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漢 11년 10월 어느 날, 淮南王 英布는 文武諸臣들과 함께 望江樓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술이 취해가고있을 때, 梁나라에서 라는 初老가 찾아와, "대왕마마 ! 梁王 彭越 장군께서 수 일 전에 逆賊으로 몰려 漢帝에게 무참히 주살되셨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英布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요 ? 彭越 장군이 逆賊으로 몰려 주살을 당했다고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
난포는 彭越이 죽게 된 연유를 자세히 告하고 나서, "대왕께서는 韓信 장군, 彭越 장군과 함께 漢帝가 천하를 통일할 때, 三大 功臣 中 한 분이시옵니다. 그런데 韓信 장군과 彭越 장군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이미 주살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는 大王이 禍를 입으실 것이 분명하오니, 각별히 對備를 하셔야 하옵니다." 하며 극히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다.
英布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漢帝가 開國功臣들을 주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韓信과 彭越 장군이 무슨 逆謨를 했다고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단 말인가 ? 유방이란 者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죽은 친구들의 怨魂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결코 坐視하지 않겠다 ! "
英布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예하의 20 萬 군사에게 총 동원령을 내린다. 그러자 大夫 費赫이 나서며, "대왕마마 ! 군사를 출병함에는 天時와 地利의 묘를 보셔야 하옵니다. 꼭 군사를 발동 하시려면, 趙나라와 燕나라에도 격문을 보내시어 山東을 근거로 하여 협동 작전을 펴도록 하시옵소서. 그렇지 않고 단독으로 出兵하시면 반드시 패하게 되시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韓信과 彭越을 逆賊으로 몰아 죽인 유방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費赫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마마 ! 유방은 백만 대군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張良과 陣平 같은 謨士도 있고, 번쾌와 灌瓔 같은 勇將들도 수두룩하옵니다. 우리가 단독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들지 아니하오니 趙, 燕과 연합하여 싸우도록 해야만 할 것이옵니다."
英布는 費赫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벼락 같은 호통을 친다. "이 겁쟁이 같은 사람아 !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가?. 유방은 이미 늙어서 맥을 못쓰는 인간이다. 韓信과 彭越이 없는 지금, 감히 나를 당해 낼 자가 누가 있다고 그런 못난 소리를 하고 있는가? ! 나 혼자서도 능히 유방 따위는 엎어버릴 자신이 있으니 두고 보라 ! "
영포는 費赫을 힐문하고 나서, 20 萬 군사를 일으켜 출동한다. 영포는 長安에 접근하기 용이한 지역부터 정복하기 위하여, 우선 이웃해 있는 楚나라부터 쳐부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대장 劉賈를 죽이고 楚王 劉交를 생포했다. 그 다음에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吳나라를 取하고 다시 蔡나라로 진격하니,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유방은 그러한 보고를 듣고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淮南王 英布가 반란을 일으켜 楚와 吳를 점령하고, 시시각각으로 長安을 향해 공격해 오고 있으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 重臣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英布가 제아무리 반란을 일으켰다해도, 폐하께서 직접 征伐에 나시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유방은 상대가 英布인지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자 汝陰侯 騰公(여음후 등공)이 나서며, "지금 臣의 집에는 薛公이라는 손님이 한 분 와 있사온데, 그는 일찍이 項王시절에 令尹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사람으로, 지혜도 많고 지략도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가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혼잣말로 < 흥 ! 풀벌레 같은 친구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 >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이것은 薛公이라는 사람이 英布를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오니, 폐하께서 그 사람을 한 번 만나보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 "그렇다면 그 薛公이라는 사람을 곧 이리로 모셔오도록 하오."
薛公이 御殿으로 들어와 유방에게 말한다. "英布가 만약 上計를 쓴다면 산동 지방은 영포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가 中計를 쓴다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오나 그가 만약 下計를 쓴다면 조금도 염려할 바가 없사오니, 그때에는 폐하는 마음놓고 낮잠이나 주무시도록 하시옵소서." 유방은 薛公의 말이 너무도 뜬구름 같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貴公의 말씀은 나로서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오."
그러자 薛公이, "上計라 함은, 英布가 吳, 楚, 齊, 노나라 등을 점령하고 난 뒤, 燕, 趙나라등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면, 山東 지방은 英布에게 예속될 것이옵니다. 英布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上計라고 하겠습니다." "으음 ..... 그러면 中計라 함은 .... ?"
유방의 질문에 薛公이 다시 대답한다. "만약 영포가 吳, 楚, 韓, 魏 나라 等을 점령하고 成辜城과의 통로를 완벽하게 막아 버리면, 그후의 승부는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온데, 이것이 바로 中計이옵니다." 유방은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下計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게요 ?"
薛公이 다시 대답한다. "英布가 만약 吳나라와 蔡나라만을 점령하고 越나라를 소중하게 여겨 군사를 長沙로 돌린다면, 그때는 폐하께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것이 바로 下計이옵니다." "그렇다면 貴公이 보시기에, 英布가 어떤 계략을 택하리라고 보십니까 ?"
薛公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제 예상으로는, 英布는 아마도 下計를 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下計를 ? 그 이유는 무엇이오...? " "英布는 본래 여산의 山賊 출신으로, 沈謨遠計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힘이 세고 武勇이 출중한 덕분에 어쩌다가 장군이 되었고, 폐하를 만난 행운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제는 蠻勇에 치우쳐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된 것이옵니다. 그러니 그가 어찌 上計나 中計를 쓸 수 있사오리까 ?"
유방은 薛公의 말에 감탄하여, 즉석에서 薛公에게 천호장(千戶長: 지금의 시골 面長)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面長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과연 유방답구나.) 그리고 몸소 三軍을 거느리고 英布 征伐에 나서 라는 곳에 陣을 치고 敵情을 알아 보니, 영포는 吳나라와 蔡나라를 점령하고, 지금은 50 里쯤 떨어진 壅山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薛公이 예상한 대로 英布가 를 쓴다고 판단되자 유방은 쾌재를 부르며, 王陵을 선봉장으로 삼고, 灌瓔과 周勃을 뒤따르게 하여 英布 軍을 향하여 진격한다. 이에 영포가 마주 달려 나오자, 王陵은 英布에게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외친다. "영포는 듣거라 ! 그대는 본래 여산의 山賊 출신이 아니냐 ? 그런 그대를 漢帝께서는 왕위을 제수하시어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모르고 이렇게 반란을 일으키는가?! "
그러자 영포가 맞받아친다. "이놈아 ! 너야 말로, 본래 沛縣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싸움이나 일삼던 불한당이 아니었더냐 ! 나는 내 힘으로 지금의 내 지위를 쌓아올린 大王이다. 유방이란 者는 奸惡하기 짝이 없어 韓信과 彭越 같은 開國功臣을 누명을 씌워 모조리 잡아 죽였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가 아니겠느냐?! 너도 유방의 손에 죽고 싶지 않거든 나와 힘을 합해 유방을 때려잡자. 그 길만이 너도 살고 나도 살 길이다. ! "
王陵은 영포를 설득하기가 글렀음을 알고, 長劍을 휘두르며 영포를 향하여 달려간다. 그러자 영포도 鐵槌(철퇴)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달려나와, 두 사람간에는 불꽃 튀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두 장수의 싸움은 그야말로 龍虎相搏戰이었다. 장검과 철퇴가 불꽃을 튀기며 일진 일퇴 하기를 무려 30 여 합, 마침내 王陵이 힘에 부치는 모습에, 이번에는 周勃과 灌瓔이 달려 나와 좌우에서 협공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英布의 陣營에서도 난포가 많은 군사들을 몰고 나와 영포를 도우니, 兩 軍間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는 동안 中軍으로 달려온 劉邦이, 영포가 점차 지쳐 오는 것을 보자, 많은 군사를 몸소 몰고 나와 파상 공격을 해댄다. 英布는 그제서야 勢 不利를 깨닫고, 난포와 함께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한다.
"저놈들을 모조리 몰살시켜라 ! " 유방은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영포와 난포의 뒤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난포는 쫒겨 달아나면서도 彭越이 유방의 손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彭越 장군이 누명을 쓰고 간교한 저 유방의 손에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나는 이 기회에 주인의 원수를 갚아 드리고야말리라!"
이렇게 생각한 난포는 후퇴하다 말고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 활시위를 당겨 들고 유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黃金 전포를 입은 劉邦이 눈앞에 나타나자, 난포는 유방을 겨눈 화살을 유감없이 쏘아갈겼다. 그 순간 유방은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편 어깨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야 만다.
** 漢高祖列傳 22
※ 아! 英布도 가다
劉邦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將帥들이 추격을 중단하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리고 유방을 急히 陣中으로 모시고 돌아와 戰醫에게 보이니, 다행히 重傷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유방은 이를 갈며, "英布란 놈은 내가 중상을 입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이 기회에 영포를 철저하게 짓밟아 때려잡도록 하라."
그러나 陣平이 만류하며, "지금 당장 공격을 퍼부어서는 안 되옵니다. 우리가 며칠 동안 잠자코 있으면 英布는 폐하께서 중태에 빠지신 줄로 알고 지가 먼저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잘 이용하여 그들을 철저하게 쳐부셔야 하옵니다."
유방은 진평의 계교를 옳다고 여겨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영포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曺參은 3 萬의 군사를 거느리고 長沙로 가서 敵의 糧道를 차단하라. 그리고 灌瓔은 2 萬의 군사를 이끌고 陸安으로 가 英布의 가족들을 생포해 오고, 기통과 周勃은 3 萬의 군사를 이끌고 淮江으로 가서 敵의 渡江에 대비하고 있도록하라 ! "
한편, 英布는 유방이 필연코 報復戰을 전개해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비를 철저히 갖춰 놓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으나 유방은 며칠이 지나도 싸움을 걸어 오지 않는지라, 영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漢軍이 복수전을 걸어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유방이 어쩌면 이번 戰傷으로 중태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제에 우리가 선제 공격으로 저들을 때려부숴야 할 때가 아닌가 ?)
英布는 그런 생각이 들자 삼군에 總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난포가 나서, "유방에게 활을 쏜 사람은 저이온데, 유방은 결코 重傷을 입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敵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은 필시 우리를 속이는 계략을 쓰고 있는 듯 하옵니다. 하오니 저들의 계략을 모른채 함부로 덤비는 것은 절대로 경계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영포는 난포의 충고를 옳다고 생각되자, 적의 반응을 떠보려고 소규모의 군사들을 보내 일부러 싸움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집적거려도 漢軍 진영은 조용하기만 할 뿐 맞써 싸우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포가 며칠을 두고 같은 전략을 펼쳐 보았으나 漢軍의 반응이 없자, 영포는 마침내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유방이 병석에 누워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오늘 밤을 기해 총공격을 가하여 敵을 일거에 괴멸시켜 버리기로 하자." 그러나 난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諫한다. "유방의 謨士인 陣平은 張良 다음가는 귀신 같은 者입니다. 그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시간을 두고 좀더 정확한 실태를 알아내야 합니다."
난포의 입에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飛馬가 달려오더니, "대왕마마 ! 큰일났사옵니다 ! " 하고 아뢰는 게 아닌가 ? 英布는 눈을 크게 뜨며, "이놈아 ! 무슨 큰일이 났다고 그러느냐? 허둥대지 말고 분명하게 말해라."
飛馬는 몸을 떨며, "대왕마마 ! 敵將 기통이 후방으로 우회하여 우리의 本陳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英布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하게 묻는다. "뭐야 ? 敵이 우리 本陣을 점령했다구 ? 그게 사실이냐 ?"
가족들이 납치되었다는 소리에 英布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무어라! ? 그놈들이 내 가족들을 송두리째 납치해 갔다고 ?"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이놈아 ! 뭐가 또 있다는 말이냐? 지체 말고 어서 말해라 ! "
英布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飛馬가 몸을 떨며 다시 이뢴다. "적장 曺參이 長沙를 기습하여 우리의 糧道를 차단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싸우고 싶어도 軍糧이 없어 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영포는 너무도 놀라운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 졌다. 가족은 납치를 당하고, 本陣은 빼앗겨 버리고, 軍糧米를 운송하는 수송로까지 차단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싸울 수가 있단 말인가 ?
敵은 그와 같이 엄청난 작전을 비밀리에 수행하느라고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건만, 영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으니, 순간의 판단이 돌이킬 수없는 결과를 가져오고만 것이다.
어쨌든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보니, 이제는 군사들을 전면적으로 철수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英布가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시작하는데, 별안간 저 멀리 숲속에서 번쾌가 군사들을 몰고 질풍같이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번쾌는, "英布는 듣거라. 그대는 지금이라도 무조건 항복하여, 폐하께 용서를 빌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이 남아 나지 못할 것이다 ! " 하고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
영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가족까지 모두 납치된 이 판국에 항복이란 있을 수 없다.) 죽음을 각오한 영포는 장검을 뽑아들고 번쾌에게 덤벼들었다. 두 장수가 불을 뿜는 혈전을 거듭하기를 50 여 합, 싸움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 漢나라 군사들은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영포는 勢 不利를 느끼고 마침내 1백 여 騎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江을 건너 吳나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吳나라 城主 吳芮(오예)와는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吳芮는 사냥을 나가고 城內에 없었다. 오예의 조카 吳成이 영포를 사랑방으로 안내하며 묻는다. "대왕께서는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어인 일로 왕림하셨습니까 ?"
