ? 이제 와서 그런 비밀을 털어놓아 평지 풍파를 일으켜서 어떡하자는 거야. 이 나라의

實權만 장악하고 있으면 그만이지, 내가 그애의 아비라는 것을 밝혀 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여자는 감성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남자는 현실적이다.

여불위는 실속만 차리면 그만이지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주희는 아비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이 어미의 도리라고 생각되는지,


"그래도 天倫을 속일 수는 없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천륜 ? 하하 .... 잘 생각해 보라고. 만약 그 애한테 우리들의 비밀을 경솔하게 털어놓았다가, 그 애가 우리에게 반발이라도 하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지.... ? 그 애는 보통 아이가 아니고 이 나라의 왕이야. 게다가 그 애의 성격이 남달리 우악스러운데가 있거든, 그러니 그 애가 만약 반발이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 두 사람은 그 날로 목이 달아날 판이야. 그래도 비밀을 알려주자는 거야 ? "


주희는 그 말에 氣가 죽어 말한다.

"당신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장양왕을 친아버지로 알고 자라 온 그 애에게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면, 어미를 어미로 여기기보다는

더러운 창녀로 간주하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은 그 날로 끝장이 날 것이 뻔한데 , 그래도 좋으면 맘대로 하라구 ! "


주희는 '창녀'라는 언급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몸만 부르르 떨었다.

여불위는 주희와의 관계가 주위 사람에게 탄로나는 날이면 세상이 발칵 뒤집어 질 것 같아

진작부터 주희와의 관계를 청산해 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왕 말이 난 김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이의 비밀이 탄로나면 큰일이니까, 우리들도 이제부터는 만나기를 삼가하기로 하자구."

여불위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희는 대뜸 앙칼지게 반발하고 나온다.


"그것만은 안 돼요. 죽으면 죽었지, 당신을 만나지 않고서는 못살아요."


여불위는 주희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아,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자 주희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 말씀을 나도 이제는 잘 알아들었어요. 그 애한테는 우리 둘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께요.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과 같이 만나요."

"응, 알았어. 그러면 또 만나기로 하자구."


여불위는 부랴부랴 옷을 추려 입고 태후궁을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희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여불위의 옷소매를 움켜 잡으며 말했다.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거야 ? "

"그 애더러 당신을 중부(仲父)라고 부르게 하면 어떻겠어요 ? "

"중부...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당신은 그 애의 가짜 아버지였던 장양왕의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그 애더러 당신을 <중부>라고 부르게 할 수도 있지 않아요 ? 중부란 <작은 아버지>란 소리지만, 그 말도 아버지임에는 틀림 없으니까."


여자들은 자기 자식에게 아비가 누구라는 것만은 기어이 알려 주고 싶은 본능이 있는 것일까?..

주희에게 그런 집념이 강한 것을 느낀 여불위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비밀만 탄로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은 맘대로 하라구! "


여불위가 그 한마디를 내던지고 태후궁을 나오는데 문득 후원에서 여자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이상한 예감이 든 , 여불위가 발소리를 죽여 가며 후원으로 다가가 보니, 아까 태후전에 있던 시녀들이 나뭇그늘 아래서 서로를 부등켜안고 돌아가면서,

"그것만은 안 돼요, 죽으면 죽었지, 당신을 만나지 않고서는 못살아요."

하고 조금 전에 주희가 여불위에게 앙탈하던 말을 곧이곧대로 조잘대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어 보나마나, 이들은 방문 밖에서 여불위와 주희의 치정 행위를 낱낱이 엿듣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저것들이 우리의 비밀을 모두 듣고, 알았을 것이 아닌가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제아무리 대담부쌍한 여불위도 순갼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녀들 앞으로 성큼 나서며,

"너희들, 거기서 무얼 하느냐 !"

하고 호통을 침과 동시에 몸속에 품고 다니던 호신용 비수로 ,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시녀를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다.


이로서 비밀 탄로를 사전에 봉쇄해 버릴 수 있는 것만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 ...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반드시 밟히게 마련" 인데..


여불위에게는 주희와의 관계가 점점 골칫거리가

되었다..





*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으렸다.

'不可近不可遠' : 멀리도 가까이도 해서는 안된다.


옛 성현들은,

뜨거운 불(火)과 여자(女子), 그리고 부정한 돈(뇌물)은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했느니라...




               <계속>


          # 熱國誌 16



** 權力에 醉한 者가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때의 진나라는 戰國七雄 가운데 영토가 제일 넓었다. 北으로는 멀리 호령(胡嶺), 곡구(谷口)에 이르렀고, 南으로는 양자강 지류인 경수(涇水)와 황하 상류인 위수(渭水)를 둘러싼 곡창 지대와 서쪽으로는 서촉(西蜀)의 태산 준령이 가로 막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따로 없었고, 東으로는

함곡관(函谷關 : 오늘의 河南省 新安현 東쪽 끝에 있는 관문. 秦이 山東 六國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함준한 관문)과 효산(肴山)이 있어서 천혜의 (難功不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秦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는 쉬워도 他國이 秦나라를 공략하기는 쉽지않은 지형이었다.

