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김삿갓 방랑기
김삿갓 방랑기 61-70
恒照
2020. 9. 24. 07:51
*오얏나무 이씨 조선, 한양의 풍수와 인심.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 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 집 저 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나무는 이씨 조선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 李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나무 이" 라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 공민왕때, 그 당시 한양 땅에는 난데없이 오얏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같이 오얏나무가 무성하더니,해를 갈수록 그 숫자가 차고 넘쳤다.
"이상하다" ..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을때, 어떤 술사(術師)가 이를 보고 장차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양 땅에서 크게 일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또, 이런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퍼져 나가게 되었고, 급기야 공민왕의 귀에까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런 소문을 듣고 크게 걱정하며, 민심을 되돌리는 조치로 송도에서 벌리사(伐李使)를
보내어, 한양 땅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오얏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얏나무는 웬일인지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기는 커녕, 더욱 무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중 결국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나라를 일으켜 송도에서 천도하여 이곳, 오얏나무 무성한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으니, 한 나라의 흥망이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는 천운에 의해 결정 된다고 보아야 할것 이다.
광나루를 건너온 김삿갓이 한양 도성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이나
수구문(水口門 : 光熙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수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은 한양 장안에서 죽은 송장이 나가는 유일한 문 이었다.
남달리 유난한 김삿갓은 남들이 다니기 꺼리는 수구문을 거리낌 없이 택하여 도성에 입성 하였다.
이렇게 장안에 들어서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길을 오가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복잡 하였다.
"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많구나 ! "
김삿갓은 처음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게다가 시장이란 곳에서는 오만가지 장삿꾼이 저마다 목판을 깔아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데,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싸구려 싸구려~ 이야~ 기가막히게 좋은 호박이 나왔어요 ! "
"동경 사시오, 동경(銅鏡) ~ 노친네 새치도 잘 보고 뽑을 수 있고, 규중 처녀 모양새도 다듬는데는
동경이 최고요 !" 하며, 호객(好客)을 일삼는다.
김삿갓은 전국 이곳 저곳의 시장판을 다녀 보았으나 한양 저자 거리처럼 장사꾼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도데체 알아 들을 길이 없었다.
"헛참, 조선 제일의 한양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군 ! "
김삿갓은 종로 육의전(六矣廛) 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오른 까닭은 한양 도성의 면면을 살펴 수학(修學)할때 읽었던 한양의 풍수 지리를 실제로 확인하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김삿갓이 어렵게 구해 읽게 된 한양의 지세와 풍수는 아래와 같았다.
한양은 400 여년 전, 도읍지로 결정될 당시에 백호(인왕산:仁旺山)가 너무 강하여 청룡(북악산:北岳山)을 누르는 형세였다. 이러한 지형아래에서는 장손 보다는 지손이 성(盛)하게 된다.
따라서 이씨 조선 3대 임금이셨던 태종 대왕 부터, 다음대인 세종 대왕을 비롯하여 지손이 번성
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장손으로 등극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이렇게 권좌에 오른 임금은 권좌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났거나 (5대 문종 대왕) 올랐더라도 정변에의해 폐위되었다. (단종 대왕)
한양의 지세가 이러했기에 약한 청룡을 보완하여 흥인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산맥같이 생긴 之자 한자를 추가하여 문의 이름을 불렀고 성을 산맥과 같이 둥글게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도성의 출입문에 이름을 고치고 성을 둥글게 쌓은 효과가 없었던지 조선의 권좌의 이동은 개국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격변에 의한 논란이 끊임 없었다.
한편, 한양을 처음 수도로 정하고 성(城)과 궁궐을 축조할 때 풍수 지리에 근거로 무학(無學) 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 무학 대사의 주장은 강한 백호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지을때 인왕산을 뒤로하여 동향으로 앉혀 짓게 되면 그 왼쪽의 청룡이 북악산과 삼각산이 되므로 장손이 번성하는 이상적인 왕도(王都)가 된다는 주장이었고, 반면에 정도전은 유교의 옛 경전까지 인용하면서 "왕은 마땅히 남면(南面) 하는 법인데 궁궐의 대문을 어찌 동쪽으로 앉힐수 있는가 ?" 하는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새로 집권한 이성계의 추종 세력은 ,고려시대의 숭불(崇佛)정책에 회의를 품은 유교학자 출신의 문신(文臣)들 이었다.
이성계는 집권 초기에 혼란한 왕권을 유지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경복궁은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때 무학 대사는 크게 탄식했다.
"허, 이거 큰일 나지 않았나. 이렇게 대궐을 조성하면 몇 해 안에 국모가 죽고 용상 바로 앞에서
붉은 피 낭자한 골육 상쟁이 일어날 것인데 .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무학 대사의 예언은 과연 적중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1392년) 궁궐을 조성한지 불과 2년도
못되어 신덕 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후로 왕자의 난을 거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권좌의 이동은 장자 세습의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 아니던가 ?
김삿갓은 쓸쓸한 왕조의 궁궐을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어느덧 멀리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절간이나 서당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할수 없이 오늘은 여염집에서 신세를 지리라 생각하고 이집 저집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대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허,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류의 장이 아니던가. 이렇듯 대문을 걸어
잠근 것은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겠다는 표시가 아닌가. 한양의 인심이 이렇듯 고약한가 ?)
김삿갓은 한양이라는 고장의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리오너라 ! "
제법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오는 듯 하더니, 중문 안에서 대꾸를 하는데,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 "
하고 거꾸로 묻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는 폼이 집 주인인 것이 틀림 없었는데, 김삿갓은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하인이 없음에도 하인에게 이르는 것 처럼 간접 화법을 쓴다고 이미 들은바 있었다.
따라서 주인 편에서 하인을 둔것 처럼 대꾸할 때에는 손님인 이 편에서도 하인을 둔 척하고 간접 화법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 밤 신세를 지고 싶어 찾아 왔노라고 여쭈어라 ! " 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중문 안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손을 재울 방은 없다고 여쭈어라 !"
하며, 씹어 뱉듯 이 같은 소리를 내 던지고 중문을 힘차게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하는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가서 대문을 또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
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이번에는 숫제 안마당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안계시다고 여쭈어라 !"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김삿갓이,
"아무도 안 계시다고 대답하는 그 소리는 개 소리냐고 여쭈어라 ! "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뭣~이 ! 어떤 놈이 !" ...
안 마당에서 건장한 사내놈의 "씩씩"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중문이 급하게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 !!! ..개 같은 놈이 뛰쳐 나오는구나 " !!!! ..
김삿갓은 지팡이와 삿갓을 각각 손으로 움켜 잡고, ("걸음아 날 살려라" ...)
삼십 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62)
*한양 광교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
잠자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는 동안 어느덧 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한양의 거리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김삿갓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조금전 들렸던 종소리는 통행 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알 턱 없는 김삿갓은,
(그 많던 사람들이 별안간 어디로 가버렸을까 ? )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혼자서 유유히 걷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 저만치서 순라군(巡羅軍)인듯 한 사람, 네 댓이 김삿갓 쪽으로 비호같이 달려와 사방으로 둘러싸며,
"이 도둑놈아 ! 통행 금지 시간에 네 놈은 어디로 무엇을 훔치러 가느냐! " 하고 벼락 같이 호통을 치는것 이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놈아 ! 네가 도둑이 아니라면 어째서 통행 금지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냔 말이냐 ? "
"통행 금지라뇨 ? 한양에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이 있단 말이오 ? "
"허허 ..이런 촌 놈을 보았나 ! 너는 도데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통행 금지도 모른단 말이냐 ?"
"나는 시골서 조금 전에 한양에 올라온 사람이오. 한양 땅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그러자 순라군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한다.
"통행 금지도 모르는 이런 시골뜨기를 잡아다 가둘 수도 없고 ..이걸 어쩌지 ?"
그러자 두목인듯 싶은 순라군이 말하는데,
"아무 생길 것도 없는 놈을 잡아다 가두면 뭘해 ! 숫제 광교 다리 밑에 움막 아이들 한테 갖다 맡기지."
그러면서 김삿갓을 쳐다 보며 말한다.
"이놈아 ! 한양에는 통행 금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녀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본시, 하늘과 땅이란 남여 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만인이 공유하는 소유물일진데, 누구나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곳이 땅이 아니던가 ? 그러나 이렇듯 황당한 경우를 당하고 보니 땅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러나 잠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에 순라군 이야기로 짐작컨데 , 잠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
(그것 참 다행이다.)
김삿갓은 광교 다리밑 움막이라는 곳이 궁금해,
"지금 나를 데려 가는 곳이 어떤 곳이지요 ?"
하고, 광교 다리 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순라군에게 물어 보았다.
" 이놈아 ! 통행 금지도 모르는 놈이 그런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감옥 속에서 자는것 보다는 백번 낳을 것이니 잠자코 따라 오너라. 그리고 오늘밤은 움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파루(罷漏)가 울리거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란 말이다."
김삿갓이 광교 다리까지 끌려와 보니, 다리 아래 개천가에는 제법 큰 움막이 쳐져 있고 그 움막
속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라군은 김삿갓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움막에 대고 소리를 크게 지른다.
"애들아 ! 통행 금지도 모르는 촌 사람 하나 데려왔다. 오늘밤 너희 틈에 재우고 내일 아침에 보내 주도록 하거라."
그러자 움막 속에서 네 댓 아이들이 날치기 처럼 잽싸게 달려 나오더니 김삿갓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순라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비단 구렁이 한 놈을 잡아 왔어요. 그놈을 고아 먹으면 아저씨 가운데 다리가 "뻘떡뻘떡" 일어설 테니, 한번 써 보세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싸게 드릴께요."
구렁이를 팔아 먹으려고 덤비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이놈들이 광교 다리 밑에 사는 땅꾼놈들이로구나 ! )
하고 아이놈들의 정체를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순라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끼, 이놈들아 ! 나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밤마다 육봉(肉棒)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못 견딜
지경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먹느냐.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라 ! "
"아저씨가 안 쓰시려거든, 돈 많은 부자 양반들한테 좀 팔아 주세요. 삼백 냥만 받아 주시면 이번에는 섭섭치 않게 구문으로 백냥을 드릴께요."
"알았다, 알았어. 장사 애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어 !"
"네, 손님은 받을테니까 ,이번 구렁이는 아저씨가 꼭 좀 팔아 주세요. 우리들은 이번에도 아저씨만
믿어요."
순라군과는 예전부터 어떤 거래가 있었든지, 땅꾼 아이들은 그렇게 당부를 하고 김삿갓을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 오셨소.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던가요?"
"나는 한양이 초행이라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곳인데,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야 !"
김삿갓은 무심결에 통행 금지에 대한 비난을 한마디 씨부렸다.
그러자 땅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것 참 옳은 말씀 입니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것인데, 대감이니 영감이니 하는 날도둑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행을 금지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웃기는 애기지요."
광교 다리 밑에 있는 땅꾼들의 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김삿갓이 이곳에
와서 움막 안을 두루 살펴보니 아이들의 살림살이가 놀랄 만큼 풍성하였다.