영포는 유방과 싸우다가 쫒겨 오게 된 사유를 솔직하게 말해 주고 난 뒤, "나는 당분간 이곳에 피신해 있다가, 자네 叔父와 힘을 합하여 유방을 쳐부수기로 할 테니, 자네는 그리 알고 있게." 하고 말했다.
吳成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逆賊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우리 일가족도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될 게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英布를 죽여 그의 수급을 유방에게 갖다 바치면 우리 가문에는 커다란 혜택이 오게 될 게 아닌가...?)
吳成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叔父가 돌아오기 전에 영포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酒안상을 차려오게 한다음, 英布에게 연신 술을 권하며, "숙부님은 내일이나 돌아오시게 될 것이오니, 오늘 밤은 藥酒나 드시고 피곤하신 몸을 편히 쉬시도록 하소서."
영포는 워낙 斗酒不辭의 酒豪인데 다가, 漢軍과의 전투에서 敗戰으로 마음이 몹시 울적하던 터라, 吳成이 권하는대로 술을 마셨다. 영포는 술이 몹시 취해 오자, 납치되어 간 가족들 생각이 나자 울분을 토한다. "유방 이 놈,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내 가족을 납치해 갔으니, 나도 언젠가는 네놈의 가족을 납치해다가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吳成은 그럴수록 위로의 말로 비위를 맞춰주며 자꾸만 술을 권한다.
이윽고 三更이 되자, 英布는 만취하여 옆으로 눕더니 정신없이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 吳成은 이때다 싶어, 40 여 名의 甲士들을 동원하여 영포의 親衛隊員들부터 모조리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는 房으로 뛰어 들어가 英布의 목을 한칼에 찔러죽이고 만다.
一世를 풍미한던 英布였다. 일찍이 山賊으로 시작하여 楚나라 大將軍을 거쳐 淮南王까지 올랐던 그 였다.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겼고, 그의 勇猛은 項羽와 견줄 만한 천하의 猛將이었다. 그가 한번 호령하면 천군 만마가 두려움에 떨던 천하의 영웅 호걸 영포였다. 그러나 그토록 영웅 호걸이었던 영포가 費赫의 諫言을 듣지않고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가 無名의 吳成이란 者의 손에 어이없게 죽게 될 줄을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
(흡사 三國誌에서 부하 장졸의 조그마한 잘못을 문제삼아 곤장을 친 장비가 술에 곯아 떨어지자 앙심을 품은 그 부하들에 의하여 어처구니없게도 목숨을 잃은 것과 너무도 닮은 꼴이 아닌가!?..)
그러니 사나이 "대장부에게 세가지 끝을 조심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추가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의 술은 독약과도 같고, 가깝지 않은 사람의 호의는 사양해야 옳다고 본다.)
吳成은 英布의 수급을 가지고 漢軍 本陣의 유방에게 달려간다. "본인이 逆賊 英布의 수급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劉邦은 그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영포의 수급을 직접 보고자하는데, 陣平이 諫한다. "英布의 수급은 臣이 검증할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英布의 수급을 직접 보지는 마시옵소서."
유방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왜 朕이 英布의 수급을 보지못하게 하는 것이오 ?" "英布는 워낙 당대의 驍將(효장 : 사납고 날랜 將帥)으로서, 깊은 怨恨을 품고 죽었음으로 그의 수급에는 반드시 毒氣가 서려 있을 것이오라 폐하께서 직접 보시면 神氣를 傷하시기 쉽사옵니다." "朕을 생각해 주는 그 마음은 매우 고마우나 逆賊의 수급을 직접 내눈으로 확인해 보고싶소이다."
劉邦은 끝내 고집을 부리며 英布의 수급을 직접 보고야 마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영포의 수급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유방은 그날부터 사흘 동안 그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다. (劉邦이 拙丈夫란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유방은 吳成의 功勞를 인정하여, 즉석에서 라는 파격적인 官爵을 내려 준다. 그리고 吳成의 叔父인 吳芮를 江夏守로 영전시키고, 자신의 親族인 劉鼻를 吳王에 封하여 江東 일대를 다스리게 하였다.
** 漢高祖 列傳 23
※ 商山四皓 1
(중국 秦始皇 때 亂世를 피하여 陝西省 商山으로 들어간 東園公, 夏黃公, 角里先生, 綺里季 等, 네 사람을 말하는데 모두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세어 이렇게 불린다)
劉邦은 英布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고 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陣平에게 말한다.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처음에는 六國만 평정하면 천하 통일이 저절로 이루워질 줄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육국을 평정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內部에서 계속 반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골치가 아플 지경이구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産母가 아이를 낳으려면 産痛을 겪어야 하듯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어찌 그러한 고통이 없을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고난은 다 지나갔고, 이제야말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폐하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언제 어디서 누가 또다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소 ?" "이제는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사옵니다. 田橫을 비롯하여 韓信, 陣稀, 彭越, 英布 等, 당대의 영웅 호걸들이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가 실패했는데, 이제 누가 무슨 용기로 폐하에게 반기를 들 수 있겠사옵니까? 태평 성대가 이제 눈앞에 전개되었사옵니다."
유방은 陣平의 말을 듣고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명실 상부한 萬承天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한결 여유를 가지고 진평에게, "回軍할 때는 地方巡察을 겸해, 魯나라에 들러 孔子의 사당에 들러 제사도 지내고, 고향인 풍패에도 잠깐 들러보기로 합시다."
유방은 명실 상부한 천하 통일을 이루고 나니 이제는 백성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싶었고, 또 고향으로 가서 錦衣還鄕의 기쁨도 마음껏 누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유방은 魯나라에 들러 孔子의 제사를 지내고, 공자의 후손들에게도 골고루 官爵을 내려주었다. 그런 후 고향에 돌아오니, 풍패에서는 官民이 모두 몰려 나와 三絃六角에 맞춰 가며 유방을 뜨겁게 환영해 주는 것이었다.
유방은 환영연 석상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고향사람들을 향하여 감격에 겨운 소리로, "이곳은 내 고향으로 여기에는 나의 竹馬故友가 수없이 많소. 이 기쁜 자리에 그들을 모두 불러오도록 하시오 ! " 유방의 명에 따라, 어렸을 때 유방과 함께 뛰놀던 옛 친구들이 모두 연회장으로 왔다. 어떤 친구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너무도 늙어서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친구도 있었다.
유방은 그들로부터 축하의 拜禮를 받을 때마다 손을 잡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君臣之禮가 아닌, 죽마 고우로서 어렸을 때 뛰놀던 이야기나 나누기로 하세. 나도 늙었지만 친구들도 모두 다 늙었네그려." 유방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나오니, 환영연은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윽고 醉興이 도도해지자, 유방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면서 즉흥시를 읊기 시작한다.
大風起兮 雲飛揚 (대풍기혜 운비양) 바람이 크게 일어나 구름이 높이 솟았도다
威加海內兮 歸故鄕 (위가해내혜 귀고향)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노라
安得猛士兮 守四方 (안득맹사혜 수사방) 어떻게 하면 좋은 장수를 많이 얻어 나라를 튼튼히 지킬 것인가?
유방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자, 옛 친구들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윽고 더 없이 흥겹고 즐겁던 연회가 최고조에 이르자, 유방은 좌중을 둘러보며 감격스럽게 말한다. "내 비록 지금은 貴한 몸이 되었다고는 하나,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와 그대들과 같이 고향 땅에 묻히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고향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租稅를 면제해 주기로 하겠소." (이 때는 차별금지법이 없었겠지만 지 고향에만 특별대우를 하다니!..과연 유방스럽다^^..)
이 말에 좌중에는 박수소리가 떠들썩하게 울려 나갔다.
고향에서 즐거운 사흘을 보내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오니, 呂后를 비롯하여 太子 劉盈(유영)과 戚妃 소생의 如意 公子를 비롯한, 문무 백관들이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 싸움이 없어지니, 세상은 화평한데...
세상이 화평함에 따라, 유방은 늙은 呂后보다는 젊고 아름다운 戚妃를 자주 찾게된다. 呂后는 워낙 성품이 매섭고, 질투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유방이 戚妃를 찾아가는 밤이면 이를 갈며, "내 어떻게해서든지 네년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야 말리라 ! " 하고 무서운 毒氣를 품었다.
戚妃도 呂后의 그러한 질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戚妃는 눈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호소한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이미 춘추도 있으신데다가 근자에는 건강도 무척 약해지셨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날이면 저희 두 母子는 그날로 呂后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아끼는 여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東書古今을 막론하고 사나이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방은 戚妃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아무런 걱정을 마라." "폐하께서는 저희 母子에게 어떻게 해 주시겠다고 아무 걱정을 말라는 말씀이시옵니까 ?" "네가 바라는 대로 지금의 태자를 廢位시키고, 如意를 태자로 책봉해 주면 될 게 아니냐!? 그 일에 대해서는 걱정 말고 어서 술이나 가져 오너라."
戚妃는 기뻐하며 술상을 올린다. 酒色을 누구보다도 밝히는 유방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유방인들 세월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유방은 술이 기분좋게 醉해 오자, 戚妃의 무릎을 베고 옆으로 눕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한다. 그간 싸이고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인지,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戚妃는 유방이 잠에서 깨어날까 저어하여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本宮에 있는 呂后는 는 보고를 듣고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염탐해 보니, "폐하께서는 지금 西宮에서 戚妃와 단 둘이 정답게 술을 드시고 계시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
그 말을 들은 呂后는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룰수 없어 가마를 타고 書宮으로 직접 쳐들어? 갔다. 西宮 守門將은 크게 놀라 안으로 달려 들어가 척妃에게 알린다. "지금 문 밖에 황후마마께서 와 계시옵니다."
戚妃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후가 오셨다면 그녀는 응당 영접을 나가야 만 할 일이다. 그러나 황제가 지금 자신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으니, 영접을 나가려고 황제의 잠을 깨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戚妃는 부득이 방안에 눌러 앉은 채로, "皇后께서 납셨거든 방안으로 모시도록 하라." 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呂后는 황제가 戚妃의 무릎을 베고 행복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하여 戚妃를 노려보며, "너는 내가 방안에 들어왔는데도 일어설 줄도 모르니, 세상에 이런 무례한 X이 어디 있느냐 ! "
戚妃는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황제가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어찌할 수가 없었다. "황후마마께서 오신 줄은 알고 있었사오나, 폐하께서 잠에서 깨실까 두려워 몸소 영접을 나가지 못한 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呂后는 戚妃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잠을 깨워 震怒를 사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두려워 女后는 이를 바드득 갈며, "네년은 황제 폐하를 핑게로 사사건건 발뺌을 하고 있으니,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는 네년의 五腸 六腑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야 말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유방은 그때까지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戚妃는 너무도 무서운 악담에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어찌 잘못하여 龍顔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황제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戚妃가 울고 있는게 아닌가 ?
유방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 "너, 무슨 일로 울었느냐 ?" 戚妃는 눈물을 닦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告한 뒤, "신첩의 실수로 용안에 눈물을 떨어뜨렸음을 용서하시옵소서. 폐하께서 안 계시는 날에면, 신첩은 황후의 손에 죽게될 것이오니,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하며 다시 울면서 호소하는데, 그 자태가 어찌나 애처롭게 보이는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들국화처럼 아름답고 처연하기 그지 없었다.
유방은 척妃가 가련하기 짝이 없는지라, 등허리를 정답게 쓸어주며 위로한다. "내일 아침 朝會에서 重臣들과 상의하여 너를 皇后로 바꾸고, 如意를 太子로 책봉할 것이니, 아무 걱정 말거라.네가 皇后가 되면 어느 누가 감히 너에게 손을 댈 수 있겠느냐?."
다음날 조회 때, 유방은 군신들에게, "前에 한 번 거론한 바가 있듯이 太子를 如意로 바꾸기로 마음먹었으니, 卿들은 오늘 이 일의 결말을 지어 주기 바라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 卿들은 朕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의결해 주기 바라오."
유방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아예 조회에서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중신들 間에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런 소식은 곧 呂 后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呂后는 크게 놀라며, 친정 오빠인 呂澤을 궁중으로 급히 불러들여 호소한다.
"황제가 戚妃 년에게 미쳐 太子를 폐위시키고 그년의 몸에서 태어난 여의를 태자로 책封하려고 한다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呂澤이 대답한다. "제가 워낙 지혜가 부족하여, 이런 중대한 일을 올바르게 처리할 자신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張良 선생은 지혜가 많으신 어른이시니, 비밀리에 그 어른을 찾아 뵙고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그 어른이시라면 우리에게 좋은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옵니다."