게다가 先王인 소양왕때 부터 꾸준히 병력을 양성해왔으므로 군사와 무기는 막강하였다.


한편, 나머지 六國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들 여섯 나라는 황하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 소재하는 데다가 기후마저 온화하여, 백성들이 農耕하기가 최적이었고 人文도 융성하여 일찍부터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어 있었다.

趙, 魏, 韓, 楚 등이 그러한 나라들이었으나, 다만 그들은 영토가 작고 군사력이 약하여 군사력에서는 秦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秦에서는 소양왕 때부터 中原 諸國을 삼켜버리고 싶은 욕망이 넘쳐나 소양왕 스스로가 70 평생을 野戰에서 보냈거니와, 미래의 秦始皇인 소년 왕 '政'도 증조 부의 원대한 뜻을 이어받아, 등극한 그날부터 天下 統一의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 훈련을 계속해 오면서 시간을 내어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국토를 순회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나이에 비해 대단히 성숙한 소년 王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소년 왕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열다섯 살나던 해의 생일날이었다.

소년 왕은 생일 축하연 석상에서 만조 백관들에게 돌연 다음과 같은 폭탄 선언을 한다.

"내 나이 이미 열다섯 살, 男兒 열다 섯이면 당당한 대장부이건만, 나는 아직 영토를 조금도 확장하지 못했소. 이는 진실로 先王들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이에 결심한 바가 있어, 올해는 우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韓을 쳐서 영토를 넓혀나갈 계획이니, 경들은 나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열다섯 살짜리 소년으로서는 너무도 당돌하고 엄청난 폭탄선언이었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더니, 이 애가 나의 피를 이어받아서 배짱도 엄청나구나.)

呂不韋는 소년 왕의 패기에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하도록 기뻤다.

그러면서도 즉흥적인 선언이 너무도 무모해 보여 충고라도 해 줄 생각에,

"대왕 전하 ! ..."

하고 말을 하려고 하자, 소년 왕은 손을 들어 제지하듯 하면서,

"나의 명령에는 오직 복종만 있을 뿐이오. 丞相은 입을 다물어 주시오."

하면서 일언지하에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王의 命令은 절대권을 가진다.>

어린 소년에게 일찍이 이와같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여불위 자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교육을 시켜 놓아야 후일에 자기에게도 유리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소년을 절대권자로 만들어 놓은 이제는 자신이 아비라는 사실조차 말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명령에는 자신도 모르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을 수밖에 되지 않았는가 ? 그야말로 자승 자박(自繩自縛)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이야 어쨌든, 몽오 장군은 왕명에 따라 10만 대군을 이끌고 韓나라를 쳐들어가 13개 城邑을 일거에 탈취하였다. 이 싸움에서 장수 왕의가 戰死했으나 그런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秦王은 첫 번째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자, 이듬해는 魏를 쳐서 영토를 넓혔고, 또 그 다음 해에는 위를 다시 쳐서 산조성(酸棗城)을 빼앗았고, 다음 해에는 燕을 침공, 상양성

(上陽城)을 비롯한 20개 성읍을 빼앗아 東郡이라 부르게 하였다.


청년 秦王은 몇 번의 싸움에서 자신감을 얻자, 그때부터는 닥치는대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고 보니 인접 國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楚의 孝烈王이 丞相 春申君을 불러 상의한다.

"秦이 지금은 비록 魏와 燕만을 침략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도 침략해오리라 생각되는데

승상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


춘신군은 식객을 3천 명이나 거느리고 있는 '賢子'라~, 왕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秦의 목적은 秦에 의한 천하 통일에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침략의 마수를 뻗어

올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옵니다."

"만약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힘만으로 저 변방의 늑대같은 秦나라를 당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오 ?"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대책이라면, 어떤 것이 있겠소 ? "

"우리가 先手를 쳐서 秦을 쳐 없애야 하온데, 그러자면 趙, 魏, 韓, 燕나라 들과 군사 동맹을

맺어 秦을 공동의 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쉽게 들어 주겠소 ? "

"평화로운 시기라면 어렵겠지만, 韓과 燕은 지금 당장 秦의 침략에 고통을 겪고있기때문에 우리가 군사 동맹을 제안하면, 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옵니다."

"모든 일에는 사전 대비가 최상이니까, 경이 이 일을 시급히 추진해 주시오."


이리하여 춘신군은 군사 동맹의 중책을 띠고, 4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춘신군의 군사 동맹 제안은 가는 곳 마다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침략자 秦을 치기 위해 군사 동맹을 맺자고 하는데, 어느 나라가 싫다고 할 것인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도 군사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춘신군의 노력으로 5 國의 군사 동맹이 체결되자, 연합군은 秦王 6년에 드디어 秦을 치고자 출동하였다.