"오늘밤은 아저씨도 우리와 한식구요. 밥은 넉넉하니까 많이 잡수세요."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 내는데, 개다리 소반에 얹힌 저녁 반찬만 하여도 호박 볶음에 낙지 젓갈이
차려져 있고, 돼지 고기 구운 것과 훈제 오리고기며, 부추 무침에 각종 쌈 채소 조차 있는 것이, 정승 댁 잔칫상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땅꾼 아이들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조차, 스스럼 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보니,
그들의 인간성은 대문을 겹겹히 걸어 잠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한양 양반님네와는 비교 안될 만큼 다정 다감 하였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같이 먹기로 하겠네 ! "
김삿갓은 몹시 허기지던 판인지라 염치 불구하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넌즈시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장사가 잘되는 모양일쎄.." 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떠 보았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 싶은 땅꾼 아이가 자신 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한다.
"우리들의 장사는 언제나 잘됩니다. 그것만은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지요."
"이 사람아 ! 장사란 경기를 타는 법인데 자네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는가 ?"
"물론 다른 장사라면 시세와 물량에 따라 굴곡이 있겠지요. 그러나 뱀 장사만은 땅 짚고 헤엄치기 인 걸요."
"어째서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인가 ? 얼핏 들어 서는 알수 없네..."
"생각해 보세요. 사내들치고 계집 싫어하는 사람은 없쟎아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계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하초가 영 신통치 못한 법이지요 ..젊고 아름다운 소실이 있어도 배꼽아래 물건이 영 신통치 못하니까, 값은 고하간에 뱀을 사먹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네 장사는 경기도 안타고, 땅 짚고 헤엄치기죠."
김삿갓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듯한 소리였다.
"아까 잠깐 듣자하니 구렁이 한 마리에 삼백 냥이라 하던데, 뱀의 값이 그렇게나 비싼 것인가?"
"아저씨도 참 ! 뱀의 값이 너무 싸 버리면 뱀을 사려는 사람이 효과를 의심하기 마련이예요.
그러니 처음 부터 높은 값을 불러 놓고, 흥정을 할 때 못 이기는 척 하고 조금 깎아주면 인심도 얻고 뱀도 팔수 있고, 서로 좋은 일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뱀 한 마리가 삼백냥이면 너무 비싸군. 이건 일종의 사기로구먼, 안그래?"
김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자 , 땅꾼 아이는 고개를 가로 젓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가 본데, 한양 장안에 부자 양반들은 모두가 백성의 등을 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 돈을 좀 나눠 먹기로 무슨 죄가 된다고 생각 하세요 ?" ...
"하하하, 그 말을 듣고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려. 그러고 보면 세상 만사가 돌고 돌아가며 절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모양일세 ! "
"우리들은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요. 아무튼 뱀이라는 것은 값을 비싸게 부를수록 잘 팔리는 법이예요.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돈이 썩어나는 양반들에게는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정력을 왕성하게 하는 것 만이 대단히 중요 하거든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다음날 아침, 땅꾼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무섭게 제각기 꼬챙이와 자루를 하나 씩 들고 움막을 나서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산으로 뱀을 잡으러 갈거예요. 아저씨는 서울 구경을 다니다가 잠자리가 없게 되거든 우리한테 또 오세요."
밤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한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덕분에 신세를 많이지고 가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섭섭하지만 이만 작별하세. 그리고 앞으로 건강하고 일 열심히 하면서 돈도 많이 벌게 되기를 빌어줌세 !"
"그래요 ? ... 이거, 섭섭해서 어떡하죠 ?"
그러면서 땅꾼 아이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하더니, 한 아이가 옆전 열 냥을 불쑥 내밀면서,
"이거 몇 푼 안되지만, 가시다가 술이라도 한잔 사 드세요."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밤새 신세를진 것도 고마운 일인데 돈까지 내밀다니 ..
너무도 고마운 인정을 만났기에 김삿갓은 눈시울이 후끈 달아 올랐다.
"나는 본시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인데, 자네들이 정으로 주는 돈이니, 이 돈을 고맙게 받겠네."
김삿갓은 엽전을 주머니 깊이 간직하고 다시 서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풍수 지리상 백호의 기(氣)를 담고 있는 인왕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왕산에서 굽어보는 장안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만호 장안(萬戶長安)을 굽어보던 김삿갓은 어제 겪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양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그릇 먹이려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일에 비한다면 양반님네들이 멸시하고 더럽다 여기는 땅꾼 아이들의 고마움은 상대적으로
크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한양이란 매우, 극과 극의 삶이 서로 섞여 돌아가는 곳이군 ...)
이런 생각으로 장안을 내려다 보던 김삿갓, 갑자기 뒤가 마려 옴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장안을 내려다 보며 뒤를 보려는데, 별안간 방귀 한 방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을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스런 방귀 한 방을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어댓다.
인왕산에서 똥을 누려니 방귀가 먼저 터져 나와 향기로운 냄새로 온 장안이 진동했다.
放糞仁旺 第一聲 방분인왕 제일성
香震長安 億萬家 향진장안 억만가.
이 시는 김삿갓이 인심 사나운 한양 도성을 떠나는 "이별의 시"이기도 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63)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滿滿)집 주모. "상편"
인왕산을 내려온 김삿갓은 세검정을 지나 무악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주.장단을 거쳐, 오백년 망국지한이 서린 고려의 도읍지, 송도에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 고개위에 올라서니, 넓은 들판이 한눈에 환하게 내려다 보여, 한양을 돌아보며 생겼던 갑갑증과 함께 우울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았다.
터벅터벅 산 길을 내려오던 김삿갓의 눈 앞에는 커다란 소나무 그늘아래서 농삿꾼 인 듯싶은 장정 하나가 지게와 낫을 옆에 놓고 네 활개를 쫙 펴고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나무를 하러 가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듯 하였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 가자 그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 앉는데, 두 눈이 왕방울 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닌듯 보였다.
김삿갓은 "날이 많이 덥군요. 산에 나무 하러 가시던 길인가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농사꾼은 자신이 앉아 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인가보죠 ? ... 여기 좀 쉬어 가시오." 하며 말한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은 김삿갓의 행색을 살피더니,
"그런데 남들은 좀체 쓰지않는 삿갓을 쓰고 다니시는구려." 하며 이상한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 본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삿갓이야 사정이 있어서 쓰고 다니지요. 그나 저나 아까부터 목이 컬컬하여 술 생각이 간절한데,
혹시 부근에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오? " 하고 물어 보았다.
농사꾼은 "술" 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정신이 번쩍 드는지, 왕방울 같은 눈알을 대번에 희번덕 거리며 입맛 부터 다신다.
"술집이요 ? 술집이라면 나한테 잘 물으셨소.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만만(滿滿) 이라는 술집이 있다오. 술맛도 기막히지만 안주도 천하 일품이지요."
"저 고개 너머에 그렇게나 좋은 술집이 있어요? "만만"이라, 술집 이름도 참 이상하네.."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하자 농사꾼이 대뜸 대답하는데,
"술집 이름이 이상하긴요 ? 아, 글쎄, 술 한잔 가득, 또 한잔 가득, 그래서 찰만, 찰만, 만만 집이라오."
"그것 참 재미있는 술집 이름이오."
김삿갓은 농사꾼의 너스레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 하시는 모양이구료."
"아따, 사내 대장부 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 보셨소. 돈이 원수라서 그 좋은 술을 맘껏 못 먹고 밤낮 촐촐게 지내는것 뿐이지요."
"그러면 내가 한잔 살테니 같이 가시려오 ? "
농사꾼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며, "돈은 넉넉하시오? "
"돈은 걱정 말고 같이 갑시다."
"그럼 나를 따라 오시오."
"지게와 낫은 안 가져가시려오 ?"
"술을 먹으러 가는 판인데, 그깟 지게와 낫은 가지고 가면 뭘하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죠 ?"
"아따, 그 양반 걱정도 팔자요. 그깟 지게와 낫을 누가 가져간단 말이오. 어서 나를 따라 오시오."
김삿갓은, 누가 술을 사고 얻어 먹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지만, 농사꾼의 수작이
여간 흥미진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장서 허울대며 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산 아래로 따라 내려오니, 산 모퉁이에 "滿滿" 이라는 초라한 주막이 보였다.
그는 술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며 호기롭게 주인을 불러제긴다.
"만만 아줌마 계시오? .. 내가 오늘은 손님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 ! "
그러나 주모는 목소리 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아는 듯, 문도 열어 보지 않고 짜증스런 어투로 대꾸한다.
"에구 저런! 백수 건달이 또 왔는가보네! 오늘은 아직 개시도 못 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먹겠단 말이오? 에구머니! ..오늘은 제발 그냥 좀 가시구려" ..
이렇듯 대꾸하는 주모의 말로 미루어 보건데, 이 사람 외상 술값이 어지간히 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모에게 백수 건달로 불린 이 사내는 주모의 매몰찬 냉대에도 눈 하나 깜짝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또다시 호기를 부린다.
"아따, 외상이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야단이야, 내가 주모 외상 술값 떼 먹을 사람으로 보여 ?
걱정말라구 !.. 그렇지만 오늘은 내가 외상술을 먹으러 온 것 아니고 큰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상이나 차리라구 ! "
토라진듯 방문을 등뒤로 돌아 앉아있던 주모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서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 보더니 놀란듯이 말을한다.
"어머나 ! 다른 손님이 계신 것을 몰랐네..."
그러면서 김삿갓을 흘깃 보더니,
"어서 오세요. 상제님이 같이 오신것 같은데 ..우리집은 밑천이 딸려서 외상 술을 드리기 곤란한데 어쩌지요?" 삿갓을 쓰고있는 김삿갓을 상제로 알고 말을한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했다.
"오늘 먹는 술값은 내가 맞돈을 드리죠. 염려 말고 술이나 주시오."
그러자 백수 건달로 불린 사내는 아랫목에 배짱 좋게 주저 앉으며 한마디 한다.
"것 보라구! .. 오늘은 맞돈 주겠다는데 주모는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지 ?"
그러나 주모도 만만치 않은 소리를 한다.
"내가 술장사를 시작한 첫날부터 삼 년동안이나 외상 술을 먹어온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큰소릴치는게야. 어쩌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원 ...."
"아따 , 외상술 주기가 그렇게나 아까우면 숫제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면 될것 아니겠나, 하하하..
안그래요? 삿갓양반! "
백수 건달이 능글맞게 나오자 주모가 입을 삐쭉이며 말을한다.
"이봐요 백수 건달씨 ! 지금 내 나이가 몇 인데, 아들 같은 댁을 서방으로 삼겠소 ?"
김삿갓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나이를 가름해 보는데,
백수 건달로 불리는 사내는 갓 40이 넘은 것 같아 보이고, 주모는 오십 중반으로 보였다.
그러자 백수 건달이 대꾸하는데,
"아들같은 젊은 사람하고 살면 더좋지 ! ..젊고 싱싱한 물건을 밤마다 맛 볼수 있을테니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 그 물건만 먹고 사는가 ? .. 개떡 같은 수작은 그만하고 밀린 외상
값이나 어서 갚아요."
김삿갓이 두 사람 하는 수작을 듣노라니, 그냥 두었다가는 결판이 나지 않을 행색이라,
"외상값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술 값은 내가 낼테니 염려 말고 술이나 가져 오시오."