呂后가 고개를 끄덕이며, "張良 선생이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소? 그러나 그 어른은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묻혀서 修道나 하고 계시니, 이런 일에 관여하려고 하시겠소 ?"
여택이 다시 품한다. "張良 선생은 세상을 등진 어른이니까, 좀처럼 관여하지 않으시려고 할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張良 선생에게 이라는 아들이 있사온데, 벽강과 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하니 제가 벽강을 내세워, 張良 선생에게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呂皇后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그렇다면 벽강을 데리고 가서 張良 선생을 꼭 만나 보도록 하오."
** 漢高祖 列傳 24
※ 商山四皓 2
呂澤은 친구인 張良의 아들 벽강과 같이 감으로써 張良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張良은 太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한다는 말은, "나는 이미 세상과 담을 쌓은지가 오래 된 사람이라, 世上事에 對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네." 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
呂澤은 초조해지자 떼를 쓰듯, "저는 呂 皇后의 特命을 받고 선생을 찾아온 몸이옵니다. 만약 선생께서 아무 런 말씀도 해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죽어도 이 자리를 뜨지 않겠습니다."
張良은 그래도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皇帝께서는 평소에 '商山四皓'를 무척 흠모하셨으니, 그분들을 찾아가 보면 무슨 방도가 있기는 할 것이네만."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
呂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선생님 ! '商山 四皓'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 張良은, "여기서 북서쪽으로 3 백 리쯤 들어가면 '商山'이라는 山이 있네. 그 산속에는 賢人 네 분이 살고 계시는데, 그들은 靈芝버섯만 따먹고 살아가는 神仙 들이라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商山 四皓 라고 부르지. 漢帝께서는 일찍이 그들을 흠모하신 나머지, 禮遇를 다해 모셔 오려고 하셨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만 만약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太子 문제는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그 분들을 찾아가 보시게. 허나 그 분들이 움직여 줄지, 그것은 자네가 그들을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네."
"선생님 ! 고맙습니다. 그런데 로 불리는 네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옵니까 ? " 張良은 말하는 대신 네 명의 이름을 붓으로 쓰기 시작한다.
張良은 붓으로 쓴 종이를 呂澤에게 주면서, "자네는 이 종이를 가지고 呂 皇后에게 돌아가, 이 네분들에게 정중한 使臣을 보내도록 하시게. 이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太子는 오랫동안 福을 누릴 수 있을 것이네."
呂澤이 급히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하자 呂 皇后는 크게 기뻐하며, 李恭에게 비단 4 千 필과 黃金 4 千 냥, 名馬 4 필을 선물로 내놓으면서 商山으로 賢人들을 찾아뵙도록 한다. 商山은 험준한 산이었다.
李恭은 험준한 산을 아무리 찾아도 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10 여 일을 헤매다가 우연히 靈芝버섯을 따고 있는 네 명의 백발 노인들을 어느 숲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옷이 허름하고, 머리는 헝클어진 것으로 보아, 그들이 가 분명해 보이자, 李公은 그들에게 무조건 큰절을 올리며, "네 분 도사님을 이렇게 만나 뵈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小生은 劉盈 皇太子의 분부를 받들고 네 분 도사님을 찾아뵙고자 온 몸이옵니다."
는 일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皇太子의 使臣 되는 분이 우리 같은 棄世人 : 기세인 - 세상을 등진 사람)을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 하고 묻는다.
李恭은, "皇太子께서는 일찍부터 네 분 도사님을 진심으로 사모하여, 장차 보위에 오르시면 네 분 도사님의 지도를 받아 태평 성대를 이루고자, 도사님 들을 꼭 모셔 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하여 小生이 도사님들을 모시러 왔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도사님들께서는 億兆蒼生의 무사 태평과 國泰民安을 위해 부디 下山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商山 四皓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太子의 뜻은 매우 갸륵하시오. 그러나 우리 네 사람은 세상을 등진 지 이미 오래 된 사람들이오. 황태자께서 장차 보위에 오르셔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가 무슨 보필을 할 수 있겠소!? 황태자께서 우리를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오. 貴公은 섭섭하시겠지만 돌아가서, 황태자께 우리의 말을 그렇게 傳하도록 하시오."
李恭은 氣가 막혔다. 그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사명을 띠고 천신 만고 끝에 찾아온 李恭은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李恭은, 에게 다시 한 번 큰 절을 올리며 통사정한다.
"실상인즉, 소생은 황태자께서 네 분 어르신께 드리는 禮物로 비단과 黃金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리고 네 분 도사님께서 長安으로 오실 때 타고 오시라고 말도 네 필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런데 네 분께서 황태자의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시면, 소생이 어찌 혼자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
는 황태자가 예물을 보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저으기 놀란다. "허어... 황태자께서 우리에게 禮物을 보내셨다고 ?... 허나 산속에 묻혀 사는 우리는 비단과 황금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소. 우리는 재물에 현혹되는 속물은 아니란 말씀이오."
李公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러나, "네 분 어르신께서는 太子가 보내드린 禮物을 어찌 로 보시옵니까? 존경하는 어른을 찾아 뵐 때는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한 예의가 아니옵니까? 황태자가 네 분 어르신을 모시고 싶어하시는 것은 오직 나라를 爲하는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이런 기회를 네 분 어르신께서 거절하신다면, 네 분 어르신께서는 억조 창생이 잘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 저로서는 황태자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시는 어르신 들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처럼 李恭이 大義에 입각해 설득해오자, 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貴公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너무 고집을 부린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太子가 우리를 그처럼 만나고 싶어하신다니, 내려가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는 李公과 함께 下山하게된다. 呂 皇后는 그 소식을 듣고, 太子와 함께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를 극진히 맞아들이며 간곡히 부탁한다. "황태자는 장차 이 나라를 통치하여 만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분이오니, 네 분 어르신 들께서는 황태자가 영명한 君主가 될 수 있도록 統治學을 철저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에, 는 기뻐하며 황태자에게 統治學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한편, 유방은 呂 皇后가 그와 같은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 날 叔孫通과 周昌 두 大夫를 불러 묻는다. " 며칠 전, 卿들에게 문제로 특별 지시를 내린 바 있었는데 그 後, 重臣 회의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결의하였는지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이오 ?" 유방은 태자 劉盈을 廢位시키고 戚妃 태생인 如意를 태자로 책봉할 마음이 변치않고 있었던 것이다.
叔孫通과 周昌은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 ! 劉盈 태자는 매우 영명하신 분이므로, 그를 폐위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옛날 晉나라의 獻王은 驪姬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의 소생인 奚齊(혜제)를 태자로 바꾸었다가, 40 년 동안이나 나라를 어지럽힌 일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秦始皇도 간신 趙高의 말을 듣고, 태자를 扶蘇에서 胡亥로 바꾸었다가 나라가 亡해 버리지 않았사옵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의 황태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영명하시옵니다. 폐하께서 만약 嫡子를 폐위 하시고 庶子인 如意 公子를 태자로 바꾸신다면, 저희들은 太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겠사옵니다."
중신들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니, 유방은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나 重臣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태자를 무리하게 바꿔칠 수는 없었다. 유방은 어쩔 수없이 불쾌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長信宮에 가려는데 太子 劉盈이 文德殿에서 나오는데, 태자의 뒤로 네 명의 노인들이 따라 오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저 老人 들은 누구인가 ?" 하고 물었더니, 네 명의 노인들이 다가와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저희들은 商山에서 내려온 '四皓'라 하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
유방은 라는 말에 크게 놀라며, "아니, 당신들이 라면, 내가 불렀을 때는 그토록 오지 않았던 분 들이 지금은 어떤 연유로 太子를 모시고 다니시오 ?"
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陛下께서는 傲慢하기 짝이 없어 賢士들을 가볍게 여겼기로 우리들은 불러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태자는 仁孝恭敬한데다 賢士를 소중히 여길 줄 아시니 장차 寶位를 이어 받으시면 國泰民安을 위해 힘쓰셔야 하겠기에 우리들은 태자를 도와 統治學과 聖學을 講論하고자 山에서 내려온 것이옵니다. 장차 太子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그때는 堯舜時代와 같은 태평 성대가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자, 太子를 바꿀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들이 劉盈을 聖君으로 인정한다면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 그처럼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長信宮으로 戚妃를 찾아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니, 戚妃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렇다면 우리 母子는 언젠가는 皇后의 손에 죽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유방은 몸을 감싸 며 위로한다.
"如意가 비록 太子는 못 되더라도, 큰 나라의 王으로 封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 하지마라." "저희 母子는 오직 폐하의 은총만을 믿사옵니다." 戚妃는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장차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에 공포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 列國誌 193
** 漢高祖 列傳 25
※ 戚妃의 아들 如意, 趙王으로 가는데..
戚妃는 如意의 太子 책봉이 실패로 돌아가자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劉邦이 죽고 나면 자신과 아들 如意 公子는는 呂后의 손에 죽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戚妃의 그러한 불안한 마음을 유방이 모를 리 없었다.
유방은 속으로 그에 대한 대책에 부심한 끝에 어느 날 戚妃에게, "예전에 내가邯鄲 (한단)에 주둔했던 일이 있었는데, 邯鄲은 경치도 좋거니와 사람들의 인심도 순박한 곳이오. 더욱이 邯鄲은 長安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서 如意를 趙王으로 封해 邯鄲 으로 보내면 좋을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고 ? 趙王으로 가 있으면 부귀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려니와, 呂后의 그늘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으니 좋지 않겠나 ?"
戚妃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폐하께옵서 如意를 趙王으로 보내 주신다면 그처럼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如意가 아직 나이가 어려 나라를 제대로 다스려 나갈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그런 일이라면 조금도 걱정 마라. 政事를 잘 살펴 줄 지혜로운 補弼者를 특별히 선발하여 보내면 그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유방은 조회에서 重臣들에게, "朕은 卿들의 의견에 따라 太子를 바꾸지 않기로 했소. 그 대신 如意를 趙王에 封하여 邯鄲으로 보낼까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
重臣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께서 如意 公子를 趙王에 封하신다는데 무슨 異論이 있겠사옵니까 ?"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如意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왕으로 보내려면 훌륭한 보필자를 한 사람을 같이 보내야만 하겠는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
그러자 丞相 簫何가 대답한다. "大夫 周昌을 보내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周昌 대부는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賢士이므로, 그 보다 더 좋은 보필자는 없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승상께서 말씀하신대로, 周昌 大夫를 함께 보낸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그 자리에 同參해 있던 周昌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수고스럽지만, 卿이 如意와 함께 邯鄲으로 부임해 주기를 바라오." 그러자 주창이 머리를 조아리며, "臣이 영광스러운 皇命을 받들겠사오나, 경솔하게 嘉納(가납)하기는 매우 어렵사옵니다."
유방이 의아하여 묻는다. "가납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 周昌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외람된 말씀이오나, 臣이 보필자로서의 重責을 맡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온데, 폐하께서 그러한 조건을 미리 응낙해 주시면 감사하겠사옵니다."
유방이 미소를 지으며, "세 가지의 조건이란 어떤 것인지 말씀을 들어 보고 가능하면 응낙 해 주리다." 이에 周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趙王은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成年이 되기까지는 보필자인 자신의 말을 반드시 들어줄 것. 둘째, 趙王은 일단 임지로 부임해 간 뒤로는 親母인 戚妃와도 書信往來까지도 일체 단절할 것. 셋째, 자신이 보필자로 부임해 가면 그쪽 일에 몰두해야하니, 朝廷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불러 올리지 않도록할 것.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을 폐하께서 응낙해 주시되 말씀만으로 응낙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親筆文書로써 응낙해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즉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시지 마오. 그러면 如意를 이 자리에 불러놓고 문서를 작성해 주리다."
유방은 如意를 御殿에 불러놓은 後, 周昌에게 親筆文書를 작성해 주며, "이제는 사전 준비가 다 되었으니, 如意는 오늘부터 바로 趙王으로 부임할 준비를 하도록 하라." 하고 명했다.
그리하여 수 일 동안 부임 준비가 끝나고, 열두 살짜리 趙王 如意가 宮中으로 들어와 戚妃에게 작별 인사를 告한다. 戚妃는 아들을 끌어 안고 흐느껴 울면서, "네가 조왕으로 떠나가면 우리 母子는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하고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윽고, 如意가 수행원을 이끌고 周昌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자, 유방은 戚妃와 함께 城門 밖까지 전송을 나와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 周昌은 그 광경을 보고 유방에게 따끔하게 諫한다.