趙, 韓, 燕은 각각 군사 5 萬 명씩을 차출하였고, 위는 10 萬 명을 보내왔고, 楚는 15만 병력을 동원했다.

춘신군은 도합 40 萬의 대군을 거느리고 진나라 정벌의 장도에 올랐다.

그리하여 秦의 전초 기지인 수릉성(壽陵城)으로 노도와 같이 쳐들어가니 연합군 규모에 주눅이 든 城主 왕흘은 변변히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포기하고 함양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가 오른 연합군은 함곡관(函谷關)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수릉 성주 왕흘은 함양으로 도망쳐 와 御殿에 엎드리며,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어쩔 수 없이 城을 적에게 내주었사오니, 대왕께서는 엄벌을 내려주시옵소서."

하고 석고대죄한다. 그러나 秦王은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한다.

"전투에서 一勝一敗는 兵家之常事라 했소. 한 번 敗했다고 어찌 그대를 벌하리오."

하고 너그럽게 위로한다.

그러면서 어전에 侍立해 있는 군신을 둘러보며 말했다.


"적의 烏合之卒이 40 만 명이나 된다하니, 누가 저들을 무찌르겠소 ?"

"그 임무를 小臣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몽오, 왕전, 장한의 세 장수가 약속이나 한듯, 입을 모아 말했다.

秦王은 만면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두들 장하오. 그러면 세 분에게 각각 10만 명씩을 줄 테니, 함곡관 수장(守將)인 몽무 장군과 협력하여 적을 일거에 섬멸 하도록 하시오. 이번 싸움에서 승리하면 천하를 통일하는데 좋은 촉진제가 될 것이니, 장군들은 분투 노력해 주시길 바라오."


이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는 말투부터가 당당한 대왕이었다.

세 장수는 각각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나가, 삼면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연합군은 본래 전술과 병법이 각기 다른 군사들인지라, 일사 분란한 전법으로 배후로 공격해 오는 秦軍을 막아내기는 力不足이었다.

그리하여 제각기 도망치기에 바빴다. 총사령관인 春申君은 고군 분투하였으나, 진군의 공세가 워낙 거세어 결국에는 전선에서 2 백 여리나 후퇴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秦軍의 大勝으로 끝났다.

진왕은 전선에서 보내 온 승전보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승상 여불위를 불러 말했다.

"5 개국 연합군이 우리의 일격에 여지 없이 무너졌으니, 이제 천하에 우리를 당할 자 누가 있으리오. 천하를 통일할 날도 멀지않은 것 같은데, 경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여불위는 너무도 엄청난 질문에 대답이 곤궁하였다. 천하 통일이란 선왕인 소양왕 때부터 수 십년간 노력하였어도 못이룬 꿈인데, 그날이 지금 눈앞에 다가왔다고 장담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답을 해야 옳단 말인가 ? 여불위로서는 연합군을 한번쯤 무찌른 것을 가지고 천하 통일과 직결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誇大妄想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답을 주저하고 있노라니까, 왕은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듯이 다그쳐 물었다.


"승상은 왜 대답이 없으시오 ! 천하를 통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서 대답을 안 하는 것이오?"

여불위는 순간 크게 당황하여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옵니다. 대왕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인데, 무슨 일인들 불가능하겠사옵니까? 臣은 다만,

천하 통일이 몇 달 이면 가능할까? 그 점을 생각하던 중이었사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대답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비위에 거슬리는 대답을 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아서, 무심중에 아첨의 말이 나왔던 것이다.

청년 왕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 지, 별안간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몇 달이요 ? 하하하 ....우리가 아무리 强하기로, 몇 달 안으로 천하를 통일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천하를 통일 하자면, 아무리 줄잡아도 10년은 걸려야 할 것이오."

"아, 아니옵니다. 대왕의 지략과 용기라면, 천하를 통일하는 데 무슨 10년이 걸리겠습니까 ?"

"하하하, 아무튼 고맙소.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나는 기어이 천하를 통일하고야 말 것이오."


여불위는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너무도 옹졸하고 비겁해진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왜 나답지 못하게 이렇게도 비겁하고 옹졸한 인간이 되어 버렸는가 ? 

내 자식한테 애비라는 말조차 못 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떨기만 하고 있으니, 어째서 내가 이렇게 못난 사내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따지고 보면 이처럼 비겁하게 된 원인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데있는 것 같았다.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보존해 가려면, 왕 앞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비겁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권력과 영화의 이면에는 이처럼 비겁하고 옹졸한 생리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포의 한사(布衣寒士)로 지내던 옛날이 그리운 생각조차 없지 않았다.


그러나 구종 별배(驅從別陪)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집에 돌아오자, 꽃다운 시녀들이 문전에서 부터 아양을 떨며 영접해 주는 것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아니 이런 상황을 영원히 즐기고 싶었다.

그러면서 여불위는 자기 모순에 빠져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 자신을 자위하였다.