하고 재촉의 말을 하니, 그제서야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오늘 술값은 틀림없이 손님이 맞돈으로 주시는 거죠 ?" 하고 또한번 묻는다.
이렇듯 주모가 하도 미심쩍어 하므로 김삿갓은 숫제 주머니에서 돈자루를 꺼내 보였다.
"자, 돈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아무 걱정 말고 술이나 가져 오라구 ! "
돈자루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져 놀란 사람은 주모만이 아니라, 백수 건달도 왕방울 같은 눈이
튀어나롤 정도로 놀라며 주모에게 호기롭게 소리치는데, "이것 보아요 주모! 지금 저 돈자루 보았지? 아까부터 내가 "큰손님" 이라고 하지 않던가 ..
그러니까 마음놓고 술을 얼마든지 가져 오라구. 이런 제길헐 ,의심이 이렇게 많아서야, 츳츳..."
하며 제법 혀까지 차면서 주모를 나무란다.
주모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달려나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오며, "백수 건달이 오늘에서야 삿갓 양반 덕택에 술을 마음껏 마시게 되었구먼. 그러나 남에 호주머니 돈을 내돈으로 착각은 하지 말아요." 하며 또 한마디 쏘아 갈긴다.
그러자 백수 건달은 지지 않고 한마디 하는데,
"이런 제기헐, 본래 돈이란 돌고 도는것, 술자리에서 네 돈 남에 돈이 어디 있어 ? ...
안그래요 삿갓양반 ? "
김삿갓은 동의를 강요당하자, 너털웃음을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는 시작 되었다.
김삿갓은 비록 백수 건달이라 불리는 사나이와 초면부터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지만, 노상에서 술 친구를 만난것 조차,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백수 건달은 술을 얼마나 좋아 하는지, 술잔을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나도록 마시며 말한다.
"어~허 ..술맛 조오타....이렇게나 좋은 술을 한번도 마음껏 마셔보지 못하고, 그놈에 외상값 때문에 주모한테 밤낮 구박을 받아 오고 있으니, 신세가 비참하기 이를데 없네 ...
삿갓 선생 ! 어쩌다 내 신세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김삿갓은 백수 건달에게 술을 다시 따라 주고, 자기도 잔을 채워가며 말한다.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물론이지요. 남자의 인생에서 술과 계집을 빼놓으면 뭐가 남겠소."
"하여튼, 돈은 넉넉하니까 오늘은 마음껏 마셔 보시오."
김삿갓이 그렇게 말을하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자 백수 건달은 감격해 마지 않으며, "원,이렇게도 고마운 일이 있나. 내가 어젯밤 돼지꿈을 꾸었더니 오늘은 술복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그려."
"그나 저나, 노형을 두고 주모가 백수 건달이라고 부르던데, 그 연유나 들려주시오."
김삿갓은 백수 건달로 불리는 사나이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킥킥" 웃더니 말을한다.
"내 본래 이름은 백남봉이라오. 그런데 남봉, 남봉 하며 남들이 부르다보니, 난봉꾼 처럼 들리게 되었고, 결국은 난봉을 일삼는 백수 건달로 불리게 된것 이라오."
"허허..매우 재미있소이다."
김삿갓은 별 일 다 보았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곧 정색을하며 백수 건달에게 말했다.
"내가 노형에게 한 가지 따져야 할 일이 있소이다."
"예 ? ... 나한테 따질 일이 있다구요 ? "
"그렇소. 노형이 아까, 나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올 때, 이 집에 술안주는 천하 일품이라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
그런데 정작 이 집에 와보니, 안주라고는 고작 도토리묵 한 접시뿐이 아니오. 도데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 "
김삿갓이 안주 투정을 하자, 주모가 얼른 앞으로 나앉으며 대답을 가로 막는다.
"우리집 술 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인걸요. 한양에서도 제법 떨어진 첩첩 산중이라,
다른 안주는 재료를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백수 건달을 다시 나무랐다.
"노형은 이 집 술 안주가 천하 일품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주모의 말을 들어 보면 ,
이 집 술 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이었다고 하니, 노형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게 아니오?"
그러자 백수 건달은 술 한잔을 또다시 단숨에 쭈욱 들이키고 나더니 도토리묵 한조각을 입안에 집어 넣으며,
"이 집에 술 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이라오.
그러니 그게 바로 천하 일품이 아니고 뭐겠어요, 하하하..."
하고 방안이 떠나갈 듯이 통쾌하게 웃어 제친다.
김삿갓이 들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속은 것은 분명한데, 괘씸하지는 않았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마침 출출하던 판이었기에, 안주가 천하 일품이라 하기에 큰 기대를 걸고 왔다오. 그런데 도토리묵 하나를 가지고 천하 일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소."
백수 건달은 그 말을 듣고 커다란 눈알을 두어 번 꿈쩍 거리더니 별안간,
"이봐, 주모 !"
하고 큰소리로 주모를 부른다.
"왜 또 부른데요 ?" ..
"이 집에 씨암탉 몇 마리 있지 않은가 ? 오늘은 큰손님이 오셨으니 한 놈만 안주삼아 잡아먹자구."
그 소리에 주모는 펄쩍 뛸 듯이 놀란다.
"백수 건달이 미쳤나 ? 씨암탉은 우리집 귀중한 재산인데 그것을 어떻게 안주로 삼자는 말이야 ?"
"그대신 돈을 많이 받으면 될것 아닌가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되요."
"허긴, 이집 씨암탉이 주모보다 더 가치있다는 것은 내가 알지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그깟 씨암탉이 대수인가 ?"
"그깟 씨암탉이 ? 나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
주모가 주먹다짐 하듯이 백수 건달을 노려 보며 말한다.
"그럼, 씨암탉은 매일같이 달걀을 하나씩 낳아 주지만 , 주모야 달걀도 못낳는 식충이 아닌가, 하하.."
씨암탉 이야기가 오가자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시장기가 들었다.
그래서 주모에게 간청을 했다.
"주모, 내가 허기가 져서 그러니 닭을 잡을 수 있거든 한 마리만 잡아와요. 닭 값은 넉넉히 줄테야."
"돈이 문제가 아니고 내 손으로 키운 닭을 내 손으로 잡아 먹기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러죠."
그러자 백수 건달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며 한마디 한다.
"이봐 ! 서방이 씨암탉이라도 잡아오라면 냉큼 잡아올 일이지 , 무슨 핑게가 그리도 많아 ! "
"아따, 누가 누구의 서방이라는 거야.내가 언제 서방질 했다고 서방이래 ! "
"아참 .. 이불 속에서 꼭 그 짓을 해야 서방인가? 마음이 서로 통하면 그게 바로 서방이 아닌가 ? ....
안그래요, 삿갓 선생 하하하."
김삿갓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수도 있지요. 비록 남녀간에 통정은 안했더라도 마음이 통하면 애인이라고도 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오."
"것 봐라 벽창호 주모야. 이 손님으로 말을 할것 같으면 손이 크신 어른 아닌가. 닭을 한 마리만
잡아오면 의례 대여섯 마리 값을 치러 주실 것인데, 그것을 왜 모르느냐 말야 .
술장사를 하려면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지 원.."
백수 건달은 슬쩍, 주모를 도와주기 위해 김삿갓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눈치로 말을한다.
"어마, 한 마리를 잡아오면 한 마리 값만 받아야지, 도둑놈 모양으로 어떻게 대여섯 마리 값을
받아요 ... 아무튼 손님이 시장하신 모양이니 한 마리 잡아 올께요. 닭을 잡는 동안 두 분은 술을 천천히 들고 계세요."
주모가 닭을 잡으려고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백수 건달은 주모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방랑시인 김삿갓 (64)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하편"
"지금 저 여편네는 술장사를 해먹을망정 사람 하나만은 진국이라오.
인정 많고, 남의 사정 잘 알아주고 ...계집으로서는 돼 먹은 계집이지요."
김삿갓은 조금전까지 서로 아옹다옹 다투던 모습과는 달리, 백수 건달이 주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노형이 주모를 칭찬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이구료. 나는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 사이처럼 보였는데."
"주모와 나 사이가 개와 고양이 처럼 보인다구요 ? ..근데요 사실은 주모가 나를 아껴주고, 내가 주모의 사정을 알아주고 ...딱히 뭐랄 것은 없지만 그렇게 지내지요."
"노형이 주모를 이렇게 좋게 말하고 있지만, 외상술을 안주려는 것을 보면 주모는 노형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것 아니오 ? "
김삿갓은 그들의 관계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았다.
그러자 백수 건달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한마디 하는데,
"천만의 말씀. 주모가 나에게 외상을 안주면 누구에게 주겠소. 나는 술을 입에 댓다 하면 억척스럽게 마시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주모는 술을 안 주겠다고 앙탈을 부리는거죠.
이를테면 나를 생각해서 술을 못 주겠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년 동안 술장사 하는 동안 계속 외상술을 마셨다니, 나라도 외상술 주고 싶은 생각이 나겠소 ?"
"아닌게 아니라 개업 첫날부터 외상술을 먹어 온 것은 사실이지요.그러나 돈이 생길때 마다 갚아 온것도 사실이고, 꼬투리가 몇 푼 남아 있을 뿐이지 ..사실은 거의 다 갚아, 실상인즉 외상값은 몇 푼 남지 않았다오. 그런데 저 망할놈에 여편네가 나만 보면 삼 년전 외상값을 갚으라고 지랄을 하지 뭐예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박장 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삼 년 전의 외상값 꼬투리가 그냥 남아서 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오 ? ... 그나 저나 나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뭐가 궁금하단 말씀이오."
"우리에겐 옛날부터 홀아비가 한방중에 과부를 보쌈해 가는 관습이 있지 않소? 이 부근에도 홀아비가 없지 않을 터인데 , 이렇게 과부 혼자서 버젓이 술장사를 해오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 "
이 말을 들은 백수 건달은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들고 있던 술잔을 술상위에 털썩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 참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군...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갔던 사건이 두 번씩이나 있었다오."
"엣? ... 홀아비한테 두 번씩이나 업혀 갔던 일이 있었다구? "
이번에는 백수 건달이 술 한잔을 단숨에 쭉 들이키고 나서, 비어있는 술잔을 김삿갓에게 건네며 말한다.
"삿갓 선생! 과부 업혀 갔던 애기도 좋지만 술이나 마셔 가면서 애기 합시다.
내가 한잔 따를테니 기분좋게 쭈욱 들이키시오."
백수 건달은 남의 술로 선심을 써가며, 호기롭게 말을한다.
"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 가던 이야기를 들으면 삿갓 선생의 배꼽이 빠질거요."
"배꼽이 빠져도 좋으니 그 애기 좀 들어 봅시다."
"듣고 싶다면 애기해 드리죠."
그리고 백수 건달은, 주모가 한밤중에 산너머 마을에 홀아비에게 업혀 가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지금으로 부터 20여 년전, 주모가 30고개를 막 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주모는 결혼한 지 10여 년 만에 남편이 죽고, 딸 하나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젊고 아름답던 시절이라, 재혼을 시켜 주려고 중신 할미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 왔다.