"폐하 ! 폐하는 만인의 어버이이시옵니다. 四海 蒼生 모두가 폐하의 赤子가 아닌 사람이 없사온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趙王 한 사람만을 偏愛하시어, 이처럼 눈물을 흘리시옵니까 ? 눈물을 거두시고 속히 환궁하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물을 거두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문득 백성 하나가 달려 오더니 땅에 엎드리며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 "폐하전에 긴히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어서 말해 보라." "폐하 ! 簫何 승상은, 폐하 다음으로 이 나라의 최고 어른이시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이 上林苑 : (상림원 ~ 國有地)의 空地를 백성들에게 개간토록 하여 자신이 농사를 지어 이익을 取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많은 뇌물을 받아 한없이 재물을 쌓아가고 있으니, 丞相이라는 사람이 이래서야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옵니까?"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
유방은 너무도 놀라운 고발에 아연 실색한다. 또한 簫何가 不義를 저질렀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고발자에게 큰소리로 꾸짖는다. "너는 무슨 曲解心情으로 승상을 함부로 誣告하느냐, 소하 승상은 백성을 동원해 私利를 도모하거나, 아랫사람 들로부터 뇌물을 取할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고발자가 오히려 더 큰소리로, "폐하께서는 정당한 고발을 어찌하여 무고라고 말씀하시옵니까 ? 만약 소인의 말이 믿기지 않으시오면, 上林苑에 직접 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上林苑의 空地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기까지 수 천 명의 백성들이 고된 賦役을 했사옵니다." "알았다. 그러면 내가 上林苑을 직접 가 보아 사실 여부를 확인토록 하겠다."
유방은 대궐로 향하던 행차를 돌려, 직접 上林苑으로 갔다. 그랬더니 과연 수 만 평에 달하는 상림원 공지가 송두리째 개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곡식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 (名 宰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던 簫何가 이럴 수가 있을까....? )
분노가 극에 달한 유방은 대궐로 돌아오자 司勘部 廷尉(사감부 정위 : 오늘날로 치면 검찰과 감사원의 고위 간부)를 불러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丞相 簫何를 당장 체포하여 下獄시키도록 하라"
# 列國誌 194
** 漢高祖列傳 26
※ 政治판을 떠나 張家界로 들어가는 張良
丞相 簫何는 영문도 모른채 獄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자 典獄 왕위가 달려와 유방에게, "소하 승상을 무슨 罪로 하옥시키라 명하셨사옵니까 ?" 유방이 대답한다. "소하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國有地 上林苑의 空地를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私利를 도모하였다. 아무리 승상이라도 그런 자를 어찌 그냥 둘 수 있느냐 ?"
왕위는 천만부당 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어떤 者가 그런 고자질을 했는지 모르오나, 소하 승상이 공지를 개간하여 私利를 取하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옵니다. 실상은, 폐하께서 陣稀와 英布의 반란을 평정하시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親征하셨을 때, 소하 승상은 군량 공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국유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여 병참지원에 치질이 생기지 않토록 하였던 것이옵니다.
上林苑의 空地도 그때 개간하여 곡식을 심은 것이옵니다. 소하 승상께서는 거기서 나온 곡식을 한 톨도 私有한 일이 없사옵니다. 국가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空地를 개간하여 군량미를 조달코자한 승상에게 賞은 내리시지 못할망정 그것을 罪로 몰아 처벌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크게 잘못된 일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자 경솔한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소인배의 말을 듣고 승상을 의심한 것은 朕이 너무나도 불민한 탓이오. 승상을 직접 찾아가 사과할 것이니, 朕을 獄으로 안내하라."
황제가 親히 감옥에 간다는것은 법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승상을 前後를 살피지 않고 하옥시킨 죄책감에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사과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방은 소하를 직접 석방시키면서,
"내가 워낙 불민하여, 승상을 일시나마 의심하여 하옥시킨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오. 卿은 아무런 罪도 없이 下獄당하면서 어찌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셨소이까 ?" 소하가 국궁 배례하며 아뢴다. "皇恩이 망극하옵니다. 臣이 조금만 참고 견디면 폐하께서 반드시 알아 주실 것이온데,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나이까?."
유방은 그 말에 더욱 감격하여 "卿이야말로 진실로 영명한 재상이시오. 卿같은 분을 참소한 소인배가 있으니, 내 그놈을 그냥 둘 수가 없소이다." 그리하여 유방은 丞相을 誣告한 자를 바로 잡아다가 斬首刑에 처해버리도록한다.
한편, 簫何가 아무런 罪도 없이 誣告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張良이었다. 장량은 한숨을 쉬며 탄식한다. (簫何를 투옥 시킨다는 것은 言語道斷이 아닌가 ? 漢帝는 帝位에 오르고 나자 장차 太子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 韓信, 英布, 彭越 같은 功臣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더니, 이제는 簫何까지도 쳐버릴 생각을 갖고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 또한 구실을 만들면 무사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겠는가?... )
張良은 문득 太子 계승 문제에 있어 자신이 뒤에서 remote control 해 왔음을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만약 를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劉邦의 뜻대로 公子가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 막후의 秘事가 지금이라도 드러난다면 張良 자신도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리하야, 張良은 를 찾아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한 後, "나는 아무래도 깊은 山으로 들어가 修道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하고 말하니 商山 四皓들은 즉석에서 찬성하며, "태자 책봉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옵니다만 선생께서 깊은 山으로 들어가신다면 저희들도 선생을 따라 入山하겠습니다." "나를 따라 들어가겠다는 말씀, 고맙기는 하오만 우리가 한꺼번에 모두 떠난다면 漢帝께서 또다른 오해를 하실지 모르니, 그 점도 생각하셔야 하오."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용의 주도하기가 이를 데 없는 張良이었다. 장량의 말에 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나중에 적당한 때를 보아 떠나기로 할 테니 선생은 漢帝를 미리 찾아뵙고 먼저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張良은 작별 인사차 오랜만에 入闕하였다. 張良이 입궐하니 유방이 크게 반가워하며, "선생을 오랜만에 만나뵙게되어 이렇게도 기쁜 일이 없소이다. 그간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
張良은 머리를 조아리며, "臣이 그동안 신병으로 인해 자주 문후 여쭙지 못해 罪悚스럽기 그지 없사옵니다." "身病이라니요 ... ?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십니까 ?" "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제는 臣도 세월만은 어찌할 수 없는지 심신이 모두 쇠약해졌사옵니다. 앞으로는 山水가 좋은 깊은 山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고 싶사오니 폐하께서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낙심되는지, "선생께서 朕의 곁을 떠나시다니요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은 그동안 공로가 너무도 많으셨기에 나는 선생에게 官爵을 드리고자 했었지만, 선생께서 끝까지 사양하시며 官爵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갑자기 朕의 곁을 떠나겠다고 하시니, 혹시 朕에 대하여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신 것은 아니옵니까 ? 만약 朕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소서."
張良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皇恩이 망극하옵니다. 관후 인덕하신 폐하께 臣이 어떤 불만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臣이 官爵을 사양한 것은 다만 臣의 신념 이옵니다. 臣이 깊은 山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오로지 몸이 쇠약해진 때문이오니, 폐하께서는 쾌히 허락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다른 일도 아닌 건강을 위해 山으로 들어가시겠다는데, 어찌 무리하게 붙잡을 수 있사오리까? 그렇다면 선생의 뜻대로 떠나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나 朕 또한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자꾸만 쇠약해져서 우리가 지금 작별을 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그 일을 생각하면 斷腸의 슬픔을 금할 길이 없구려."
이렇게 말하며 유방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유방은 장량과 지금 작별하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그 애기만은 할 수가 없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會者定離, 生者必滅'이라더니, 영원한 것이 없는 게 인생이구나.. 아! 人生無想이로다! ... 유방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이리하여, 張良이 張家界로 들어간 얼마가 지난 후, 들은 유방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이제 천하는 통일되어 四海가 안정되었사옵고, 太子 또한 영명하시기 그지없사와, 이로써 漢나라의 國基는 튼튼하게 다져졌사옵니다. 저희들은 이미 팔순을 넘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오니,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게 해 주시옵소서." 張良과의 약속대로 그들도 장량의 뒤를 따라 商山으로 들어가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를 서글픈 얼굴로 바라보며 만류한다. "張良 선생이 朕의 곁을 떠나신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오. 張良 선생이 떠나셔서 가뜩이나 마음이 서글픈데 선생들조차 왜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하시오 ? 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선생들은 이왕 下山하신 김에 끝까지 太子를 지도하며 보살펴 주소서."
그러나 들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 지금 朝廷에는 수많은 賢臣들이 있어서, 이미 늙은 저희들로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사옵니다. 하오니 현명한 大夫들로 하여금 태자를 보필하게 하시오면 , 태자께서는 다 방면의 지식과 옛 賢人과 統治者들의 경험을 미리 얻으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소생들은 비록 山으로 들어가더라도 그동안 베풀어 주신 皇恩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다고 판단되자 많은 사례를 내려 주며 그들을 보내 주기로 한다. 장량을 비롯하여 까지 떠나 보내고 나니, 유방의 심정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太子 '盈'을 불러놓고 얘기한다.
"나는 홀홀 단신으로 군사를 일으켜, 超 강대국인 秦나라와 楚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드디어 천하를 통일 하였다. 그동안 나를 배반하고 돌아선 자들도 많았지만, 奇謨妙算으로 나를 도와 준 공신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이제 천하를 통일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고 나니, 지난날의 공신들 생각이 새삼스러이 간절하구나. 이제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마음에서 이미 작고한 공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공신들의 肖像畵를 그려, 功臣閣에 모셔 놓고, 후손 들에게 길이 전해 지도록 해야 겠다." 유방은 그 날로 畵工들을 불러 功臣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목수들을 불러 功臣閣을 대규모로 짓게 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공신들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모시게 되자, 유방은 공신들의 초상화를 일일이 돌아보며 그들의 내력과 공적을 태자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 太子는 紀信의 초상화 앞에 이르자, "榮陽城 싸움 때에 만약 紀信 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저를 구출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했고, 또 夏侯嬰의 초상화 앞에서도 발을 멈추고, "만약 夏侯嬰 장군께서 楚나라 彭城에 잡혀있던 저를 구출해 오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저는 태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자 유방은 머리를 끄덕이며 칭찬한다. "네가 근본을 잊지 않고 있으니, 세상에 이렇게 기쁜 일이 없구나."
그러나 공신각에는 楚나라 大司馬였던 項伯의 초상화는 걸려 있지 않았다. 項佰의 아들 項東이 그 사실을 알고, "鴻門宴 연회 때 폐하를 구해 드린 사람은 저의 아버지셨는데, 제 아버님의 초상화는 어찌하여 걸려 있지 아니하옵니까 ?" 하고 항의하니 유방은 즉석에서, "그것은 朕의 실수였노라. 너의 아버지의 초상화를 새로 그려 걸게 하고, 너는 내 사위로 삼으리로다." 하고 말하며 小華公主를 항동에게 주기로 하였다.
- 列國誌 195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
張良의 字는 子房이고 漢나라의 開國功臣이자 불세출의 大 戰略家이다. 張良의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의 安徽省 毫縣 동남 지역의 사람으로 祖父와 親父가 代를 이어 韓나라 소후와 선혜왕의 五代에 걸쳐 宰相을 지낸 것으로 傳해진다. 秦나라가 韓나라를 멸망시킨 後, 韓나라의 國權회복을 도모하며 자객들과 교류를 맺고 博浪沙에서 秦始皇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下邳(하비)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黃石公으로부터 太公兵法 을 얻었다고 한다.
秦나라 末期 농민전쟁 중에 무리를 모아 유방에게 가서 君師가 된다. 楚漢의 전쟁기간 동안,
1. 6 國의 後代를 세우지 말 것,
2. 英布, 彭越과 연합할 것,
3. 韓信을 重用할 것" 등의 원대한 계략을 건의하였으며
4. 남쪽의 項羽와 楚나라를 섬멸할 것을 권고하여 劉邦이 項羽를 꺾고 漢 王組를 건립하는 데 지대한 功을 세웠다. 漢 왕조의 建國 後, 유방은 장량에게 특등공신으로 대우하여 큰 封土와 官爵을 내리고자하였으나 장량은 이를 고사하고 장가계에 들어가 道敎에 심취하여 여생을 마친다.
장량이 어떻게 죽었는지, 死後에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에는 "張良과 黃石公을 함께 합장시켰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지점은 적시하지 않았다. 당대의 蕭德言(소덕언)은 括地志(괄지지)에서 "張良의 무덤은 徐州 沛縣 동쪽 65 里에 있고, 留城과 가깝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황석총을 張良의 묘로 착각한 것으로, '史記'와 '前漢書'만 대조해 보아도 그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一說에는 張良이 長安 인근의 終南山으로 들어갔다는 說도 있으나 劉邦과 呂太后를 알게되자 그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首都인 長安(함양~ 지금의 西安) 과 가까운 終南山으로 들어갔다는 說은 상식적으로 맞지않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漢高祖 列傳 27
** 呂 皇后와 戚妃의 갈등
呂后는 이팔 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무명 청년, 劉邦과 결혼하여 한평생을 유방과 함께 생사 고락을 같이해 왔다. 유방이 천하를 도모 하려는 야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흙먼지 휘날리는 戰線에서 東奔 西走하기 장장 30 여 년! 그동안 呂后는 젊은 나이로 얼마나 많은 고독과 함께 근심, 걱정, 불안의 날 들을 보내야 했던가 ?