(王이란 인간이 아니고 하나의 우상(偶像)인 것이다. 따라서 우상과 사람 사이에는 부자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왕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에게는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이 지 ! )


부귀영화의 맛은 아편과 같아서, 한번 중독되면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呂不韋는 그러한 진리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길이 누리고 싶은 욕망에서 자신을

정당화 시키는데 급급했던 것이었던 것이다.^^


(** 오늘날 권력의 단맛에 취한 불쌍한 불나비같은 이들이여!


이 열국지를 보고 또 보아 너희들의 미래에 귀감을 삼도록 할지어다.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




                   <계속>


          # 熱國誌 17 



** 呂不韋와 代打 노애



열세 살에 등극한 '정'(政)이 열 아홉 살이되자, 이제는 아예 승상 여불위를 제쳐놓고 국정을 직접 관장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親政 사례가 점점 더해가 이제는 승상조차 턱으로 지시하는 오만한 독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천하를 통일하려는 집념은 날이 갈수록 강해져, 秦나라 백성들은 노약자를 불문하고 매일 고된 군사 훈련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절대 군주도 天災地變 앞에서는 속수 무책이었다.


(천재지변! ~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民族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려고할 때, 뒤쫒아온 애굽王 '바로'~


영화 '십계'를 떠올려보면 수많은 천재지변이 모세의 기도로 일어나는데...


그때, '바로'로 분한 당대의 명배우 '율부린너'는 지독한 애연가인데 폐암으로 일찍이 세상을 떴지만 그가 죽기 직전 유언으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 닿아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에게 전한다.


"내가 담배피우는 이 들에게 해줄 말이 있소. 

오늘 이 시간 부터 즉시 담배를 끊으시오" 였다.)


秦王 6 년에는 대 기근(大 饑饉)이 들어 수 백만 명의 백성들이 아사(餓死) 지경에 처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疫病이 전국을 휩쓸어 수만 명이 죽어 나갔다.


이처럼 액운이 연이어 겹친데다, 雪上加霜으로 대장군 '몽오'까지 病死하자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게되었다.

(아 아! 

人事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天運이 따르지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 )

秦王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呂不韋는 어린 王을 대신하여 챙기던 國事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오로지 영화만을 탐하게 되었다. 백성들이야 굶거나 말거나, 병들어 죽거나 말거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세월가는줄 모르고 호사스러운 酒池肉林에 빠져 있었다. 당시에 그가 거느리고 있는 奴僕의 수도 무려 만 명에 이르렀고, 侍女들만도 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 하나만 보아도 그가 누리는 영화가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呂不韋에게도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太后 朱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문제였다. 여불위는 여러가지 이유로 주희와의 관계를 진작부터 끊고 싶었다.

첫째는 자신과의 通情 관계가 王에게 알려지게 되면 목이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고,

둘째는 꽃봉오리 같은 시녀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구태여 시들어가는 계집에게 정력을 낭비하기가

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불위가 아무리 손을 끊고 싶어도 주희는 한사코 물고 늘어지며,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 해요 ! "

하고 앙탈을 부리는게 아닌가 ?

이렇다 보니, 여불위로서는 주희와의 만남은 쾌락이 아니고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주희와 緣을 끊는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

여불위는 여러 달을 두고 골머리를 앓다가 문득 어느 날 밤에 주희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생각해냈다.

"나 대신에 젊은 남자를 하나 소개해 줄까 ?"

여불위가 농담삼아 그렇게 말했을 때, 주희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옳지 ! 그것이 대답을 안 한 것은 간접적인 시인이 아닌가 ?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나 대신 다른 쓸 만한 사내를 하나 골라서 붙여 주면 될게 아닌가 ? )

여불위는 비로서 주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있는 妙策을 찾아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무렵 함양성 안에는 男根이 장대하기로 소문난 <노애>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이 자의 남근이 얼마나 굵고 크며 단단한지, 들리는 소문에는 그의 남근은 말의 그것(馬根) 보다도

거대하여 ,그것에다 마차 바퀴를 끼우고 돌려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노애'란 자가 그런 大物을 가졌다면 여불위는 자기 대신 그를 태후궁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는 하인을 시켜서 노애를 불러다가 자기 눈으로 그의 양물을 직접 보게되었다. 불려 온 노애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아랫도리를 내린 채,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데 과연 노애의 물건은 놀랄만큼 장대하고, 그것은 그야말로 땅에 닿을 듯 출렁거렸다.


"그만 하고 용두질(自慰)을 해 보아라 ! "

여불위가 불호령을 내리니 춤을 추던 노애가 수음(手淫)을 하는데, 장장 한 시각을 지나서야 정액을 쏟아내는데 그 양이 무려 한 바가지나 되는 것이었다.


(과연 놀라운 놈이로다 ! 저런 물건을 가진 놈이라면 제아무리 끼가 넘쳐나는 朱姬라도 결국은 거품을 물고 뒤로 자빠질 수밖에 없겠지!....)