그중에는 읍내의 갑부인 최부자가 소실로 데려 가겠다는 유혹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과부는 일체의 유혹을 부리치며, 누구에게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누가 뭐라해도 재혼은 안 해요. 백년 가약을 맺었던 남편이 비록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남편이에요. 재혼을 했다가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딸 자식 하나를 데리고 죽는날 까지 혼자 살다가 먼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을 반갑게 만날 결심이에요."
본인이 이런 각오를 다지고 말을하니, 중매쟁이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밤, 커다란 이변이 생겼다. 젊은 과부는 정신없이 잠을 자다가 그만, 포대 자루 속에 갇혀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내등에 강제로 업혀 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젊은 과부는 업혀 가면서도 포대 속에서 "사람 살리라"는 고함을 고래 고래 지르며, 사지를 결사적으로 버둥 거렸음은 말 할 것도 없었다.
납치범은 그런대로, 포대 자루 속의 젊은 과부를 얼마를 업고 갔다.
그러나 포대 속에 든 과부의 몸부림이 어찌나 극성스럽던지 , 더 이상 업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납치범은 마침내 포대 자루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제법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업혀가기 싫거든 포대 속에서 내놔 줄테니 아뭇소리 말고 따라 오라구. 우리들 같은 과부
홀아비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줄 알아요.
과부와 홀아비라도 남부럽지 않게 잘살면 될 게
아닌가. 나는 그만한 자신이 있어 임자를 업어가는 것이니 잠자코 따라오면 얼마나 좋겠누 ..."
포대 속에 갇혀 있는 젊은 과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문득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서는 못 살아요."
"그럼 포대 속에서 내놔 주면 나를 순순히 따라 오겠지? 우리 둘은 어차피 한번씩 아픔을 겪은 사람들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출발해서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구."
납치범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가는 줄로 알고 포대를 끌러 주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젊은 과부는 포대 속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별안간 표범처럼 사내에게 달려들어, 대뜸 그의 불알을 움켜잡고 늘어지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나쁜 놈아 ! 짐승만도 못 한 네놈은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사태는 급전 직하로 역전 되었다.
과부를 납치해 가려던 사내는 졸지에 급소를 공격당한 아픔에 기절 초풍을 하였다.
"아야 아야 ! 아이구 나 죽네 .. 제발 이것 좀 놔주쇼 ! 아이구 아야 ! ..."
사내는 금방 죽어 갈 듯한 비명을 질러댓다.
그러나 과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요동을 칠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개만도 못 한 놈아! 또다시 그럴 테냐 어쩔 테냐, 아예 오늘 여기서 뿌리를 뽑히고 갈테냐."
사태가 이쯤 이르자 제아무리 항우 장사라도 배겨날 길이 없었다.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사람 살려요."
젊은 과부가 얼마나 납치범의 불알을 세게 쥐었는지, 마침내 젊은 과부가 그것을 놓아 주었을
때는, 납치범은 혀를 가로 물고 쓰러져 버렸다.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배꼽을 움켜잡으며 포복 절도를 하였다.
"하하하, 하마트면 하나밖에 없는 귀물을 송두리째 뽑혀 버릴 뻔했구료. 사내의 급소를 사정없이 움켜잡고 늘어졌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만 하여도 남에 일 같지 않구려."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러니까 삿갓 선생도 행여 그것만은 조심하시오."
"에이 여보시오. 남에 걱정은 말고 노형이나 조심하시오."
"납치 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했는데, 또 한번의 납치는 어떻게 모면했나요.
그 애기도 들려주시구려."
그러자 백수 건달은 고개를 가로 젓으며, "삿갓 선생은 술 한잔 사주고 그 좋은 이야기를 죄다 공짜로 듣겠다는 말씀이오. 그건 너무 하시오."
라고 말을 하면서 거절하는 투로 나온다.
"에이..밑천도 안 들인 애기를 무얼 그리도 비싸게 구시오. 술은 얼마든지 살 테니 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 주시오."
"어험, 그러면 밑천이 안 들은 이야기니 선심을 쓰기로 할까 ? "
백수 건달은 김삿갓이 이야기에 바짝 흥미를 같자, 잔뜩 뜸을 들인후 ..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리고 백수 건달은 두번째의 납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걸어가고 (월무족이 보천 : 月無足而 步天)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든다(풍무수이 요수 : 風無手而 搖樹) 라는 옛말이 있더니 , 첫번째 납치 사건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일어난 일 이 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젊은 과부가 납치범의 불알을 움켜쥐는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소문이 며칠이 안되어 동네 방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쫙 퍼졌다.
예나 지금이나 홀아비는 어느 마을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첫 번째 납치 미수 사건을 듣고 난 근동에 홀아비들은 문제의 과부를 업어 올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무서운 과부를 섣불리 업어 오려다가 불알이 뽑혀 버리는
날이면, 인생이 송두리째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과부가 워낙 귀한데다가 홀아비는 흔해 빠졌으므로 , 개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팔자를 고쳐 보려는 홀아비가 노상 없지도 않았다.
문제의 과부집에서 50리 가량 떨어진 청석골이란 마을에 살고 있는 황서방이라는 홀아비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 만용가(蠻勇家 : 오랑캐 같은 무모한 용기를 가진자) 였다.
40 고개를 갖 넘은 황서방은 , 힘이 황소같이 거침없는 사내로써 동네에서는 고집도 황소처럼 세고, 우둔하기도 짝이 없어 사람들 끼리 그를 부를 때는 흔히, "황소방' 이라고 하였다.
바로 그 황 서방이 어느 날 늙은이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어느 홀아비가 젊은 과부를 업어 오다가 그만, 불알을 움켜 쥐이게 되어 뿌리가 뽑힐 뻔 하였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장담하였다.
"계집에게 뿌리를 뽑히다니오 ?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계집이 제아무리 힘이 세기로, 사내의 뿌리를 무슨 재주로 뽑는단 말이오. 나 같으면 계집년을 그 자리에 자빠뜨려 놓고 말뚝 같은 물건을 사타구니 속으로 꼿아 버리겠소. 그러면 계집은 대번에 거품을 물고 나가 떨어질 게 아니오."
그 말에 늙은이들은 포복 절도를 하였다.
"이사람아 ! 누군들 자네만 못해서 뿌리가 뽑힐 뻔 했겠나. 여자들의 "악다구리"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히는 법이네. 자네는 여자들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는가 보구먼."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언제나 밑에 깔려 돌아가는 것이 계집인데 무섭긴 뭐가 무섭단 말이요."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어디, 자네가 그 과부를 업어와 보게나."
"과부의 집이 어딘지나 알려 주시오. 그깟 계집, 오늘밤 안으로 업어오지요."
이리하여 젊은 과부의 두 번째 납치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날 밤, 황서방은 젊은 과부를 포대 자루 속에 넣어 등에 업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과부는 포대 속에서 결사적으로 난동을 부려 보았지만 황서방은 끄떡도 않고 자기 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에 온갖 지랄을 해 보아도 끄떡도 않는 황서방의 등에 업힌 포대 자루 속에 과부 자신도 이번만은 "큰일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산골짜기를 지날 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저 멀리 산 위에서 홀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우뢰와 같은 호성(虎聲)을
지르면서 황서방을 향하여 번개처럼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황서방은 혼비 백산하여 "악!"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랑이는 도망가는 노루를 추격해 오는 중이었고 그 방향은 공교롭게 황서방의 가던 길과 마주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서방은 호랑이가 자기를 노리고 달려 오는 것으로 알고 겁에 질린 나머지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던 것이었다.
납치되어 오던 과부가 간신히 자기 손으로 포대를 끌르고 나왔을 때에는, 호랑이는 이미 온데간데 없고 자기를 납치해 오던 사내는 누런 똥을 한바가지 싸 갈겨 놓고 송장이 되어 있었다.
김삿갓은 두 번째 납치 미수담을 듣고 포복 절도를 하였다.
"하하하, 하늘이 무심치 않아 , 황서방인가 하는 자가 천벌을 받은 셈이구려."
"물론이지요. 그야말로 천벌이지요."
마침 그때 주모가 삶은 닭고기를 소반에 받쳐 들고 들어오며 두 사람에게 말한다.
"무슨 애기를 그렇게나 재미있게 하세요."
김삿갓은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주모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끼고 아끼던 씨암탉을 잡아 오게 해서 미안하오....
우리들은 지금 홀아비가 과부 업어 가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소."
주모는 대번에 눈치를 알아차리고, 백수 건달을 흘겨보며 정면으로 나무란다.
"백수 건달이 허풍을 떤 모양이구먼." 그러면서 김삿갓을 보고,
"그런 허풍은 믿지 마세요."
그러자 백수 건달도 한마디 하는데, "허풍은 무슨 허풍이야. 모두가 사실인걸. 누가 없는 말을 꾸며 냈을라구."
"사실이거나 말거나 간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긴걸..."
주모는 백수 건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나서,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닭고기나 들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말한다.
"술 안주를 정성껏 만들어 오기는 했지만 음식 솜씨가 워낙 없어서 ..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맛이 없더라도 많이 드세요."
김삿갓은 우선 국물 맛을 보았다.
간도 잘 맞았지만, 어떤 양념을 넣었는지 향취가 그윽하게 풍기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응? ... 이게 바로 "천하 일품" 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도 기막힌 음식 솜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토리묵 한가지 만으로 술을 마시라고 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소."
그러자 백수 건달이 딴지 거는 소리를 던지고 나오는데,
"삿갓 선생! 섣불리 감탄 하다가는 삿갓 선생도 누구 모양으로 뿌리를 뽑히게 될까 걱정스럽소."
"에이, 여보시오. 주인 아주머니가 아무리 분별이 없기로 내 것이야 뽑자고 뎀비겠소 .
하하하... 안그래요, 아주머니 ? "
주모는 닭고기 담긴 솥을 김삿갓 앞으로 내밀어 놓으며 말한다.
"시장하단 양반이 무슨 군말이 그렇게나 많아요. 어서 닭고기나 드시우."
그리하여 술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는 김삿갓도 자신이 있었지만, 백수 건달은 밑 빠진 독처럼 한이 없이 마셔댓다.
그러자 주모가 김삿갓에게 귀띔을 하는데, "저 사람은 술을 한번 폭음하고 나면 열흘 가량 앓아 눕는 버릇이 있다우.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권하지는 마세요."
주모의 은근한 보살핌에 김삿갓은 내심 감격해 마지않았다.
아까는 백수 건달이 닭 값을 많이 받아 주려고 애를 쓰더니, 이번에는 주모가 백수 건달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순박하고 아름다운 인정인가? ....
출호이자 반호이 (出乎爾者 反乎爾), 이쪽에서 마음을 터 놓고 손을 내밀어 보이니, 상대방도
무심중에 그 손을 잡아주는 것 ... 이렇게 세 사람은 흉금을 터놓고 말하는 중에 형용하기 어려운 우정이 쌓여만 갔다. 아울러 이런 친밀감은 양반 사회에서는 좀처럼 맛 볼수 없는 아름다운 인간미였다.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가야만 옳는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이와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들과의 어울림이 꾸밈없이 좋아서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했다.
이런 시간이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조반을 먹은 김삿갓은 주모에게 물었다.
"오늘은 길을 떠나야 하겠소. 술값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 "
그러자 주모는 몹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돈을 안 받았으면 좋겠지만, 살림이 워낙 군색해서 전혀 안 받을 수는 없는 일이고 ...."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궁리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열 냥만 주세요."