그러나 본래 성품이 강인한 呂后는 남편이 꿈을 이루는 데 아낌없이 협력해 온 것은 물론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 內助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었다. 天下만 통일하고 나면, 呂后는 천하의 國母로서 유방과 더불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뒤로, 남편 유방은 呂 后에게는 오직 라는 허울 좋은 명예 하나만 걸쳐주었을 뿐, 단 하룻밤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천하가 통일된 뒤로는 유방은 더 많은 女色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는게 아닌가 ? 게다가 이제는 呂 后 자신도 너무 늙어 거들떠보지도 않음은 물론, 수수 大戰에서 참패하고 도망치다 만난 하룻밤 인연으로 젊고 아름다운 戚妃를 당당히 西宮에 들여 앉혀 놓고, 밤낮으로 애정을 쏟아 오고 있으니, 呂后는 자신으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간 戚妃에게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오냐 ! 이년, 두고 보자. 내 이 怨恨을 언젠가는 네년에게 반드시 갚아주고야 말 것이다 ! )
이렇게 毒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위세에 눌려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밤마다 獨守空房을 지키며 타 오르는 情炎을 억제하며 살아오다보니 戚妃에 대한 복수심은 날이 갈 수록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만 끝나지 않았다. 呂后는 자신의 아들인 盈(영)이 이미 太子로 책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戚妃는 이불 속에서 남편을 구워삶아 자신의 아들 를 太子로 바꿔 치우려는 책동까지 벌이지 않았는가 ?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如意가 자신의 아들인 을 밀어내고, 태자로 책봉된다면 呂后는 까지 戚妃에게 빼앗겨 버리는 신세로 전락해버리지 않았을 것인가 ?
천만 다행으로 太子를 바꾸는 문제는 朝廷 大臣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張良 선생의 도움으로 원만하게 해결되기는 하였으나,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과 잡음은 모두가 戚妃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呂后는 戚妃를 不俱戴天의 원수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戚妃가 남편을 빼앗아 간 것만도 가슴을 칠 노릇인데, 이제는 皇后의 자리까지 빼앗으려고 유방을 꼬드겼으니, 呂 후가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있는 것은 여자로서는 있을 수 있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시앗 싸움이다. 일반 世人들 間에서도 는 말이 있는데, 유방은 천하를 한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 그렇다면 누가 장차 이를 물려받을 것인가 ?
유방은 오랫동안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아온 관계로, 시앗 싸움의 심각성을 몸소 겪어 왔었다. 그러면서 呂后와 戚妃는 共存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太子를 불러 놓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하도록 간곡한 유언까지 남겼던 것이었다.
(유방은 화살 독의 여파로 죽게되는데 자신의 종말을 느꼈는지 치로차 불려온 名醫에게 치료를 중단케 하고 황금을 내려주어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앗 들의 싸움이란 유언 하나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방이 죽었을 때 呂皇后는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지금으로 치면 80세쯤?) 게다가 남편이 죽고 자신의 아들인 太子가 帝位에 오르자, 그녀는 太后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60이 다 된 일국의 太后라면 누가 보아도 점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앗의 싸움에는 감정도 나이도 체면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대뜸 떠오른 생각은, 戚妃년을 그토록 알뜰살뜰 감싸 주던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야 말로 그년과 그년의 자식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때가 되었구나. 이 년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희 母子를 죽여 없애리라... 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여 태후의 가슴속에는 척씨 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이 이토록이나 사무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숨을 거두기가 무섭게 여 태후는 조커뻘 되는 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皇上께서 돌아가셨으니까, 戚女가 아들에게로 도망을 갈지 모른다. 너는 지금 西宮으로 官憲들을 데리고 달려가 그년을 당장 영항(永巷: 궁녀들의 감옥)에 가두고 엄하게 감시토록 하여라."
여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 가신 폐하께서 그토록 총애하시던 마마>를 무슨 일로 영항에 감금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까 ?" 그러자 呂 太后는 크게 화를 내며,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년을, 너는 어째서 라는 존칭으로 부르느냐 ?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달려가 그년을 하옥시키란 말이다. 만약 나의 명령에 차질이 있게되면 너 도 무사치 못하리라
** 漢高祖 列傳 28
※ 五月飛霜 -- 呂太后의 음모
서릿발 같은 무서운 명령이었다. 太后의 명령이고 보니 조카뻘 되는 呂수도 더이상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呂수는 생각이 깊었다. 아무런 罪目도 없이 는 太后의 명령이 너무나 무모하게 여겨져서 呂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마마의 분부대로 그분을 下獄은 시키겠습니다만 그분을 投獄하면 매우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 것 같사오니, 그 점을 생각해 보시옵소서."
"그년을 投獄다고 무슨 복잡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냐 ?" 呂수가 예측한 대로, 太后는 앞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하였다.
呂수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분에게는 라는 아드님이 있지않사옵니까? 지금 으로 있는 그 아드님이 자신의 母親이 뚜렸핫 罪名도 없이 投獄된 것을 알면 결코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趙王 은 아직 나이가 어려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사오나, 그의 곁에는 先帝의 特命으로 周昌이라는 名 謀士가 있사옵니다. 만약 周昌이 趙王의 母親을 구출하기 위하여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 온다면, 그때는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
呂太后는 미쳐 생각하지 못 했던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지금 나라가 喪中에 있는데, 周昌이 戚妃를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몰아 온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戚妃를 그대로 두었다가 도망이라도 치는 날에는 복수는 영영 하지 못하게 될 게 아니겠는가 ?
呂太后는 입술을 깨물며 한동안 심사 숙고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단호하게 말한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우선 그년을 下獄시켜라. 그런 後에 如意를 좋은 말로 꾀어다가, 그놈까지 죽여 없애 면 될것이 아니겠느냐?"
무서운 복수심이었다. 그러자 呂수는, "그렇게 하실 바에는 그 분을 獄에 가두어 나쁜 소문이 퍼지게 할 게 아니라, 아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후는 머리를 저으며, "그건 안 될 말이다. 나는 그년 때문에 십 수년을 애간장을 태워 왔다. 그년을 죽이기는 죽이되, 한 번에 죽이지 않고, 두고두고 애를 태우다가 몇 년 후에나 죽일 생각이다. 그래야만 내 恨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
惡毒하기 그지 없는 말이었다. "여자가 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太后의 말에는 이처럼 무서운 毒氣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太后는 戚妃를 投獄시키고 나자, 이제는 趙王 如意를 죽여 없앨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유방의 사망 사실을 공표하고 동시에, 新帝의 이름으로 가짜 詔書를 만들어 宦官(환관) 楊雲을 使臣으로 趙王에게 보내는데 조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趙王 如意의 나이는 이제 13살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 어린 소년 상태에 있었기에,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기에 如意는 詔書를 받아 보고 눈물을 흘리며 宰相 周昌을 불러 상의한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病을 얻으셔서 위중하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하여 나는 속히 長安으로 가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周昌은 문제의 詔書를 면밀히 살펴 보고 나서, "이 詔書는 가짜이오니, 大王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마소서. 先帝께서 昇遐(승하)하신 것은 사실이오나. 大王의 母親이신 戚妃께서 病中이란 것은 근거 없는 거짓 이옵니다." 如意는 놀라며,
"이 詔書가 가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어머님이 病中이 아니라면 新帝인 형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조서를 보내셨겠습니까 ?" 周昌이 다시, "新帝께서 대왕 앞으로 조서를 보내신다면 반드시 親筆로 쓰신 詔書를 보내셨을 것인데, 이 詔書는 新帝의 筆跡이 아니옵니다. 필적이 다른 것을 어찌 진짜 조서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거짓 詔書를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 周昌은 잠시 망서리다, 분명하게 답한다. "皇室의 內粉之事라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呂 太后께서는 옛날부터 대왕을 殺害하려는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長安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런데, 先帝께서 돌아가시자, 大王 母親의 거짓 臥病을 핑계로 대왕을 長安으로 불러서 살해하고자 거짓 詔書를 만들어 보낸 것이 틀림 없사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如意는 그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卿은 이 詔書를 가짜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믿고 上京하지 않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그런 不孝가 어디있겠습니까 ?" 周昌은 머리를 저으며, "이 詔書는 분명한 가짜 조서이옵니다. 그것만은 臣이 목숨을 걸고 斷言할 수 있사옵니다."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십니까 ?" "筆跡도 新帝의 筆跡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詔書에 찍힌 玉璽(옥새)도 皇帝께서 쓰시는 信印이 아니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詔書를 보내실 때는 반드시 신임하는 重臣을 使臣으로 보내는 법이온데, 이 조서를 가지고 온 楊雲이라는 者는 呂 太后의 측근인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자 이옵니다.
그러하온바, 이런 가짜 詔書를 믿고 上京하셨다가는, 대왕께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음 ...정말로 그럴까요 ?" "그렇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臣이 楊雲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 보낼 터이오니, 대왕께서는 臣을 믿어 주시옵소서."
周昌은 어린 趙王을 가까스로 달래 놓고, 이번에는 楊雲을 만나, "皇帝께서 내리신 詔書는 잘 받아 보았소이다. 대왕은 生母께서 위중하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자식된 도리로서 당장 問病을 가셔야 옳을 것이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왕께서도 지금 신병으로 자리에 누워계시기 때문에 도저히 문병을 가실 형편이 못 되는구려. 貴公은 그리 알고 오늘은 돌아가셔서 이곳 사정을 사실대로 여쭤 주시오."
周昌은 楊雲을 돌려 보낸 뒤, 趙王을 찾아와 아뢴다. "楊雲이라는 者는 좋은 말로 설득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시오면 그 者가 헛물을 켜고 돌아갔음으로, 呂 太后는 조만간 다른 사신을 또 보내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사신을 아무리 보내 와도, 대왕께서는 저들의 함정에 결코 말려들지 마셔야 하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卿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趙王 如意는 우선 당면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한편, 呂太后는 楊雲이 빈 손으로 돌아오자 크게 분노하며 楊雲에게 묻는다. "詔書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稱病하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如意가 病때문에 못 오겠다고 했다면, 네가 보기에도 그게 사실로 보이더냐 ?" "趙王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周昌을 통해 말만 들었을 뿐이옵니다. 짐작컨데 趙王은 병이 든 것은 아니오나, 周昌이 앞을 막고 못 오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呂 太后는 더 한층 분노를 금치 못하며, "저런 죽일 놈이 있나 ? 周昌이란 者가 중간에서 그런 농간을 부린다면, 이제는 그놈부터 없애버려야 하겠구나 ! " 한번 결심하면 포기할 줄을 모르는 것이 呂 太后의 성품이었다.
** 漢高祖 列傳 29
※ 五月飛霜 ~ 呂太后의 음모 2
呂태후는 즉석에서 同壻(동서 : 유방은 일찍이 번쾌에게 妻弟을 주도록 하였음. 그러나 한 때는 번쾌도 逆心을 의심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인 번쾌의 아들 樊亢(번항)을 불러 嚴命을 내린다. "그대는 精兵 5백 명을 이끌고, 邯鄲(한단)으로 달려가 周昌을 잡아오도록 하라. 만약 그자가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려 한다면 목을 잘라 와도 무방하다."
樊亢은 命을 받고, 곧 邯鄲으로 떠났다. 周昌은 첩자들을 통하여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웃으며, "대왕을 보내라면 못 보내겠지만, 나야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느냐? 나는 언제든지 소환에 應할 준비가 되어 있다."
周昌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으나 趙王 如意는 크게 걱정하며 만류한다. "呂 太后가 군사를 보내 卿을 부른다니,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함부로 가셨다가 무슨 變을 당하실지 모르니, 卿은 가셔서는 아니됩니다."
그 말을 듣고 周昌이 趙王에게, "臣은 결코 太后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이오니, 臣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마시옵소서. 다만 臣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있사온데, 그것은 臣이 없는 동안 누가 대왕을 보필해 드릴까 하는 것이옵니다."
如意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나는 여기에 편히 있는데, 무슨 그런 걱정까지 다 하십니까 ?" 그러나 周昌은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이번 일을 그 前처럼 안일하게 생각하셨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臣이 이곳을 떠나게 되면, 太后는 대왕을 長安으로 불러 올리고자 또다시 사신을 보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長安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그 점만은 거듭 명심해 주소서." "알겠습니다. 卿은 빨리 돌아오셔서, 나를 끝까지 도와주세요."
周昌은 趙王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우 周宣을 불러 부탁 한다. "나는 樊亢이 오는 대로 그와 함께 長安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邯鄲을 떠나기 전에.황제께 올릴 비밀 表文을 써 줄 테니, 너는 나보다 長安으로 먼저 들어가 表文을 皇帝께 올리도록 하거라. 그래야만 趙王의 일이 잘 될 것이다."