여불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노애를 '때 빼고 光을 낸' 후 자신의 내실로 불러들여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준 뒤, 사람을 시켜 그의 수염과 눈썹을 뽑아, 내시(內侍) 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런 후, 태후궁으로 들여보내며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이 자는 부형(腐刑 : 男根이 잘리는 형벌)으로 처벌된 사람이온데, 심지(心地)가 무척 무던하오니,

태후께서는 환관(宦官)으로 쓰시도록 하시옵소서."


노애를 태후궁으로 들여보낸 뒤부터, 朱姬는 呂不韋를 일체 부르지 않았다.

노애가 여불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음은 말하면 잔소리라!


이로써 여불위는 그동안 시달려온 고민을 깨끗히 해결할 수가 있었다.


朱姬는 노애를 만나게 되자, 새로운 청춘을 맞는 기쁨에 넘쳐있었다.

서로의 情이 얼마나 깊었는지, 태후 주희는 몇 달후 임신까지 하게된다. '政'을 낳은 뒤로도

여불위와 숱한 관계를 가졌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불임증(不妊症)에 걸린 줄만 알고 있었는데,

20 년이 다 된 지금, 덜컥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임신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없는데 아이를 배었고, 더구나 구중 궁궐에서 생활하는 태후가 아기를 갖게 되었으니 이만저만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고집과 독선으로 뭉친 무소불위의 秦王이 알게라도 되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 시의(侍醫)에게 부탁하여, 아기를 떼어 버리기로 할까 ?"

주희는 걱정이 태산 같아서 노애에게 물어 보았다.

노애는 뛸 듯이 놀라며 노발대발했다.

"떼어 버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 뱃속에 아기가 누구의 자식인데 맘대로 떼어 버리겠다는 거요 ?"


얼마전 까지만해도 거리의 한량에 지나지 않았던 노애였지만, 태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당당한 서방 행세를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뱃속에 아이가 당신 자식이지 누구 자식이겠어요. 그렇지만 ..."

"그렇지만, 뭐가 어쨌다는 거요? ! "

노애는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일국의 태후도 자신의 뱃속에 아이를 넣어 준 서방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지, 노애의 호통을 듣고서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한다.


그러면서 주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노애의 손을 살갑게 잡아다니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당신의 애를 지워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 일이 王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우리들의 목이 달아날 판인데, 어쩌면 좋아요 ?"


노애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태후의 뱃속에 들어 있는 지 자식을 떼어 버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노애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 올랐는지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애를 떼어 버려서는 안돼 ... !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도만 있다면 나도 당신 아이를 꼭 낳고 싶어요."

"그러자면 복술사(卜術師) 한 사람을 매수해야 할 거야."

"복술사를 매수해서 어떡하자는 거예요 ?"

"당신이 태후궁에 그냥 눌러 있으면 신수가 불길해지니까,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야 좋겠다고 하면 될 게 아냐. 그래서 나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나기만 하면, 애가 아니라 어른을 낳더라도 알게 뭐야 ?"


주희는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 액땜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나 있어야 좋겠다고 하면 왕도 쾌히 허락해 줄 테니, 우리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복술사 한 명쯤 매수하기는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복술사는 진왕을 찾아 뵙고 매우 걱정스럽게 품한다.

"태후마마의 금년 운수가 너무도 불길하시옵니다."

홀어머니에게 극진한 진왕은 , 복술사의 말을 듣고 크게 걱정했다.

"어머님의 운수가 불길하다면, 어떤 방도를 하여야 액운을 면할 수가 있겠나 ?"

복술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태후마마께서 액운을 면하실 길은 오직 한 가지 방도가 있을 뿐이옵니다."

"그 한 가지 방도란 어떤 것인가 ? 그대도 알다시피, 어머니께서는 일찍이 홀로 되셔서 매우 외롭게 지내시는 형편이니 내가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 되지 않겠나 ?"

"효성이 지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태후마마께서 액운을 면하시려면, 西方으로 千里 이상 떨어진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요. 함양에서 서쪽으로 1,500리쯤 떨어진 곳에 옹성(壅城)이라는 별궁

(別宮)이 있으니, 그리로 가시게 하면 될게 아니겠나 ?"

"좋으신 생각이시옵니다."


이리하여 태후 주희는 진왕의 특별 배려로 옹성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그를 모시고 가는 시종들의

숫자가 무려 2천 명에 이르렀다.

옹성으로 옮겨 온 주희와 노애의 생활은 신혼 부부와 다름없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남의 눈을 피해 조마조마하게 밀회를 해 오다가, 이제는 마음 놓고 만나 즐길 수 있는 자유가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이다.


이듬해 여름에 주희는 아들을 낳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생겨나자 노애에 대한 주희의 情은 더욱 깊어져, 주희는 마침내 秦王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上疏文)을 올린다.