김삿갓은 술값이 너무도 헐한 데 깜짝 놀랐다.
"에엣 ? ..열 냥이라뇨 ? 둘이서 사흘 동안이나 먹고 자면서 술을 연달아 퍼마셨는데, 열 냥은 너무 헐하지 않소 ? 게다가 씨암탉 값도 있는데 ..."
그러자 백수 건달이 중간에 끼어든다.
"삿갓 선생 ! 주모의 말대로 열 냥만 주시오. 인생은 인정으로 살아가야 할 일이지, 돈으로 셈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이예요. 열 냥이면 본전은 될 거요.
삿갓 선생같이 좋은 분을 우리가 언제 또 만날수 있겠소."
지난번에는 닭 한마리를 잡아주고 대 여섯 마리 값을 받으라고 부추겼던 백수 건달이었건만,
이제는 술 값을 체감해 주려고 애쓴다.
"내가 가진 돈은 어차피 며칠 못 가서 죄다 없어질 돈이오. 그러니까 열닷 냥만 받으시오."
김삿갓이 주모의 손에 돈을 억지로 쥐어주고 "만만"집을 나서자,
백수 건달과 주모는 문밖 까지 따라 나오며 ,
" 이제 , 다시는 만나기 어렵겠지요 ?" 하고 이별을 아쉬워한다.
김삿갓은 대답 대신 시 한 구절을 읊어 보였다.
오늘 아침에 한번 헤어지면
어디서 다시 만날수 있으리오.
후일 천국에서나 만납시다.
今朝 一別後 (금조 일별후)
何處 更相逢 (하처 갱상봉)
後天國之相逢 (후천국지상봉)
김삿갓,
비록, 오늘 아침에 두 사람과의 이별은 슬프지만, 마음만은 더할 나위없이 흐뭇 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65)
*벽제관에서 옛 일을 회상하며 만난 선풍 도인 (仙風道人)
북쪽으로 북쪽으로만 길을 가던 김삿갓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길을 가던 초립 동이를 보고 물었다.
"날이 저물어 어디선가 자고 가야 하겠는데, 이 부근에 절이나 서당 같은 것이 없느냐 ? "
"절이나 서당은 없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벽제관(碧蹄館)에 주막이 있어요."
김삿갓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래 ? 그럼 여기가 바로 벽제관이란 말이냐 ? "
이곳이 벽제관이라는 소리에,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 당시의 고사(古事)가 떠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질풍 노도와 같이 진격해 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 대왕은 의주(義州) 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눈 앞에 압록강을 건너면 명 나라 땅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때는 이미, 한음 이덕형이 명 나라로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명 나라 조정의 분위기를 감지한 한음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 나라 황제가 선뜻 원군을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 정녕 우리 조선을 구원해 주실 수 없단 말씀입니까 ? "
한음은 담판을 시작했다.
"그렇소 . 조선에 원군을 보낼수 없소."
명 나라 황제는 손 조차 내 저으며 거절을 했다.
"우리 조선과 명 나라는 오랜 형제지국 입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모른 척하시다니오."
"조선국 사신은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마시오."
황제가 냉정하게 잘라서 말을했다.
"음 ...."
그러자 한음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은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는수 밖에 없겠사옵니다."
"잘 생각했소. 스스로 싸워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오."
황제는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폐하. 그 길이 어떤 길인 줄 아시옵니까 ? "
협박하는 어조로 한음이 말했다.
"내가 알 리 있겠소 ? 그래, 어떤 방법이오 ? "
명 나라 황제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우리 조선이 목숨을 보존하는 길은 왜적 앞에 나아가 항복하는 길뿐이옵니다."
한음은 황제를 은근히 협박했다.
"으흠, 그런 방법도 있겠구료."
황제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였다.
"우리 조선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게되면 그들의 길잡이가 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야, 뻔한 일이 아니겠소 ? "
"그리고 왜군은 우리를 길잡이 삼아, 이 명 나라로 진군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폐하 ! ..."
"뭐라구 ? "
명 나라 황제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호통을 쳤다.
"조선이 길잡이가 되어 우리 명 나라를 친다고 ? 감히 누구를 협박하느냐 !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
그러나 한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침착한 모습으로 황제를 설득했다.
"폐하, 소신을 처단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신이 이곳에서 기한 내에
돌아가지 않으면 소신의 임금께서 부득불 왜군 앞에 나아가 항복하시게 될것 이옵니다."
" 아니 저놈이 아직도 내 앞에서 함부로 지껄이고 있구나."
"폐하. 고정하시고 소신의 말을 더 들어 주소서. 소신의 임금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면, 오래도록 형제국으로 지낸 두 나라는 의리를 저버리게 됩니다.
폐하, 이같은 크나큰 수치를 역사에 남기지 마소서."
"무엇이 ?"
명 나라 황제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폐하, 바라옵건데 그런 불행이 없도록 통촉해 주시옵소서 !"
한음 이덕형은 이같이 고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자 배석해 있던 명 나라 신하가 말하는데,
"폐하, 조선국 사신의 목숨을 내건 충절이 갸륵하옵니다. 그의 말 대로 조선의 군사를 길잡이로
왜군이 쳐들어 온다면 우리 명 나라도 시끄러울 것 입니다. 하오니 통촉하시어 조선국에 원군을 보냄이 타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신하들도 이구 동성으로 아뢰는데,
"원군을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사는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했는데, 벽제관에서만은 왜군에게 크게 참패하였다.
승승 장구하던 이여송은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한번 혼이 나자, 멀찍이 송도까지 퇴각하여 다시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전국(戰局)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왜군을 압박하여 무찔러야 할 판인데, 이여송은 이 핑게 저 핑게로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때 이여송의 접대관은 지혜롭기로 유명한, 명 나라에서 돌아온 한음 (漢陰) 이덕형(李德馨) 이었다.
이덕형은 이여송에게 속히 싸워 주기를 여러 차례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갖은 핑게를 대며 좀처럼 왜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간청해 보다 못해, 나중에는 화가 동하여 이여송의 방에 있는 적벽도(赤壁圖) 병풍에
아래와 같은 시 한수를 써갈겼다.
승부란 한판의 바둑과도 같은 것
전쟁은 꾸물거림을 가장 꺼리오
알쾌라 적벽 싸움 전에 없던 공적은 손 장군이 책상을 찍던 그때부터요.
그 옛날 중국 삼국시대에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위왕(魏王) 조조(曺操)에게 크게 패한후, 부하 장졸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모두가 조조에게 항복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모사 주유(周瑜)와 노숙(魯肅)만은 끝까지 싸울 것을 고집 하였다.
이에 손권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책상을 찍으며, 최후의 선언을 했다.
"우리는 옥쇄(玉碎)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자."
그리하여 손권은 그 유명한 적벽 대전에서 조조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적벽도가 그려진 병풍에 한음이 휘갈겨 쓴 시의 뜻을 이여송이 모를리가 없었다.
이여송은 이덕형의 시를 보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왜군을 상대로 진격을 하게 되었고, 전황은 조명 연합군의 우위로 왜군을 점점 쇠퇴시켜 결국은 퇴각 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김삿갓은 그 옛날, 이같은 한음의 훌륭한 시 한 편이 임진왜란으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벽제관으로 와서 어느 주막에 숙소를 정했다.
그 주막에는 70을 넘었다는 노인이 한 분 있었다. 하얀 구렛나루 수염이 배꼽에 닿을 정도로 탐스러워, 얼른 보기에도 선풍 도인 (仙風道人)의 노인 이었다.
김삿갓은 저녁을 먹고 , 그 노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젊은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노인에게 인사를 올리며,
"저는 지금 한양에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한양에는 오늘 아침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한양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그러나 노인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양이 워낙 복잡한 곳이라, 괴상한 일이 생길 만도 하지."
괴상한 일이라는 것이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지는 묻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자기가 앞질러 물어 볼수 밖에 없었다.
"한양에 어떤 괴상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 "
젊은이는 김삿갓에게 대답 하는데, "한양의 진산인 남산이 오늘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오."
"뭐요 ? 남산이 무너지다뇨.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
김삿갓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주인 노인은 놀라기는 커녕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꺼야. 남산은 수 천년이나 오래된 산이니까. 무너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지."
김삿갓은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노인장 ! 남산이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 아무리 오래 되었기로 산이 무너지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 "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기는 자네 말도 옳아. 산은 머리가 뾰족하고 밑은 넓적한데 다가, 바위와 바위들이 서로 얽혀
있어서, 좀처럼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이야."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노인장께서는 이 말도 옳다, 저 말도 옳다 ...
도무지 줏대라고는 찾아 볼수 없으니, 도데체 그런 애매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
"허허허 ... 자네 말도 역시 옳으이 ! "
주인 노인이 너털 웃음을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바로 그때, 젊은이 하나가 또 들어와 노인에게 인사를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별 일도 다 있습니다."
노인은 인사를 받으며 묻는다.
"무엇을 보았기에 별 일이라 하는가 ?"
"저는 오늘 , 소가 쥐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별 일이라 하는것 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소가 쥐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구 ? ...음 , 그럴 수도 있겠지. 소란 놈이 워낙 우직해서, 비록 작은 쥐 구멍이라 하여도 우격 다짐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거야."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다.
김삿갓은 처음에는 주인 노인이 나이가 많아서 노망 하는구나 생각 했는데, 대꾸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노망은 아닌 것 같았다.
"노인 어른 ! 아무리 소가 우직하기로 서니, 어떻게 쥐 구멍으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니옵니까 ? " 하고 정면으로 따지고 들었다.
노인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한다.
"허기는 자네 말도 옳아. 소란 놈은 좌우에 뿔이 있어, 쥐 구멍으로 파고 들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야."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아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여보시오, 영감님은 언사가 왜 이다지도 분명치가 못하시오. 된 소리 안 된소리 모조리 옳다고
하시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 "
그러자 노인은 여전히 태연 자약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 이었다.
"허기는 자네 말이 옳아 ! 된 소리 안 된 소리, 모조리 옳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지."
그러자 옆에 있던 두 젊은이가 별안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김삿갓을 이렇게 나무란다.
"하하하 ... 노형은 왜 이렇게도 화를 잘 내시오. 우리 두 사람은 지난날 화를 잘 내어 손해를 본 일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저녁마다 선생님을 찾아와서 정신 수양을 받는 중이라오.
노형도 화를 잘 내는 것을 보니 , 우리들과 함께 선생님한테 정신 수양을 받는 것이 좋을것 같소."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앗차 ! 내가 너무도 경망스러웠구나.") 싶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황희(黃喜) 정승의 옛이야기가 불현듯 떠 올랐다.
이씨 조선 초기,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대왕의 3대 임금 시대에 정승 벼슬을 40여 년간 지낸 만고의 명신 , 황희 정승은 8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를 내 본 일이 한번도 없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하루는 두 명의 종년들이 서로 다투다가 한 아이가 황희 정승에게 달려와,
"대감마님 ! 저년이 이러 저러 하니, 저런 나쁜년이 어디 있사옵니까 ? " 하고 고자질을 하자 황희 정승은,
"그래 네 말이 옳다 ! "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쪽 종년이 달려와서,
"대감마님 ! 저년이 이러 저러하니, 저년이 나쁘옵니다."