이리하여 周昌이 惠帝에게 올릴 表文을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하 중략하고) 先帝께서는 太后가 如意 公子를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던지라, 그러한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하시고 자 如意 公子를 먼 趙나라 王으로 보내셨던 것이옵니다. 아울러 臣에게는 公子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라>는 특별 분부를 親筆 로 내리셨던 바 臣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심전력을 다하여 趙王을 보필해 왔사옵니다.
하오나 先帝께서 돌아가시자, 太后께서는 使臣을 邯鄲으로 보내시어 趙王을 長安으로 올라오라고 성화같이 재촉하고 계시온바, 그리 되면 어떤 變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여, 臣이 趙王의 長安 行을 적극적으로 막아오고 있던 차에 이제는 臣 마저 長安으로 올라오라 부르셨으니, 臣이 이곳 邯鄲을 떠난 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가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陛下께서는 예전부터 동생인 如意 公子를 각별히 아끼시는 줄 알고 있사와 크게 걱정되지는 않사오나, 太后마마께서는 陛下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셔서, 臣이 邯鄲을 떠나게 되더라도. 폐하께오서는 趙王의 신변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도와주시옵기를 간절히 請하옵니다.
臣 周昌 上書
새로 등극한 惠帝와 如意는 비록 이복 형제이지만 惠帝가 如意를 무척 아끼는 줄 알고 있었음으로, 周昌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 表文을 직접 써서 아우 周宣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惠帝에게 올도록 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周昌은 惠帝에게 주청을 드린 後, 곧 도착한 樊亢과 함께 長安으로 길을 떠난다.
그런데 周昌이 潼關(동관)이라는 곳에 도착 하고 보니, 그곳에는 灌瓔 장군이 惠帝의 命으로 周昌을 마중 나와 있었다. 灌瓔과 周昌은 막역한 친구사이라, 周昌은 크게 반가워하며 灌瓔에게 묻는다. "아니, 자네는 내가 오는 줄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나와 있는가 ?"
그러자 灌瓔은 樊亢이 들으라는 듯이, 周昌에게 큰소리로, "太后마마께서 사신을 보내어 趙王을 上京토록 부르셨음에도 자네가 번번히 방해를 놓았다면서 ? 皇上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크게 怒하시어, 자네를 당장 체포해 오라고 하셨네. 그러니 자네는 두말 말고 나를 따라 폐하께 가야하네."
그리고 樊亢에게는 "이 사람은 皇上의 命으로 내가 책임지고 체포해 갈 것이니, 자네는 太后宮으로 가서 太后마마에게 사실대로 여쭈시게." 灌瓔은 樊亢을 보내고 나서 周昌에게, "皇上께서 자네가 올린 表文을 보시고 크게 걱정을 하시며, 자네가 太后宮으로 가기 전에 皇宮으로 직접 데려오라고 하셨네. 그래서 내가 마중을 나왔으니, 자네는 皇上을 만나 뵙거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도록 하게."
이윽고 周昌이 입궐하자, 惠帝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 내 아우 如意 때문에 卿이 많은 수고를 해주셔서 고맙소이다. 皇室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아우 如意는 내가 최선을 다해 보호하도록 하겠소. 그러나 太后께서는 卿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모양이니, 무슨 일로 그리 노여워하시는지 太后를 이 자리에 모셔다가 이유를 묻도록 하겠소."
** 漢高祖 列傳 30
※ 呂 太后의 무서운 執念
이윽고 呂 太后가 들어오자, 惠帝는 머리를 숙이며, "太后께서는 邯鄲에 있는 趙王을 長安으로 부르셨다는데 어린 趙王을 무슨 일로 부르셨사옵니까 ?" 太后는 周昌을 가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惠帝에게 答한다.
"趙王의 生母 戚女가 지난번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아들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조왕을 불렀던 것이오. 그러나 그 때마다 周昌이 趙王의 上京을 방해한다기에 나는 저 者의 행실이 괘씸하여 樊亢으로 하여금 저 者를 잡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太后는 周昌을 죽이기 위해 長安으로 불렀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惠帝는 太后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先帝께서 如意를 趙王으로 보내실 때, 大夫 周昌을 보필자로 따라 보내시면서, 설사 朝廷에서 詔書가 내려가더라도 趙王은 任地를 떠나지 말도록 분부가 계셨던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趙王이 上京하지 못한 것은 先帝의 命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지, 太后마마의 命을 거역한 것은 아닌 줄 아옵니다. 하오니 그 일은 특별히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呂 太后는 惠帝가 두둔할수록 周昌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太后는 周昌을 잡아오는 즉시 바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인 皇帝가 중간에서 周昌을 감싸고 나서는 바람에, 태후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지라, 이제는 아예 생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周昌은 잘 듣거라. 趙王과 나는 母子之間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가 중간에서 趙王과 나와의 母子之情을 갈라놓았다. 그런 짓을 한 그대를 趙나라에 다시 보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그대는 이후로는 장안에만 머물러 있어야한다. 나의 命을 또다시 거역했다가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太后는 周昌을 長安에 억류시켜 놓고, 그 사이에 趙王 如意를 불러 죽여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 周昌은 머리를 숙인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太后가 돌아가자, 皇帝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卿도 잘 알다시피, 太后는 趙王 母子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여 없애려고 하고 계시오. 지난 번에도 卿이 趙王을 상경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다면 趙王은 이미 太后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이오. 그래서 太后는 卿에게 앙심을 품고 다시는 한단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오. 이것 참, 일이 매우 고약하게 되었구려. 그렇다고 太后의 命을 거역하고 卿이 邯鄲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趙王 母子의 장래가 더욱 나빠질 것이오. 아무튼 卿은 당분간 朕과 함께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해보기로 합시다."
周昌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 일에 폐하께서 특별히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皇室에 처참한 참극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臣이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오나, 臣이 邯鄲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린 趙王을 누가 보필해드릴 것이옵니까? 필시 太后께서는 제가 없는 틈을 타서 邯鄲으로 사람을 다시 보내 趙王을 반드시 불러 올릴 것이옵니다. 趙王께서 멋모르고 長安으로 올라오시는 날에면, 그날로 참변을 당하시게 될것이옵니다. 하오니 陛下께서는 그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聖心을 기울여 주시옵소서."
皇帝 惠帝는 생각할수록 난감하였다. "만약 趙王이 太后의 부름을 받고 上京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참변을 막을 수 있겠소 ?" 周昌은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만약 趙王이 멋모르고 上京하게 되면,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陛下께서 覇上까지 몸소 마중을 나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趙王을 그 길로 대궐로 데리고 오시옵소서. 趙王을 慘劇에서 求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길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惠帝는 周昌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卿의 의견은 참으로 묘안이오. 趙王이 언제 上京하게 될지 모르니, 몇 사람의 장수를 長安에 이르는 길목에 배치하여 趙王이 上京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만 하오." 惠帝는 즉석에서 장륭, 이보, 축통 等 장수들을 邯鄲에서 오는 大路를 검문토록 하고 기퉁, 유범 두 將帥는 邯鄲에서 오는 小路를 지키도록 하였다. 皇帝 惠帝는 이처럼 전력을 다하여 慘劇을 막아내기 위하여 애를 썼던 것이다.
한편, 太后는 太后宮으로 돌아오자 심이기와 여수 等, 두 심복 부하를 불러 命한다. "周昌이란 놈은 다시는 邯鄲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嚴命을 내려 놓았다. 이제는 如意를 長安으로 불러 올릴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있는지 의견을 말해보라."
심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周昌과 戚妃의 이름으로 趙王에게 <속히 상경토록 하라>는 거짓 편지를 보내시옵소서. 그 편지를 보내시면, 趙王은 틀림없이 上京할 것이옵니다." 太后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趙王에게 周昌과 戚妃의 이름으로 두 통의 편지를 동시에 보냈다.
한편, 趙王 如意는 周昌이 長安에서 돌아오기만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 하루는 近侍가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長安에서 使臣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사온데, 한 통은 大王 母親마마께서 보내신 親書이옵고, 다른 한 통은 周昌 大夫께서 보내신 書札이옵니다."
趙王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두 통의 편지를 즉석에서 뜯어보았다. 生母가 보낸 편지에는,
이하 중략,.... 나는 병이 위중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형편이다. 죽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 만이라도 보고 싶구나. 어미의 마지막 소원이니 하루속히 西宮으로 이 어미를 찾아다오. 라는 사연이 씌어 있었고,
大夫 周昌의 편지에는, 大王 母마마의 身病이 이토록 위중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小臣이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를 형편이오니, 대왕께서는 만사 를 뒤로하시고 속히 上京하시와 마지막 孝供을 드리도록 하시옵소서. 臣은 대왕께서 상경하시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겠사옵니다. 라는 사연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어린 趙王은 두 통의 편지를 읽어 보고 울먹이며 말한다. "어머님께서 세상을 뜨시기 前에 빨리 상경해야 하겠으니, 길을 떠날 준비를 속히 준비하도록하시오." 그러자 重臣들이 입을 모아 떠나기를 만류한다. 그러나 趙王은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날로 長安으로 떠난다.
한편, 呂 太后는 趙王이 가짜 편지를 받아 보고 長安을 향하여 邯鄲을 떠났다는 飛馬의 보고를 듣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심복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命을 내린다. "趙王이 上京하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면 반드시 대궐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못 하도록 사람을 대기시켜 놓았다가 趙王을 반드시 내게로 데리고 오도록하라."
呂 太后는 이번 기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趙王을 기어코 죽여버릴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여 태후는 많은 力士들을 동원하여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趙王을 강제로라도 납치해 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趙王이 懷慶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惠帝가 보낸 將帥 장릉, 이보, 축통 等이 趙王에게 큰절을 올리며, "皇命을 받잡고 臣 등은 大王을 영접하러 나왔사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
그나 그 뿐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이틀 후 趙王이 覇上에 도착했을 때는, 皇帝가 親히 마중을 나와 준 것이 아닌가? 皇帝는, "아우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上京하는가 ?" 趙王이 머리를 조아리며, "太后마마께서 上京하라는 분부가 여러 차례 계셨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病中에 계신 어마마마와 周昌 大夫께서도 급히 상경하라는 書札을 보내셨기에 급히 上京하는 中이옵니다." 皇帝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 漢高祖 列傳 31
※ 趙王, 魔女 呂太后의 손에 끝내..
"내가 직접 마중 나오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구나. 그런 가짜 편지를 받고 함부로 운신했다가는 신변에 어떤 慘禍가 일어 날지 모르니, 아우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今後에는 대궐에서 이 兄과 함께 기거하도록 하자." (여태후의 몸에서 태어났건만 惠帝는 참으로 형제의 우의가 남달랐다)
皇帝가 이렇게 趙王을 대궐로 직접 데리고 가는 바람에 태후가 보낸 力士들은 趙王을 어찌 해볼 수가 없었다. 태후는 납치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 또다시 이를 갈며 심복 부하들에게 새로운 命을 내린다. "皇帝가 제아무리 趙王과 숙식을 같이 한다해도 趙王을 납치해 올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너희들은 대궐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고 있다가, 기회가 닿는대로 趙王을 잡아오도록 하라."
한편, 周昌은 趙王을 비밀리에 만나 자기 이름으로 보낸 편지는 가짜였음을 알려주면서, 이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太后를 만나지 말 것을 누누이 경고하였다. 趙王은 그제서야 太后의 무서운 흉계를 알고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皇帝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呂 太后는 그럴수록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때부터는 대궐의 궁녀들을 매수하여 趙王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히 보고하도록 하였다. 惠帝는 성품이 온후한데다가 正義感이 누구보다도 강하여 趙王을 죽이려는 太后의 兇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그는 先帝로부터 는 유언까지 듣지 않았던가 ?
그러나 황제는 성품이 온유하고 내성적이어서 태후의 흉계를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 제지하지 못하고, 趙王의 신변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태도만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皇帝는 趙王과 함께 사냥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그날이 오자, 황제는 새벽같이 사냥 준비를 갖추고 나왔으나, 趙王은 그날따라 몸이 불편하여 사냥을 같이 갈 수가 없게되었다. 황제는 매우 측은하게 여기며
"그러면 오늘은 나만 다녀올 테니 아우는 편히 쉬고 있으라." 皇帝가 趙王을 혼자 두고 사냥을 나가자, 궁녀들은 그 사실을 즉각 太后에게 알렸다. 그러자 太后는 환관 한 사람을 보내 趙王을 꾀어 오게 한다. "小人은 戚妃마마께서 보내신 환관이옵니다. 戚妃마마께서는 大王이 上京하신 지 10 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심으로 몹시 서운하게 생각하고 계시옵니다. 마마의 소원이 대왕을 한 번 보고자하는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오늘은 戚妃마마를 꼭 찾아 뵙도록 하시옵소서. 마마께서는 대왕을 무척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趙王은 그렇지 않아도 生母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던 판이었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을 수가 없어서, 즉석에서 이렇게 물어 본다. "그대의 말은 잘 알겠네. 그런데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런 심부름을 왔는가 ?"