<내가 산첩첩 운중중(山疊疊雲重重)한 벽지(僻地)에 와서, 몸과 마음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환관 노애의 덕택이오. 내게 대한 노애의 충성이 이렇듯 극진하니, 대왕은 그 점을 참작하시어 환관 노애에게 작위(爵位)를 내려 주소서.>


진왕은 그 상소문을 받아 보고 매우 고맙게 여겨, 노애에게 <장신후(長信侯)>라는 작호를 내림과 동시에 옹성 주변 5만 호의 侯主로 봉하기까지 하였다.


이제 노애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영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궁전을 새로 짓고, 정원을

새로 꾸미고, 날마다 사냥을 즐기면서,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1년 만에 주희가 또 하나의 아들을 낳게 되자, 노애는 새로운 욕심이 생겨나서 주희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들을 둘 씩이나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現 王을 폐위 시키고 우리들의 아이를 秦王으로

옹립하는 것이 어떨까 ?"

주희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그건 절대로 안 돼요. 그런 역모를 꾸미다가 들통이 나는 날이면 우리 네 식구는 살아 남지를 못해요. 허욕 부리지 말고 여기서 언제까지나 단란하게 살아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노애는 역모를 꾸밀 생각만은 일단 포기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버릴 수가 없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애국>으로

독립시켜 놓고, 자기 스스로를 <애왕>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興盡悲來라고 했던가?..




               < 계속>



          # 熱國誌 18



    ** 呂不韋와    노애의 몰락



奴僕을 千名씩이나 거느리고 太后 朱姬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둘과 온갖 영화를 누리고 있는

노애는 시간이 갈수록 엉뚱한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기회를 보아 秦王을 죽이거나 쫒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그 자리에 올려 앉히고자하는 野心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아들을 둘이나 두었으니, 이제는 秦王을 쫒아내고, 우리 아이를 王으로 세워야할 게 아닌가 ?"


노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자 朱姬는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 돼요. 그 애(秦王)가 얼마나 무서운 아이인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까 ?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의 비밀이 탄로라도 나는 날이면, 그 날로 우리들 목이 날아갈 줄 아세요."

"당신은 무슨 못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그 애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 줄 아오? 그 애 하나만 없애 버리면, 秦나라는 우리들의 나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


朱姬는 몸이 떨려서,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입장은 난처하였다.

노애와 그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秦王도 자기 뱃속에서 나온 친자식이 아닌가? 따라서 노애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여불위의 몸에서 태어난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秦王 9년 이른 봄 어느 날, 

노애는 미녀들을 거느리고 주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太后殿 시녀인 계씨 부인(季氏夫人)이 술 심부름을 하던 중, 실수로 노애의 옷에 술을 엎질렀다.

그러자 노애는 벌컥 화를 내며, 벼락 같은 소리를 질렀다.

"네 이년! 용포(龍袍)에 술을 엎지르는 년이 어디있느냐 !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이년을 당장 궁중에서 쫒아내라 ! "

(龍袍라! ~

지가 秦王이라도 된 듯한 말인데...)


계씨 부인은 그 자리에서 궁중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조그마한 실수로 宮을 쫒겨나게된 그녀는 노애에게 앙심을 품을밖에 없었다.

(내시로 가장하고 대왕을 속여가며 태후와 관계하는 주제에, 감히 나를 쫒아낸다고?! ..)

계씨 부인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 여자가 恨을 품으면 5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사실을 노애는 몰랐을까 열락에 취하여 잊었을까?..


(독자 제위께서도 女人이 恨을 품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시기요. 제주의 '고유정'이를 생각해보시길! 어휴!! 무시라^^)


그런데 저녁쯤 되자 들려오는 말에 노애가 계씨(季氏)부인을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게 아닌가 !?


계씨 부인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는 밤을 도와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도망을 가려고 길을 나서니, 갈 곳은 무려 1,500里나 떨어진 함양뿐이었다.

季氏 부인은 이를 악물고 태산 준령을 넘고 넘어서 두 달 여 만에 함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궁궐로 직행하여

대사(大使 : 王의 비서실장 格의 벼슬. 조선시대의 도승지.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조고(趙高)를 만난다.


趙高는 계씨 부인의 초췌한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대는 태후마마를 모시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이런 모습으로 옹성에서 돌아왔는가 ?"

계씨 부인은 울면서 대답했다.

"저는 추잡스러운 노애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야반에 도망을 쳐서 山 넘고 물 건너 돌아왔사옵니다."

"노애가 추잡스럽다니, 그게 무슨소린가 ? 노애는 내시가 분명한데, 내시가 어떻게 추잡스럽단

말인가?"


季氏 부인은 , 그동안 있어 왔던 노애와 태후와의 관계를 낱낱이 告해 바쳤다.

趙高는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 사실을 즉시 秦王에게 아뢴다.