황희 정승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 네 말이 옳다 ! "
그러자 옆에 있던 마누라가 그 광경을 보고,
"대감은 이 아이 말도 옳다, 저 아이 말도 옳다 하시니, 세상에 그런 말씀이 어디 있사옵니까 ?"
하고 나무라자, 황희 정승은 마누라에 대해서도 역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마누라의 말씀도 옳소이다."
김삿갓은 오래전 어느 야사(野史) 책에서 황희 정승의 일화를 읽어 보고 크게 감동했던 일이 있었다.
종년들의 다툼이 옳으면 얼마나 옳으며, 그릇되면 얼마나 그를 것인가 ?
별 것도 아닌 다툼이기에 황희 정승은 저마다 옳다고 말해 버렸으리라.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황희 정승의 도량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앉아 있는 주막집 노인은 황희 정승과 똑같은 도량을 보여주고 있으니, 김삿갓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노인 앞에 무릅을 꿇고 머리를 정중히 수그려 보이며, 솔직하게 사과 하였다.
"제가 불민한 탓으로, 어른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경망되이 행한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노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 이내 웃으면서 말을한다.
"무슨 소리 ! .. 나는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어떤 일에나 시비를 가리지 않기로 했네.
주책없는 늙은이라고 비웃을지는 모르지만, 그게 바로 마음을 편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비결이거든."
김삿갓은 노인의 말에 또 한번 감탄해 마지 않았다.
"노인장 같은 어른을 만나 뵙게 된 것이 다시없는 기쁨이옵니다."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으며, "보잘것 없는 늙은이한테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하기에 나는 한평생 둥글둥글 살아오고 있을 뿐인걸 ! "
김삿갓은 노인의 겸허한 인사에 또 한번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른, 노인의 생각을 물었다.
"그러면 매사를 그렇듯 지내시다 보면, 남들에게는 줏대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 "
그러자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만사개유정 (萬事皆有定 : 세상 만사는 모두가 정해진 이치대로 흘러 가는 것)인걸..
그런데도 가엾은 인생은 부질없이 바쁘게 돌아 간다네. (浮生空自忙 :부생공자망)
따라서 사람들은 생년불만백 (生年不滿百 : 백년도 다 못 사는 주제에), 상회천세우(常懷 千歲憂 :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하는 것이 아니겠나 ! "
김삿갓은 노인의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말을 하였다.
"어른의 말씀이 정녕 명답 올씨다 ! "
주막집 노인과 밤 늦도록 세상사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김삿갓은 다음날 아침,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임진나루를 향해 발길을 부지런히 옮겼다.
방랑시인 김삿갓 (66)
*장단에서 황진이(黃眞伊)를 회상하며..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김삿갓이 임진나루를 건너, 얼마를 더가니 장단(長湍,) 땅에 이르렀다.
이곳은 송도의 삼절(三絶)로 불려오는 기생 황진이 (黃眞伊)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당시 송도 사람들은 황진이와 함께, 성리학자 서경덕과 박연폭포를 송도 삼절로 불렀다.
김삿갓은 황진이는 비록 기생이기는 했을망정,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분야에서 여성 존재를 길이
역사에 남긴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이처럼 뛰어난 여성이었기에, 김삿갓은 황진이의 무덤만은 꼭 참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전에 많은 남성들을 희롱해 온 일이 무척 후회가 된 임종 직전의 황진이가,
"내가 죽거든 많은 사람들이 나의 백골을 마음대로 밟고 다닐수 있도록 길가에 묻어 달라." 고 했던
황진이의 무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진이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그림도 잘 그리는 "만능 여인" 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시를 짓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건곤 할 제 쉬어 간들 어떠리.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는 님의 情이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변할손가
綠水도 靑山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이렇듯 황진이는 언문 시조에도 능했지만, 한시에 있어서도 많은 명작을 남겼다.
가령 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을 보고선 ,
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찍어 내어
직녀에게 얼레빗을 만들어 주었던 고
그리운 견우님 떠나가신 뒤
서러워 허공에 던져 버렸네.
誰斷崑山玉 ( 수단곤산옥)
裁成織女梳 ( 재성직녀소)
牽牛離別後 ( 견우이별후)
愁랑碧空虛 ( 수랑벽공허)
김삿갓은 삼일 동안 장단 땅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황진이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황진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김삿갓은 마침내 황진이 무덤을 찾는 것을 단념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얼마후 산속에 있는 어느 주막에 들려 술을 마시며 주모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이 부근에 혹시 황진이라는 기생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 "
"아이참, 손님은 별 말씀을 다 물어 보시네. 내 조상의 무덤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판인데 그까짓 기생년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누가 알겠어요."
김삿갓은 황진이 무덤을 찾아 제사지내 줄 것을 깨끗이 단념하고 혼자 술을 마시는 수 밖에 없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자니 오늘따라 처량한 기분이었다.
황진이 무덤을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산골짜기에는 매화 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개울가의 버드나무 숲속에서 꾀꼴새가 영걸스럽게 울고 있었다.
김삿갓의 눈에는 이런 풍경 모두가 마치 황진이의 환상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황진이를 생각하는 시가 한수 읊조려 나왔다.
술을 들며 노래하고 싶어도 옛사람은 없고
꾀꼴새 울음소리만 마음을 괴롭히네
강 건너 버들가지는 마냥 싱그럽고
산골짜기 매화만 봄 향기를 풍기노니.
對酒欲歌無故人 ( 대주욕가 무고인)
一聲黃鳥獨傷神 ( 일성황조 독상신)
過江柳絮晴獨雷 ( 과강유서 청독뇌)
入峽梅花香如春 ( 입협매화 향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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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67)
*개풍군수 강호동의 마부(馬夫) 살리기.
장단을 떠나온 김삿갓은 개풍(開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밤 김삿갓은 어느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서당의 훈장의 이름은 이윤성(李允成)이었는데, 인물이 풍채도 좋았지만 선량해 보이는 선비였다.
그런데 훈장은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김삿갓과 마주 앉아서도 연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런 광경을 보다못해 이렇게 물어 보았다.
"훈장께서는 어떤 걱정꺼리가 있기에 이렇듯 한숨을 쉬고 계시오 ? "
그러자 훈장은 몇 번의 한숨을 더 쉬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오십 평생에 남에게 못할 짓은 안하고 살아 왔는데, 오늘은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람을 죽이다니요 ? 그게 무슨 말씀이오 ? "
"알고 보면 기가 막힌 일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군요."
그러자 훈장을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을 하였다.
훈장은 신경통이 있어, 낮에 지팡이를 짚고 쩔룩 거리며 이웃 마을 주부(主簿: 의원)에게 침을 맞으러 가는 중에, 나이가 연만한 장년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엇에 쫒기는지 헐레 벌떡 뛰어와, "지금,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칼을 들고 쫒아오고 있으니, 그 놈이 나의 행방을 묻거든 모른다고 대답해 주시오." 하면서 숲속으로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잠시 후, 과연 험상궂게 생긴 젊은 놈이 손에 시퍼런 장도(長刀)를 들고 나타나,
훈장의 가슴에 벼락같이 칼을 들이대며, "지금 이리로 도망하는 자를 보았지 ?
그놈이 어디로 도망했느냐.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하였다는 것이다."
너무나 엉겹결에 당한 일이라, 훈장은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러면서, 죽지 않으려고 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을 든 자가 훈장의 말을 듣고 숲속으로 쫒아 들어 갔는데, 잠시후에 숲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온 것을 보면, 도망간 사람이 칼을 들고 쫒던 흉악한 젊은 놈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훈장이 자책을 하는데,
"내가 오늘 그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것은 내가 사람을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훈장이 괴로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죄 없는 사람을 자기가 죽인 것 같은 심정이 될것 이다.
이렇듯 생각이 된 김삿갓은 잠시후 훈장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 사람을 살려줄 방도가 전혀 없지도 않았을 것인데, 워낙 다급했던 관계로 그런 실수가 있으셨군요."
그러자 훈장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선생 같으면 그 사람을 살려 줄 방도가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 "
김삿갓은 훈장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글쎄올씨다. 선생이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면, 칼을 든 젊은 놈이 나타나 도망치던 사람의 행방을 묻기전에, 선생이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화를 면할수 있지 않았을까요 ? ..설마하니 장님에게 도망간 사람을 보았냐고 묻지는 않았을 것이니까요."
"옛 ? 장님 행세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요 ? "
훈장은 김삿갓의 절묘한 계교를 듣자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아뿔싸 ! 선생 말씀대로 그때,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했더라면 ..아 아, 그 사람을 살릴수 있었을텐데.. 내가 워낙 멍청해서 두 눈을 뻔히 뜨고도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이런 기가막힌 실수가 어디있단 말이오! "하면서 새삼스레 괴로워 한다.
김삿갓은 민망한 생각이 들어 이제는 훈장을 위로해 주어야할 판이었다.
"선생이 도망가던 사람에게 원한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잘 잘못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으니 마음이 괴로운 것이지요. 선생 말씀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을 살릴수 있는 방법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나저나 선생은 어쩌면 그처럼 죽을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절묘한 생각을 해내셨소 ? "
훈장은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덥석 움켜 잡으며
아래와 같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 ! 내 조카 아이가 꼭 죽게 되었는데, 선생이 어떤 방도로 그 아이를 살릴수 있겠는지 말씀 좀 해 주십시요. 선생이라면 그 아이를 살려 주실 수 있을 것 이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훈장의 이같은 말을 들은 김삿갓은 어리둥절 하였다.
"저는 의원이 아니올시다. 병으로 죽게 된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살릴 수 있겠습니까 ? "
그러자 훈장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나는 병으로 죽게 된 사람을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고, 이 고을 사또에게 미움을 사서 죽게 된
내 조카 아이를 살려 달라는 말씀입니다. 선생 같은 분이라면, 곧 죽게 되어 있는 내 조카를 충분히 살려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또에게 미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니요 ? 세상에 아무리 사또의 세도가 좋기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야 있겠습니까 ? "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릴테니, 제 말씀을 좀 들어 보세요."
그러면서 훈장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었다.
훈장의 조카, 무송(武松)이는 개풍 군수 강호동(姜浩童)의 마부로 있는 사람이다.
강 사또는 워낙 성질이 불 같이 사납고 기골이 장대한 인물로써 말(馬)을 유난히 좋아 하였다.
이곳 개풍 군수로 부임해 올 때 조차, 한양에서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를 끌고 왔을 정도인데,
무송이는 그 말을 양육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무송이가 잘 못 하는 바람에 그 말이 죽고 말았다. 이에 강 사또는 노발 대발하며
무송이를 그날로 옥에 가두고, 수 일 안에 사형에 처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훈장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또가 아무리 세도 등등한 벼슬 자리이기로, 말 한 필 죽인 책임을 물어,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누가 아니라오. 그러나 강 사또는 워낙 감때사나운 사람이라, 그냥 내버려두면 내 조카놈은 죽음을 면키는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까 선생이 제갈공명 같은 꾀를 쓰셔서, 내 조카놈을 꼭 좀 살려 주소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그러나 한낱 걸객 시인에 불과한 김삿갓으로서는 무송이가 죽지 않토록 힘쓸수가 있으랴 ..