환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小人은 先帝를 예전부터 오랫동안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戚妃마마께도 신임을 받고 있는 張祿이라는 환관이옵니다. 선제께서 돌아가신 後로는 줄곧 西宮에서 戚妃마마를 보필하고 있는 몸이옵니다." "아 그래 ? 나의 어머님을 그처럼 도와 드리고 있다니 고맙네. 지금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하신가 ?" "병환은 그리 대단치는 않사옵니다만, 대왕마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날마다 눈물을 짓고 계시옵니다."
趙王은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어머님을 만나 뵈러 가야겠네.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지금 당장 나를 안내하게." 이리하여 趙王은 마침내 呂 太后의 魔手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윽고 趙王이 張綠을 따라 온 곳은 西宮이 아니라, 呂 太后가 거처하는 未央宮이었다. 趙王은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 채고 도망 치려고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呂 太后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中門까지 마중 나와 있다가, 趙王을 얼싸 안으며, "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 네가 에미를 만나러 와 주니, 세상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이 에미는 그동안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느니라. 어서 들어가자."
如意는 공포심에 전신이 떨려 왔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후에게 큰절을 올린다. "어마마마 ! 小子, 멀리 한단에 떨어져 있어 자주 問安 드리지 못하여 불효 막심하옵니다."
太后는 손을 저으며, "네가 孝性이 아무리 극진하기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그리운 마음이 太山 같구나. 오늘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도록 하자꾸나."
말만 들어사는 情이 철철 넘치는 母情이었다. 呂 太后는 그렇게 수다를 떨며 如意를 內殿으로 데리고 들어서더니, "여봐라 ! 오늘은 그리운 내 아들이 멀리서 찾아왔으니,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야 하겠다. 우선 주안상을 올려라." 하고 命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오자, 太后는 如意에게 손수 술을 따라 주며, "오늘은 너를 오랜만에 만났으니, 네 술잔은 내가 직접 따라 주겠다. 어서 이 술잔을 받아라." 呂 太后가 如意에게 따라 준 술은 한 모금만 마셔도 그 자리에서 卽死하는 라는 무서운 毒酒였다.
如意는 그 술이 그렇게 무서운 독주인 줄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술은 마시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太后가 親히 내려 주는 술을 한사코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如意는 생각다 못해 손에 받아 든 술잔을 태후에게 받들어 올리며, "어마마마 앞에서 소자가 먼저 술을 드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이 술은 어마마마께서 먼저 드신 후, 小子에게 잔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소자가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如意는 毒酒가 아니라는 확증을 보기 위해 그렇게 꾸며댄 것이었다. 그러자 太后는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如意를 나무란다. "네가 예절이 이토록 밝은 줄은 미처 몰랐구나. 그러나 예절에도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방도가 있느니라.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 거기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여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후에게 반문한다. "예절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는 것은 무슨말씀이시옵니까 ? 소자가 아직 미거하여 예절을 잘 모르오니, 어마마마께서 자세하게 하교해 주시옵소서."
태후는 여의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네 총명이 기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너와 나는 모자지간이기는 하지만 오늘에 한해서만은 너는 주빈(主賓)이고, 나는 너를 대접하는 주인이 아니냐 ? 천 리 타향에서 찾아온 귀빈을 제쳐 놓고 어찌 내가 먼저 술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대신 네가 술을 마시고 나거든, 그 술잔을 내게 돌려라. 네가 주는 술이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리로다."
술을 먼저 마시고 난 뒤에 그 술잔을 자기한테 돌려 달라는 말에 여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술이 독주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여의는 마침내 술을 마시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 소자가 이 술을 먼저 마시고 나서 어마마마께 새로 따라 올리겠습니다." 마침내 여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술은 얼마나 독한 술인지, 여의는 술을 두 모금 마시다 말고 별안간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방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달아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지르는데, 여의에 입에서는 이미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는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고 그 처참한 모습을 줄곧 회심의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방바닥을 구르고 기다가, 마침내는 고개를 꺾으며 숨을 거둔다.
여 태후는 여의의 광적인 발작에 이은 죽음을 확인하자 별안간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흐흐흐, 내 이제야 원수 하나는 가까스로 처치했구나." 인간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없는 악독한 말이었다.
태후는 즉석에서 시종들을 불러, "여봐라 ! 이 시체를 당장 끌어내어 후원 오동나무 밑에 묻어버려라. 그리고 이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니, 모두들 입을 조심하거라." 달려온 시종들은 너무도 끔찍스러운 광경에 모두들 부들부들 떨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태후의 서슬이 워낙 푸른지라, 이런 사실을 누구도 감히 입 밖에는 내지 못했다.
이리하여 어린 趙王 如意는 단지 戚妃의 몸에서 태어난 罪로 呂 太后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악독하고도 참혹한 이런 범죄 사실이 과연 언제까지나 비밀이 지켜질 것인가?.
** 漢高祖 列傳 32
※ 惡魔의 化身 呂 太后
한편, 惠帝가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如意가 보이지않는 것이었다. 惠帝는 깜짝 놀라 시종에게, "趙王이 보이지 않으니 웬일이냐 ? 趙王은 어디 가셨느냐 ?" "趙王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어떤 사람과 함께 나가셨사옵니다. 짐작하옵컨데 趙王께서는 未央宮으로 太后마마를 뵈러 가신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惠帝는 기절 초풍 할 듯이 놀랐다. "무어라 ? 趙王이 未央宮으로 太后를 뵈러갔다고 ?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냐 ?" "자세히는 알 수 없사오나, 趙王께서는 太后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계셨다고 하옵니다." "무어라 ? 趙王이 太后와 함께 술을 마셔 ?"
惠帝는 불길한 예감이 떠 올라, 如意를 찾아 부리나케 미앙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未央宮에는 趙王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太后는 惠帝가 나타난 것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主上은 무슨일로 오셨소 ?"
惠帝는 問安도 생략한 채 다그치듯 물었다. "趙王이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 趙王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 저는 趙王을 데려가고자 왔사옵니다." 惠帝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로 태후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太后는 갑자기 怒氣를 띠며 皇帝에게, "趙王을 데려가려고 왔다고요 ....? 흥 ! 趙王은 主上의 원수요. 그런 놈을 데려가 어찌하겠다는 거요 ?"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착한 惠帝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趙王이 나의 원수라니요 ? 太后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 趙王은 사랑하는 나의 아우입니다. 피를 나눈 兄弟가 어떻게 원수가 될 수 있습니까 ?"
그 말을 들은 呂 太后도 화가 나는지 더 거친 말을 쏟아낸다. "主上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先帝가 생존해 계실 때, 先帝는 如意 母子를 편애한 나머지 太子를 廢位하고 그놈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소. 그때 張良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놈이 天子가 되고, 主上과 나는 지금쯤은 죽었거나 闕에서 쫒겨나 거지 신세가 되었을 거요. 그와 같은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主上은 그 원수놈을 마치 愛妾처럼 끼고 돌기에, 나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오늘은 그놈을 꾀어다가 술에 毒藥을 타 먹여 죽여 버렸소."
"뭐라구요? 趙王을 毒殺시켰다고요 ?" 惠帝는 까무러칠 듯이 놀라다가, 이내 미친 사람처럼 太后에게 마구 대들었다. "如意를 毒殺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如意와 나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兄弟之間이오 ? 형제 간에 누가 천자가 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오. 어마마마는 자식을 죽였으니, 이것은 天理에도 벗어나고 人道에도 벗어나는 罪惡한 짓이란 말이오."
평소 조용하던 惠帝가 이처럼 狂氣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며 덤벼들자 呂 太后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옆방으로 피해버린다. 그러나 親 아들인 惠帝로부터 그런 공격을 받고 보니, <戚妃 母子>에 대한 앙심이 더 끓어 올랐다. (내 남편을 빼앗아간 원수의 자식을 죽인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 오냐, 두고 보아라. 황제가 무슨 소리를 하든 나는 <그년>까지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야 말테니..)
천하의 名將 韓信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여버린 惡毒하기 그지없는 呂 太后인지라, 가슴속에 쌓인 원한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惠帝가 난동을 부리고 돌아간 그 다음날, 여 태후는 심복 부하이자 조카뻘되는 呂수를 불러 묻는다. "永巷에 감금해 둔 <그년>은 아직도 살아 있느냐 ?" "예, 아직도 감금해 두고 있사옵니다." "음 .... 이제는 그년을 죽여 없앨 차례다." 太后는 그렇게 말하며 새삼스러이 이를 바드득 간다.
呂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마마께서 분부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죽여 버리겠사옵니다." 태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그년을 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 그년이 죽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니, 내일 아침에 그년을 이리로 끌어내오너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呂수는 戚妃를 데려오려고 永巷으로 달려갔다. 永巷에 갇혀 있는 戚妃의 몰골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날 유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올 때는 시녀들이 300 여 명이나 되었고 몸에는 언제나 비단옷을 입고, 꽃 피는 봄날과 달 뜨는 가을 저녁이면 많은 시녀들을 거느리고 은은한 풍악 소리를 들으며 御苑을 거닐면서 인생을 즐기던 그녀였었다.
그러나 유방이 죽고 난 지금, 그녀는 움막 같은 永巷에 그날로 감금되어 햇빛조차 보지 못하고, 주먹밥으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 가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한 밤중에 심복으로 있던 侍女 한 명이 비밀리에 그녀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끔찍스러운 일을 귀띔해 주었다. "趙王께서 그제 未央宮으로 끌려오신 이후로 소식이 없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戚妃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그렇다면 내 아들 如意는 필시 太后의 손에 죽었단 말이구나. 내, 이 원수를 살아서는 갚을 수 없겠지만 죽어서라도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呂수가 태후의 命으로 戚妃를 데리러 온 것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수는 척비를 未央宮으로 끌고 가기는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녀를 은근히 동정하였다. 그리하여, "부인께서는 지금 太后의 命으로 未央宮으로 끌려가는 중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살고 싶으시면 太后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늘로서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弱者에 대한 일종의 感想的인 동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 如意가 죽었다고 확신한 戚妃는 그 같은 동정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戚妃가 未央宮 뜰 아래 꿇어 앉혀지자, 太后는 대청마루를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戚妃를 조소의 눈으로 노려보기만 하였다.
呂 太后는 强者요 戚妃는 弱者인지라,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는 弱者가 視線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戚妃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뜰 아래 꿇어앉혀 있기는 했지만, 얼굴을 똑바로 치켜들고 太后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太后는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동시에, 일종의 전율까지 느껴오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네 이년 ! 네년은 先帝의 총애를 독점해 오는 동안 皇后인 나를 원수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내 아들을 밀어내고 네 아들을 太子로 삼으려고 했지 ? 네년은 그런 罪로 지금 그 꼴이 되었지만, 아직도 반성하는 빛이 전혀 없구나 !"
그러자 戚妃는 殺氣 등등하게 맞받아친다. "질투로 환장해 버린 이 魔鬼 같은 늙은 년아 ! 네년은 내 아들을 죽인 철천지한의 원수다. 내 비록 살아서 원수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저승에 가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원수는 잊지 않고 천배 만배로 갚아주고야 말 것이다. 이년아 ! "
太后는 戚妃가 무섭게 대들자 한 편으로는 무서웠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毒氣가 치솟아 올랐다. "이년아 ! 네가 발악을 한다고 네 년을 빨리 죽여 줄 줄 아느냐 ! 죽이기는 죽이겠지만 두고두고 천천히 죽여 줄 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그자리에서 刑吏를 불러, 다음과 같이 끔찍스러운 명을 내린다.
"여봐라 ! 저년의 손목과 발목을 죽지 않을 정도로 차례로 잘라서 두루뭉술하게 만들어 버리도록 하여라. 귀도 베고, 눈알도 뽑아 내고 厠間(측간)에다 처넣어 똥을 먹게 하라. 그래서 이제부터는 저년을 <人猪(사람 돼지)>라 부르도록 하라 ! "
人猪란 <사람 돼지>라는 뜻이다. 여자의 질투심과 증오심이 이정도로 잔혹한 것이었던가?
戚妃는 손과 발이 차례로 모두 잘려 버린 채 돼지가 아닌 <人猪>의 신세가 되어 측간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목숨이 원수라고나 할까 ? 戚妃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한편, 측은지심이 남달리 많은 惠帝는 趙王 如意가 親母인 呂 太后로부터 살해되었음을 알고 부터는 政治에 환멸을 느껴 날마다 술과 여자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내가 나라를 아무리 잘 다스려 보고 싶어도,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는 이 판국에,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惠帝는 마침내 자포 자기의 생활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惠帝는 마음을 달래보고자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우연히도 戚妃가 갇혀 있는 측간에 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변을 보려고 무심코 바지를 내리다가,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괴물이 측간 아래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기절 초풍을 할 듯 놀라며 측간을 뛰쳐나왔다.