秦王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生母인 太后가 관련된 일이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애는 內侍가 분명한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나? 자세한 내막은 내가 옹성(壅城)에 직접 내려가서 처분할 것이니 길 떠날 채비를 차리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옹성에 다녀올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진왕은 지방 순시를 명목으로 옹성으로 떠나는데 趙高도 王을 수행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노애는 秦王이 지방을 순시하는중에 壅城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하늘이 내게 준 찬스다"

이 기회에 秦王을 없애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王으로 세울 野心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애는 가짜 옥새(玉璽)를 만들어서 가까운 고을에 주둔하고 있는 근위 부대(近衛部隊)와 근위 기마대(近衛驥馬隊)에 <옹성으로 급히 집결하라>는 긴급 군령을 王命(秦나라 왕)으로 내렸다.


秦王이 옹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역적 도당을 소탕한다>는 대의 명분을 내세우고, 근위 부대로 하여금 왕의 숙소인 기년궁(紀年宮)을 급습하게 하여, 秦王을 단숨에 제거해 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노애의 심복 부하들은 그러한 반역 행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애가,

"만약 이번 일이 뜻대로 되어 나의 세상이 되기만 하면, 그대들에게는 정국 공신(靖國功臣)의 칭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식읍(食邑)을 하사하여 子子 孫孫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니,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해 목표 달성에 추호도 차질이 없도록 하라 ! " 는 특별 지시를 내리는지라, 그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역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秦王은 이처럼 무서운 역모가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옹성에 도착하자, 곧 숙소인 기년궁으로 향했다.

그날 밤은 기년궁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에 태후궁으로 생모를 찾아갈 예정이었다.

秦王이 행차할 때는, 趙高는 항상 왕의 행차보다 수백 보쯤 앞서 가며, 왕의 행차에 위험요소가 있는지 살펴 보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발견되면, 그 누구라도 가차 없이 처치하였다. 이처럼 趙高는 秦王에게는 다시 없는 심복이었다.


이날도 王의 행차가 기년궁으로 향하자 조고가 一團의 護衛軍을 거느리고 앞질러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는데, 난데 없는 기마병 하나가 앞쪽에서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냐! 게 섰거라 ! "

조고는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목을 칠 듯이 달려나갔다.


그런데 마주 달려오던 기마병이 趙高를 보고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말을 멈춰서며,

"아니, 아저씨가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


그제서야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청년은 이웃 고을의 근위 대장으로 있는 조고의 조카인 희광(熙光)이가 아닌가 ?

"너 희광이 아니냐 ? 네가 여기 웬일이냐 ? "

"저는 王命을 받아, 근위 부대를 인솔하고 조금 전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王命에 의해 출동을 했으니까, 아저씨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

"뭐라고 .... ? 왕명에 의해 근위 부대를 인솔해 왔다고 ? "


조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언가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도 모르는 王命을 누가 너에게 내렸단 말이냐 ?"

"왕명이 내려진 것을 아저씨가 모르신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니옵니까 ?"

희광은 고개를 갸웃해 보이면서,

"그렇다면, 제가 군령장(軍令狀)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번 살펴 보시지요."

하며 주머니에서 군령장을 꺼내 보였다.


마침 그때 秦王의 행차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한 얘기는 大王을 기년궁으로 모신 연후에 나누기로 하고, 너도 나를 따라오너라."

趙高는 大王을 기년궁으로 모시고 나서, 희광과 단둘이 다시 만났다.

그리고 군령장을 자세히 살펴 보니, 거기에는 분명히 大王의 옥새가 버젓히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옥새가 가짜라는 것을 조고는 한번에 알아 보았다.

"이 군령장에 찍힌 옥새는 틀림 없는 가짜다 ! 그렇다면 누가 역모를 하려고 꾸민 일인데, 이런 엄청난

짓을 할 사람은 노애가 아니고서는 없을 것이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군령장은 옹성 성주 노애로 부터 받았습니다."


趙高는 즉시 사람을 놓아, 노애의 동태를 은밀히 정탐해 오게 하였다.

얼마후 돌아 온 정탐꾼은,

"노애는 오늘 밤 축시(丑時)를 기해 기년궁을 급습하여 대왕을 살해하고, 자기 아들을 왕으로 옹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무어라! ? 大王을 살해하고, 자기 아들을 王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


조고는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추스린 다음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런 음모가 있는 줄 어찌 알아냈느냐 ?"

"태후마마를 호위하는 군사중에 제 친구가 한 사람 있사온데, 음모의 내막은 그 친구로부터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태후마마도 이 사건에 연류된 것이냐 ?"

"태후마마는 처음부터 이런 음모에 반대하고 계셨기 때문에, 오늘 밤의 계획은 전혀 모르고 계신다고

합니다."

"잘 알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거라."


노애의 반역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자, 조고는 즉시 秦王에게 모든 것을 고해 바쳤다.

秦王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노애 일당을 지금 당장 체포하여 거열형(車裂刑 : 사지를 넉 대의 수레에 묶어 네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하라 ! "

하고 命했다.