김삿갓은 훈장의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섯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 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그래서 전, 후의 사정을 알아야 하겠기에 훈장에게 물었다.
"도데체 강 사또라는 사람은 누구의 힘으로 사또가 된 사람입니까 ? "
그러자 훈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한다.
"글쎄 올씨다. 강 사또가 누구의 천거를 받아 사또가 되었는지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알 길이 없지요. 다만, 강 사또의 할머니가 안동 김씨라는 말은 있더군요."
김삿갓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곳까지 미쳤는가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 사또가 안동 김씨의 힘을 빌어 사또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입니까 ?"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지요. 그러나 옛 말에 발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것 같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내가 내일 읍내로 들어가 강 사또를 한번 만나 보지요. 그렇다고 죽을 사람을 살려 낼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니올시다. 선생이 내 조카를 꼭 살려 주시리라 믿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은 이날 밤 서당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다음날 아침 개풍 군수를 만나 보려고 읍내로 떠났다.
죽게 된 사람을 살려 낼 방법이 있어서 사또를 만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죄가 가벼운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려면 사또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들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석양 무렵에 개풍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동헌 정문을 지키는 두 명의 군관 사령은 가까이 다가오는 김삿갓을 향하여 호령을 친다.
"이 거지같은 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접근해 오느냐, 당장 꺼져 버리거라 ! "
그러나 김삿갓은 태연하게 버티고 서서, 군관 사령에게 이렇게 말을했다.
"이 사람들아 ! 어따대고 큰 소리를 치는가? 자네들은 속히 사또에게 한양에서 안동 김씨가 되는 사람이 찾아 왔노라고 고하라! 그러면 사또가 반갑게 맞을 것이네. "
그러자 군관 사령이 저희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어쩔줄을 몰라한다.
김삿갓은 이때다 싶어, 한번 더 호령하였다.
"어 허 !, 내 말을 사또에게 속히 전하지 못하고 무엇을 꾸물거리고 있는가 !"
높은 양반을 모시는 아랫것들은 약자(弱者)에게는 강해도, 강자(强者)에게는 약한 법이다.
김삿갓이 이렇듯 호령을 치자, 군관 사령들은 금시, 모가지가 자라목이 되며,
"네 네, 알겠습니다. 한양에서 내려 오신, 안동 김씨라는 어른이 오셨다고 사또 전에 여쭙고 오겠습니다."
군관 사령 하나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 가더니, 잠시후 사또가 황급한 걸음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사또는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더니 금새 발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다가오는데,
그의 얼굴에는 김삿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이 보였다.
"어디서 온 사람인가 ?"
사람은 아주 우습게 보는 말투였다.
김삿갓은 ( 이게 아니다 싶어) 본의 아니게 또 다시 큰소리를 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하옥(荷屋) 대감의 밀명을 받고, 관서 지방으로 민정 시찰을 나온 사람이오.
이름은 "병(炳)"자 돌림을 쓰오."
하옥 대감이란 안동 김씨의 총수인 김좌근(金左根) 대감의 속칭이었다.
강 사또는 "하옥 대감" 이라는 말을 듣고 경풍 하듯 놀라더니, 김삿갓에게 대뜸 머리를 정중히 수구리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귀하신 몸으로 이렇듯 어려운 걸음을 해주시니, 저희 고을로썬, 다시 없는 영광이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강 사또는 앞장서서 김삿갓을 객사(客舍)로 정중히 안내해 들어오더니, 육방 관속을 모조리 불러다가 인사를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옥 대감의 특명으로 비밀리에 민정을 살피러 다니는 몸이오.
따라서 나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은 삼가 하시기 바라오."
암행어사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은연중에 그런 암시를 해보였다.
그러자 사또는 더욱 굽신 거리며,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잡인들은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 날 저녁, 사또의 대접은 융숭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김삿갓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저의 조모님과 하옥 대감은 팔촌 남매간이옵니다. 제가 개풍목(牧)으로 오게 된 것은 하옥 대감의 덕택입지요." 하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실토하였다.
훈장을 비롯해, 개풍군 백성들간에 떠도는 소문은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어제 이곳 개풍 고을 여기 저기 다녀 보았는데, 사또의 마부가 말을 죽인 죄로 머지않아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
김삿갓이 이렇게 묻자, 강 사또는 머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한다.
"제 수하에 무송이라는 마부놈이 있사온데 , 그 놈은 성질이 매우 포악한 놈이옵니다.
얼마전에는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말을 고의로 죽여 없앴기에, 만 백성들에게 사또의 권위를 보여 주려고, 지금 하옥을 시켜 놓고 있는 중이옵니다."
"음 ..사또가 아끼는 말을 고의로 죽였다구요? .... 그런 괘씸한 놈이 어디 있단 말이오."
김삿갓은 사또를 두둔하며 분개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자 김삿갓의 눈치를 살피던 사또가 안심하며 말을 하는데,
"사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옵니다. 목숨이 아까운 점으로 보아서는 살려두고 싶으나 일벌 백계 (一罰百戒)를 위해 사형에 처할 생각이옵니다."
김삿갓은 다시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사또! 그 마부란 놈은 세가지 중죄를 범한 셈이요. 그놈의 죄질은 사형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오."
사또는 너무도 뜻밖의 말에 ,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놈은 말을 죽였을 뿐이온데, 세 가지 중죄를 범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말 한 필을 죽인 것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외에 두 가지 죄를 더 짓게 되었는데, 그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중죄(重罪)인 것이오."
강 사또는 김삿갓의 말을 들을수록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두 가지 죄란 어떤 죄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 "
"거듭 말하거나와, 말 한 필 죽인 것이야 무슨 중죄라고 할수 있겠소. 그러나 말을 죽임으로써 사또로 하여금 살인죄를 범하게 하였으니, 그 어찌 중죄라 아니할 수가 있겠소 ? "
사또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에엣 ? .. 사또인 저로 하여금 살인죄를 범하게 하였다고요 ? "
"그렇소이다 ... 말을 죽이지 않았던들, 사또가 그놈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오.
그러니 사또로 하여금 살인죄를 범하게 한 장본인은 마부놈이 아니고 누구겠소이까 ? "
이에 강 사또는 크게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현명하신 어른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저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또께서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으셨다면 , 그 사건을 너무 소홀하게 다룬 감이 없지 않구료.
게다가 그 마부란 놈이 사형을 당하면, 사또에게 또 하나의 중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요."
"도대체 또 하나의 죄란 무엇인뎁쇼 ?"
강 사또는 안색이 시시 각각 창백해지며 김삿갓의 말에 기가질려 버린듯 말소리 조차 떨고 있었다.
김삿갓은 강 사또에게 귀띔이라도 해주듯 나지막한 소리로 은밀히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만약 사또께서 수하로 부리는 마부가 말 한필을 죽게 하였다고, 죄를 물어 그를 죽였다고하면, 그 소문이 멀지않아 전국 각지에 퍼져 나갈 것이 아니겠소 ? "
"글쎄올시다. 그놈을 죽이면 그런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될까요? "
"물론이지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소이까 ?
더구나 나쁜 소문일 수록 빨리 퍼지는 법이라오."
강 사또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면서,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 "
"그야 뻔한 일이 아니오 ? ( 개풍군수 아무개는 백성의 목숨을 말의 목숨보다도 가볍게 여긴다)는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은 틀림이 없지요. 그리고 그런 소문이 상감 마마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날이면 그때는 사또도 무사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강 사또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김삿갓의 손을 덥썩 움켜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그러면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 어르신께서 슬기로운 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글쎄올시다. 워낙 중차대한 사건이어서, 나로서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료."
김삿갓은 의도적으로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듯 보이다가,
"결자 해지(結者解之:엮은 사람이 푼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할 방도는 오직 사또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강 사또는 결심이 선 듯,
"마부 무송이 놈을 죽이지 않고 풀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 "
"그야 풀어 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사또의 위신이 온존 하겠소 ? "
"어르신 말씀 하신대로,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내일 아침 풀어 주는 것이 저의 위신보다 중 할 것 같습니다."
"사또의 말씀대로 하시오."
"그런데 마부놈은 풀어 주는데, 어르신께 특별히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 "
"어르신께서 한양에 가시더라도, 이번 일에 대해서 하옥 대감께는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김삿갓은 즉석에서 파안 대소하였다.
"하하하, 강 사또는 하옥 대감께서 천거한 사람이 아니오. 이런 일을 어찌 하옥 대감께 보고할 것이오. 그런 걱정은 마시고 ,모든 것을 원만히 해결할 대책을 찾았으니, 이제는 술이나 유쾌하게 마십시다."
김삿갓은 얼굴조차 모르는 무송이라는 마부를 살려주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뻐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사또가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통음하였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길을 떠나려고 하자, 강 사또는 며칠만 더 지내다 가시라고 하며, 김삿갓을 한사코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마지못해 사흘 동안이나 강 사또로 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다가 나흘째 되는 날 길을 떠나려고 하자, 강 사또는 멀리까지 배웅을 따라 나오며 말한다.
"송도로 가시는 길에 , 송도 팔경의 하나로 유명한 진봉산(進鳳山) 철쭉꽃을 꼭 구경하고 가시옵소서. 일찌기 고려 시인 변계량(卞季良)은 진봉산 철쭉꽃을 구경하며 유명한 시를 읊은 일도 있사옵니다."
김삿갓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진봉산 철쭉꽃이 그렇게도 유명하다니 , 꼭 들려서 구경하고 가오리다."
그러자 강 사또가 변계량의 시를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오솔길은 멀리 산봉우리로 비껴있고
흰 구름은 땅에 내려 승가를 덮었구나
산 속의 옛 절들은 모두가 비슷한데
철쭉꽃은 봄바람에 간 곳마다 달리 피어있네.
방랑시인 김삿갓 (68)
*개성 사람들의 두문동 정신.(두문 불출..杜門不出..의 어원)과 선죽교 참배.. "상편"
김삿갓은 진봉산으로 철쭉꽃을 찾아 떠났다.
과연, 진봉산 철쭉은 변계량이 읊은 시 처럼 천하에 절경이었다.
제법 험한 산 전체에 철쭉꽃이 얼마나 많이 피어 있는지,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산 전체가 훨훨 불타 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가까이 와 볼수록 더욱 놀라왔다.
철쭉꽃은 진달래꽃과 비슷하면서도 취향은 크게 달랐다.
진달래 꽃의 빛깔은 청초한 연보랏빛이어서 순결 무구한 숫처녀를 연상하게 하지만, 철쭉꽃은 꽃송이 자체도 풍만하려니와 빛깔도 농염하기 짝이 없어, 진달래 꽃과 견주어 보건데,
한창 무르익은 삼십대 여성의 육체가 연상되기에 충분하였다.
진봉산에 피어 있는 꽃은 오직 진달래와 철쭉 뿐이었다.
진달래 꽃이 한물 가자, 철쭉꽃이 때를 만난 듯이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김삿갓은 마치 옷을 벗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 여체를 어루만지듯 철쭉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가 읊조려졌다.