그리하여 수행하던 侍從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측간속에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괴물이 갇혀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 ?" 侍從들은 모두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것은 <人猪>라고 부르는 것이옵니다." "人猪라니 인저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 "
"....."
시종들은 대답하기가 거북하여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을 못 하는 것이었다. 惠帝는 그럴수록 수상하여 마침내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人猪가 무엇인지 사실대로 말하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斬刑에 처할 것이다 ! "
이에 侍從들은 몸을 떨며,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그 괴물은 선제께서 총애하시던 戚妃의 變身이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에 惠帝는 기절초풍할 듯 놀라며 다시 묻는다. "戚妃께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괴물로 변신을 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분명하게 말하라."
시종들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戚妃는 太后에 의해 손과 발이 모두 잘리고 人猪가 되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稟告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惠帝는 그 사실을 모두 듣고나자 大聲痛哭을 하다가 太后에게 달려가 무섭게 대들었다.
"어마마마는 先帝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셨거늘, 모름지기 人德을 萬人에게 베풀었어야 옳을 일이오. 그런데 어마마마는 戚妃에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인 무도한 형벌을 내렸으니, 이게 무슨 짓이오 ?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잔혹 한 짓을 했단 말이오. 나는 어머니의 자식임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고 다닐 수가 없단 말이오!." 惠帝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대드는 바람에 太后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戚妃에 대한 증오심은 자꾸만 더해 갔다. 惠帝는 生母인 呂 太后를 한바탕 몰아세우고 대궐로 돌아오자, 그날부터는 모든 政事를 丞相에게 맏겨버리고, 자신은 술과 여자에만 빠져 세상 만사를 잊고자 하였다.
呂 太后는 시간이 지나도 惠帝가 政事를 돌보지 않고 酒色에만 빠져 지내자 마침내는 제 자신이 政權을 빼앗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오냐 ! 네가 에미를 배반하고 <그년>을 그렇게 두둔한다면, 이제는 너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와야 하겠다.)
太后는 아들조차 원수로 간주하고, 그때부터는 呂氏 일족을 主要 벼슬자리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丞相 簫何는 前代부터의 宰相인지라, 태후의 일가 친척들을 좀체로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는 先代로부터 有能한 功臣들이 많사온데, 어떻게 그들을 제쳐두고 아무런 功勞도 없는 呂氏들을 重用하시려 하옵니까 ? 옛부터 外戚이 조정에서 득세를 하게 되면 나라가 亡하는 법이옵니다." 簫何가 呂씨 일족을 등용하지 않으려는 대의 명분은 이처럼 뚜렸했다.
그러나 惠帝가 즉위한 지 2년 후, 戊申年 가을에 승상 소하가 죽고 나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太后는 惠帝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기화로, 실질적인 황제의 大權을 직접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呂氏 일가인 呂臺, 呂産, 呂祿, 呂澤 等을 무조건 고위직에 등용하고 兵權까지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로부터 5년 후, 惠帝가 酒色에 지쳐 孫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리자, 呂 太后는 惠帝와 아무 관련도 없는 어린아이를 天子의 자리에 올려 앉히고, 자신이 <聽政>이라는 이름으로 전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렇게 유방이 천신 만고 끝에 이루어 놓은 통일 천하는 10년을 채 못가서 劉氏의 손에서 呂氏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呂 太后는 천하를 장악하고 나자, 여씨 일족을 불러 놓고, "이제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그것은 <人猪>를 죽여 없애버리는 일이다. 지금부터 人猪를 이 자리에 끌어내 四肢를 수레(車)에 매달아, 그년의 四枝를 네 조각으로 찢어 죽이도록 하여라. 그래야 나의 恨이 완전히 풀릴 것이다."
이리하여 <人猪>가 된 戚妃는 마침내 太后가 보는 앞에서 四枝가 넷 으로 찢어지는 車裂刑을 당한다.
呂 太后는 戚妃를 죽이고 나서도 마음이 시원치 않았던지 원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씨부려댄다.
"네년을 죽였지만, 네년에게 빼앗겼던 내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것이 슬프구나" (유방이 조금만 생각이 깊은 者였더라면 呂太后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 ...."
"남자가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못 쓰게 되면 패가망신한다고 한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이들이 위의 진리를 몰랐을까?... 알고는 있었겄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웠겠지.
장장 7개월에 걸쳐 각색해 올린 列國誌(楚漢誌, 漢高祖 列傳 포함)가 내일로 대 단원의 幕을 내립니다.
내일은 마지막으로 중국의 4 대 여걸로 傳해오는 인물 中, 서태후, 측천무후, 그리고 악녀로 더 잘 알려진 '달기'와 '포사'에 관하여 짚어보고 막을 내릴까합니다.
** 中國 歷史上 가장 잔혹한 여인들 2
※ 則天武后와 西太后
1. 則天武后
姓은 武이고 이름은 曌(조), 諡號(시호)는 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 歷史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皇帝가 된 인물로 武后, 武則天, 則天后, 則天帝로도 불린다.
則天武后라는 호칭은 唐 高宗의 皇后로서의 지위를 稱하지만, AD 690년 唐의 국호를 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기도하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측천무후는 624년 2월 17일 唐의 수도인 長安 (지금의 陕西省 西安)에서 당의 건국 功臣인 武士彠(무사확)의 3女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무사확은 唐 高祖, (재위 618~626) 李淵이 隋煬帝에 맞서 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도와 唐 建國에 큰 功을 세웠고, 唐이 건국되자, 武后는 637년 唐 太宗(재위 626∼649)의 後宮으로 입궁한다. 649 년에 太宗이 죽자 武后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感業寺로 出家(황제가 죽으면 중이 되어야. 조선을 건국한 李성계도 둘째부인이 난 경순공주를 살리기 위하여 머리를 깍게하고 出家시킴.)하였다가 651년 高宗(재위 649~683)의 後宮으로 다시 入宮한다. 武后는 高宗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는데, 655년 왕 皇后와 蕭淑妃 등을 축출하고 자신이 황후가 된다.
황후가 된 武后는 고종을 대신해서 政務를 관장하면서 太宗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한다.
656년 皇太子 李忠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李弘을 황태자로 앉히고, 664 년부터는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한다. 675년 高宗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이 되어 全權을 행사하는데, 그 해 장남이자 황태자인 李弘이 죽자 이번에는 둘째 아들 李賢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권력욕이 呂 太后 못지않은 그녀는 680년에 차남 李賢을 폐위시키고 三男 李顯을 황태자로 세운다. 683년, 高宗이 죽자 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셋째 아들이 唐의 4대 皇帝인 中宗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韋后가 아버지 韋玄貞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려 들자 684년 중종마저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 李旦을 황제로 세운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睿宗이다.
그 後, 몇 차례의 반란을 진압한 武后는 심복 들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감시와 밀고를 통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처럼 권력욕이 남달리 강한 武后는 690년에는 四男인 예종까지 폐위시켜버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大周’로 고치고 수도를 長安에서 洛陽으로 옮긴다.
후세의 史家들은 이를 고대의 周나라 (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武周’라고 부른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수없는 것, 705년 무후가 病으로 앓아눕자 宰相 등 重臣들이 그녀에게 양위를 압박하자, 무후는 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中宗이 복위되어 唐 王朝가 부활한다.
그後, 武后는 그 해 12월 16일 눈을 감는데, 황제가 아닌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墓碑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갔다.
** 자신의 잘잘못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음일까? 親 자식을 4 명이나 갈아치운 權力慾의 化身이다.
2. 西太后
西太后는 1835 年11월 29일에 태어났다. 광서제는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해 원세개를 움직이려 했으나 원세개는 황제의 계획을 그대로 서태후에게 고해바친다.
이에 기회를 노리던 서태후는 1898년 9월 光緖帝를 紫禁城의 瀛臺(영대)에 유폐시키고, 變法自疆운동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을 일으키고 정치 일선에 다시 나와 靑나라를 쥐고 흔든다.
19 세기, 남성중심의 封建王朝시대에 유교사상이 정치철학이 된 중국에서 여성이 47 년 간이나 통치하였다는 것은 서태후가 보통여인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淸나라는 外的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을 넘보고있었고 안으로는 250 여년 동안이나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漢族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만주족인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해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戀人 영록과 결별하면서 까지 宮女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 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욕심에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사람을 설득하는 言辯이 출중했던 서태후는 咸豊帝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사게 되고 곧이어 皇帝의 눈에 들어 마침내 황제의 바람인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져온다.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貴妃로 뛰어오르자 이때부터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한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 것이다. 西太后는 그 때부터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咸豊帝는 그녀의 野望을 알고 이를 경계한다. 貴妃인 西太后가 훗날 정치적 큰 바람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咸豊帝는 西太后를 죽일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거센 서구 列强의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咸風帝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만다.
이리하여, 그녀의 6 살 난 아들이 同治帝로 皇帝가 되자 西太后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드디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렴청정은 咸豊帝의 正妃인 東太后와 같이 했지만, 동태후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文盲이었던 고로, 그녀는 서태후에게 모든 정치 문제를 일임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비로소 ‘西太后’ 라는 명칭을 얻는데, 그것은 皇帝의 宮을 가운데 두고 東太后와 西太后의 거처가 東쪽과 西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불려진 것이다.
同治帝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통치했던 서태후였지만 그녀는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권력을 가져갈 政敵이 될 것을 염려하였다.
황제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미로서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휘감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政敵으로만 보인 것이다. 게다가 同治帝는 生母인 자신보다 厚德하고 무식한 東太后를 더 따랐고 동치제의 皇后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고르는 것이었다. 몰락한 지방 관리의 딸인 西太后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가 마음에 들리 없었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親政을 시작할 때가 오면,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별볼일 없는 신세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에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이간시키고 끊임없이 皇后를 겁박한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는데, 同治帝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에 이끌려 궁궐 밖 紅燈街에 드나들었다. 女色에 빠져든 皇帝는 마침내 몹쓸 病(아마도 매독)에 걸리게 되는데 황제가 病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權力慾에 빠져들면 이렇게 되는가? 참으로 무서운 여자라 아니할 수가 없다. 朝鮮때의 宣祖도 世子인 光海君을 질투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50년 동안이나 해먹었지만...)
이미 同治帝는 아들이기 전에 권력을 빼앗으려는 경쟁자였다. 西太后는 性病에 걸린 동치제가 성병약 대신 천연두약을 쓰도록 함으로써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내버려두고 황제가 죽자 임신한 며느리인 皇后를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孫子라는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政敵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女人,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咸豊帝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光緖帝(광서제)를 택한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가 되는데, 즉위 당시 光緖帝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많은 成人 皇族들을 배척하고 구태여 네살배기를 皇帝로 택한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통치하겠다는 야심에 다름 아니었다. 光緖帝는 친 아들마저 희생시키는 非情한 서태후의 서슬에 주눅이 들어 氣 한 번 펴지 못하고 자란다. 皇后의 간택에도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同治帝와 光緖帝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光緖帝를 혼인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親政을 선포하고 자신은 紫禁城 북쪽에 새로 지은 頥和園으로 거처를 옮긴다. 겉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外形上’ 일 뿐이었다. 이미 朝廷에는 서태후의 사람들 뿐이었고 光緖帝는 자주 頥和園으로 문안 인사 겸 와서 서태후에게 國政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成人이 된 光緖帝는 자신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고 싶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하여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끈질기게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찍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군은 예상외로 강했다. 거기에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염려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어쨌거나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완패로 끝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쇠잔했다는 것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에 康有爲, 梁啓超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變法自疆運動에 나섰으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는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遠世凱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원세개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듯 보였으나 그는 이해타산을 크게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태후의 戀人인 '榮祿'을 만나 光緖帝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이에 서태후는 광서제를 紫禁城 瀛臺(영대)에 유폐시키고 그를 도와 '變法自疆'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康有爲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도피하여 목숨은 건졌지만, 어쩌면 靑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變法自疆運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서태후의 독무대였다.
咸豊帝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西太后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있는 옛 戀人, 榮祿을 부른다. 榮祿은 서태후의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한다. 서태후는 榮祿 말고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다른 사내를 불렀고, 수시로 바꿨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政敵도, 外勢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鐵의 여인 西太后도 피해가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나이가 들자 심신이 老衰해졌고 지나친 사치와 향락은 늙은 여인에게 毒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하여 서태후는 이질에 걸리고마는데, 이것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마지막 종소리가 될줄은 몰랐으리라..
그보다 며칠 앞서 10 년간 유폐되어 있던 光緖帝는 遠世凱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 세의 나이로 죽는 다. 光緖帝의 죽음을 傳해들은 서태후는 지극히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光緖帝의 동생인 醇親王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皇帝로 지명한다.
그가 바로 淸나라 마지막 황제 宣統帝 푸이(溥儀)였다. 세 살짜리 溥儀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病席에서 일어나 다시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는 세월은 그녀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遺言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 는 것이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