그러나 趙高는 침착하게 왕에게 품했다.


"노애가 축시에 거사하기로 했으니, 자시(子時)에는 일당이 틀림없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옵니다. 이때에 놈들을 일망 타진 (一網打盡)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뢰옵니다."

말하자면 노애가 거사하기 두 시간 전에 그들의 본거지를 일시에 급습하여, 일당을 한 놈도 남김 없이 쓸어 없애자는 것이었다. 이렇듯 아무리 위급한 때에도, 趙高의 지략은 침착하고 치밀하였다.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비서실장 깜이로다!)

조고의 의견은 즉시 채택되었다.


이날 밤 자시, 趙高는 秦王의 親衛 부대와 조카 희광의 근위 부대를 몸소 이끌고 노애의 본거지를 급습하여,

노애의 심복 부하 20 여 명을 잡아 즉석에서 목을 베었다.

그러나 노애는 음모가 탄로난 낌새를 알아채고 도망가는 바람에, 체포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秦王은 더욱 진노한다.


"노애를 잡아 오는 자에게는 상금 50 萬냥을 주리라."

하는 방문을 널리 써 붙이게 하는 동시에, 태후의 몸에서 태어난 노애의 두 아들과 노애가 거느리고 있던 수 천명의 노복들도 가차없이 몰살시켜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三族이 멸문지화된 숫자만도 무려 5 萬 에 이르렀다.


노애 일당을 일망 타진하고 나서 그 사건의 경과를 면밀하게 조사를 해 보니, 태후에게 노애를 천거한 사람은 , 다름아닌 丞相 呂不韋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뭐야 ? 태후에게 노애를 천거한 사람이 呂 승상이었다구 ? 그런 자가 무슨 승상이며 빌어먹을 仲父란 말이냐? ! "


秦王은 다시 한번 크게 노하며, 태후를 만나 보지도 않고 그 길로 바로 함양으로 돌아와 버렸다.

무자비한 秦王도 차마 생모만은 죽일 수가 없어서 , 그냥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진왕은 함양으로 돌아오자, 여불위를 제외한 모든 중신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했다.

"승상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 사건에 관련되었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따라서 여불위의 관직과 직위를 모두 박탈하고, 그를 참형에 처하시오. 승상 후임에는 객경(客卿) 이사(李斯)를 임명하오."


중신들은 영문을 몰라, 모두 어리둥절하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더니, 여불위는 승상의 권세를 누린 지 12년 만에, 뜻밖에도 참형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승상으로 임명된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여불위의 죄상에 대한 대왕의 분부는 지당하신 분부이신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先王에 대한 그의 공로는 至大한 바가 있사오니, 減 일등하시와 流配刑에 처하심이 어떠하올지 再考의 은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진왕도 그 말에는 일말의 수긍되는 점이 있어,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붓을 들어 여불위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써 주었다.


<그대는 진왕실(秦王室)과 아무런 혈연(血緣)도 없으면서 나에게 仲父라는 존칭을 받아 왔었고, 게다가 승상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역적 도당들과 관계를 맺어 왔으니 이는 나를 속여 온 것이 분명하오.

이 죄는 백사(百死)에 처함이 가당하나, 先王과의 은의를 참작하여 서촉(西蜀)으로 유배를 명하니, 즉시 분부대로 거행하오.>


여불위는 진왕의 친서를 받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아!  이제 다 늙은 몸이 서촉 산중으로 유배를 가서, 무슨 보람으로 여생을 살아가랴. 불경에 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더니, 나는 내 손으로 뿌린 惡의 씨앗으로 인해, 업보(業報)를 당하는구나.

내 자식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는 말 한 마디조차 못 해보고, 결국에는 자식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 "

여불위는 이같은 탄식을 하면서 스스로 毒藥을 마시고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53세이었다.


여불위가 죽은 지 두 달후에, 옹성에 사는 늙은 농부가 노애의 수급(首級)을 보따리에 싸들고 진왕을 찾아왔다. 노애가 산중에서 극약을 마시고 자진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서 함양까지 장장 1,500리를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노애가 분명하였다. 秦王은 농부에게 상금을 내주며 그를 치하하였다.


(운명의 장난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친 자식에게 애비라는 말 한 마디 못한채 자살하고, 저를 낳아준 아비인지도 모르고 지 애비 목을 따온 자에게 크나큰 상금을 내린 후일의 진시황!...)


이렇게 노애의 사건이 일단락 되자, 老臣 모초(茅焦)가 진왕에게 간한다.

"태후마마를 옹성에 방치해 두심은 효에 어긋나시는 일이옵니다. 이젠 태후를 함양으로 모셔 오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秦王은 生母인 태후가 원망스럽고 불만도 많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홀로 되다보니, 그런 과오도 범할 수 있었으리라 싶어 그해 가을 태후를 감천궁(甘泉宮)으로 다시 모셔 왔다.


** "심은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