지난 밤 봄바람이 동방에 불어 들어 비단 이부자리 곱게 깔아 놓았소
이 꽃이 피는 곳에 새도 울고 있어 그윽한 그 자태 더욱 애를 끊노니
진봉산 철쭉에 넋이 나간 김삿갓,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한 발길을 옮기다 보니,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이 멀리 바라보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5백년 옛 도읍지를 이제야 보게 되었구나 하며 감개가 무량해 왔다.
송악산 기슭에는 수목이 무성하였다.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걸어가며 송악산 높은 봉우리를 올려보며, 문득 고려조 충신이었던 야은 길재(吉再)의 옛 시조가 머리에 떠올랐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성계는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백성의 추앙을 받던, 정신적 지도자인 세 사람을 회유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켜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쪽 같은 절개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후일 조선조 3대 태종대왕)이 주석(酒席)에서 포은 정몽주의 심경을 아래와 같은 시(詩)로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다.
그러자 정몽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안군의 교묘한 회유를 일도 양단(一刀 兩斷)의 절개로 응수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쪽같은 정몽주의 일편 단심의 표현은 야망을 꿈꾸고 있는 정안군과 그의 추종세력에게는 전혀, 받아 들일수 없는 것이었다.
주석이 파한 후, 포은 정몽주는 죽음을 예감하고, 말 안장에 거꾸로 앉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선죽교에 이르렀을때 맞따뜨린 조영규(趙英珪)의 철퇴에 맞아 숨을 거두었으니, 세상에 그런 충신이 어디 있으랴 생각되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개성 사람들, 아니 고려조에 충성해 오던 문신(文臣) 72명과 무신(武臣) 48명이 이성계가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새나라 인 조선 왕조를 창건하자, 그날로 만수산 두문동 골자기로 들어가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새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들의 항거에 크게 당황하여 온갖 회유책을 써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왕 이성계의 회유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에 크게 진노한 이성계는 만수산 사방에 불을 질러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을 질러 버리면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두문동에서 뛰쳐 나오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문동에 숨어 든 고려조의 망국 지사들은 만수산 전체가 큰 불덩이가 되었음에도 불에 쫒겨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杜門不出)
이로 인해 개성에는 두문동 정신 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고,이런 정신적 영향으로 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씨 조선 왕조에서는 인재(人材)를 등용할 때, 서북(西北)사람을 배척하게 되는 전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개성 사람들은 호구지책으로 장삿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흔히 "개성상인"이라고 하면
이익을 취하는데 영악함이 남달라서, 지금까지도 개성 사람들을 흔히, "깍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익에 영악한 개성 사람들이지만 신용이 알뜰하고 셈이 바르기론, 팔도를 두루 편답하더라도 개성 상인을 따를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죽음의 도시와 다름없는 개성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김삿갓은 문득 정몽주가 살해된 선죽교(善竹橋)를 찾아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죽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선죽교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 "
김삿갓이 지나가는 선비를 붙잡고 물어 보니, 사십쯤 되어 보이는 선비는 얼굴에 근엄한 빚을 띄며,
"포은 선생님이 운명하신 선죽교를 가시려고요 ?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라서 말만 듣고 찾으시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따라 오시오."
하며,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길잡이로 나서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이렇듯 외지에서 온 선죽교 참배객을 앞장서 인도하는 개성 사람들을 보건데,
정몽주 선생을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흠모하고 사랑하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선죽교에 당도하자 선비는 다리 앞에서 머리를 숙여 잠시 묵념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포은 선생께서는 이 다리 위에서 이방원의 하수인인 조영규라는 놈의 철퇴에 맞아 무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성스러운 피는 이 다리 돌 속에 깊숙이 물들어서 3백년이 지난 지금도 돌이 이렇게 붉습니다. 보십시요. 이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핏자국 입니다."
선비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선죽교 돌에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는 듯이 보였다.
김삿갓은 붉은 핏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무심한 돌도 충신의 피를 알아 보는 모양 입니다. 그러나 이 다리에는 충신을 기리는 비각(碑閣)이 없는 것은 웬일 입니까 ?"
그러자 선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나라에서는 포은 선생님의 지조 굳은 충성심이 두려워 간신히 비석 하나만이 있을뿐, 비각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누가 목숨을 걸고 비각을 세우려고 하겠소이까 ? "
선비는 선죽교에 비각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이렇게 말을이었다.
"조선 왕조가 되고 난 뒤에는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누구도 찬양하지 못한답니다.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모르는게 아니라 섣불리 찬양했다가는 목숨이 달아날까 무섭기 때문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석희박 이라는 무명 시인의 시가 한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시는 어떤 시옵니까 ? "
그러자 선비는 아래와 같은 시를 한 수 읊어 보였다.
산천은 옛 대로되 거리는 비어 있고
저녁놀 잠긴 곳에 물소리만 처량쿠나
홀로히 말 세우고 옛 자취를 찾아 보니
한 조각 비석에는 "정충문"만 남아 있네.
방랑시인 김삿갓 (69)
*선죽교 참배와 앉힘 술집 .. "하편"
망국의 설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처량한 시였다.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선죽교 위에서 선비가 읊은 시를 듣고, 문득 선비에게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선죽교를 다녀 갔을 터인데, 알려진 시가 고작 한 편밖에 없다니, 안타까운 일 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요 ? "
선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만약 한 수 읊어 주신다면, 저는 두고두고 마음속에 아로새겨 두겠습니다."
김삿갓은 잠시 시상에 잠겨 있다가 , 시를 한 수 읊었다.
옛 강산에 말 멈추니 시름이 새로운데
반천 년 왕업이 빈터만 남았구나
연기 어린 담장가에 까마귀 슬피 울고
낙엽지는 폐허에는 기러기만 날아가네.
故國江山立馬愁 (고국강산 입마수)
半千王業一空邱 (반천왕업 일공구)
煙生廢墻寒鴉夕 (연생폐장 한아석)
葉落荒臺白雁秋 (엽락황대 백안추)
돌로 된 짐승은 오래되어 말이 없고
구릿대는 쓰러져 머리를 숙였구나
둘러보아 유난히 가슴 아픈 곳은
선죽교 개울물이 흐름없이 흐느끼네.
石狗年深 難轉舌 (석구년심 난전설)
銅臺치滅 但垂頭 (동대치멸 단수두)
周觀別有 傷心處 (주관별유 상심처)
善竹橋川 咽不流 (선죽교천 연불유)
선비는 김삿갓의 시를 듣고 나더니, 김삿갓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 어린 어조로 말을 한다.
"선생 ! 저는 선생께서 시에 이처럼 능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선생 같은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은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 ..오늘,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 않고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하루에 한번씩 이곳 선죽교를 찾는 것을 일과로 삼는 사람입니다."
선비는 이같이 말을하며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선생과 같은 어른과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섭섭합니다. 마침 날도 저물어 오고 하니, 읍내로 들어가 "앉힘술집"에서 술이라도 한잔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 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술이라면 나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앉힘 술집이란 어떤 술집입니까 ?"
김삿갓은 술집 이름이 처음들어 보는 터이라 선비에게 물었다.
선비는 김삿갓과 함께 읍내로 걸으며 말한다.
"조선 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가자, 개성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벼슬길은 아예 외면을 하게되었고 모두가 장삿길로 나서게 된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이지만, 앉힘 술집이라는 명물 술집이 생겨나게 된 것도 그때부터의 일이었지요."
"나라가 바뀌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에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개성에만 있다는
앉힘 술집은 보통 술집과 어떻게 다른지 여간 궁굼하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성 사람들이 장사에 전념하다 보니 중국과의 거래가 빈번해져서, 남자들이 집을 오랫동안 비우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앉힘 술집이, 남편이 장사차 집을 비웠을때, 가정 부인이 부업삼아 간판을 내걸지 않고 알음 알음으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술을 파는 일종의 내밀 술집이지요.
그러기에 앉힘 술집에서는 술과 안주값을 얼마 달라고 직접 말하는 경우가 없어요. 얼마를 먹었든 간에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색이지요. 게다가 앉힘 술집은 술맛도 빗은 아낙의 솜씨에 따라 천차만별 이지만 맛이 매우 좋고요, 안주도 한번 다녀간 손님의 취향에 맞춰 주어, 기막히게 좋습니다."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출출해 오던 판인데, 안주가 기막히단 소리를 듣자, 입안에 침샘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술값을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니, 세상에 그처럼 인심 좋은 술집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아까부터 배가 출출하던 판이니, 어서 가십시다."
김삿갓은 선비를 재촉하여 술집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물어 보았다.
"술값을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게되면, 필시 얌체같은 손님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경우는 술집의 손해가 클텐데, 그래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 "
"개성 사람 중에는 그처럼 경우에 벗어나는 짓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우 바르기로는 개성 사람들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개성 사람들이라고 모두 성인 군자는 아닐 것이고.. 개중에 먹고 마신 술값을 적게 내미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것 아닙니까 ? "
김삿갓은 짐짓, 개성 사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선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주인은 적게 내민 술값이라도 아무 말 않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일을 한 사람이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하고, 슬며시 따돌려 버립니다."
선비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어느 골목 어귀에서 발을 멈추고,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집은 바로 저기 보이는 집입니다."
김삿갓이 선비가 가르키는 집을 보니, 여늬 여염집과 다름 없는 집이었다.
그 집앞에 이르러 선비가 대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안을 향하여 작은 소리로 주인을 불러댓다.
"아주머니 계시오 ? ... 나, 교동 생원이오. 오늘은 손님 한 분과 같이 왔소이다."
하고 말을하자, 주인 아낙네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알아 보는 듯이, 반갑게 나와 대문을 열어주며, "어서 오세요. 안방으로 드시죠." 하고 정중히 맞아들인다.
선비와 일행인 김삿갓을 안방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니, 선비는 이집에선 상객(上客)으로 대접 받는 것 같았다.
35,6세로 보이는 주인 아낙네는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있는 품이 어디로 보아도
현모 양처형의 가정 부인이었다.
"매우 깔끔한 인상의 저 여인이 이 집 안주인 입니까 ?"
"그렇습니다. 살림살이도 물샐틈 없이 잘하지만, 음식솜씨가 좋기로도 소문난 부인이지요."
김삿갓, 자리에 앉으며 문득 생각해 보니, 선죽교를 찾다 만난 이 선비와 아직 통성명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김삿갓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선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고보니, 아직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저는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김삿갓이라고 합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선비는 두 손을 설레설레 내저어 보이며 말한다.
"뜻에 맞는 사람끼리 술잔이나 나누다 헤어지면 그만이지, 구태여 통성명 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교동골에 살고 있으니, 교동 생원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교동 생원이라고 자칭한 선비는 끝내 본명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주인 아낙네가 주안상을 들여왔다.
그런데 커다란 소반위에 얹힌 것은, 보쌈 김치 두 보시기에 소주 한 주전자만 달랑 놓였을 뿐이었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게 바로 개성 명물인 앉힘 술집의 주안상이라는 겁니까 ?"
교동 생원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것은,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기에 지루할 터이니, 기다리는 동안 입놀림을 하라는 전주상(前酒床) 입니다. 진짜 요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나올 테니, 그동안에 심심 파적으로 소주로 목이나 축입시다."
손님이 요리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전주상을 내온다는 것은 처음 들어 보는 소리다.
그렇다면, 손님에 대한 이곳 개성 술집의 배려는 명물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보쌈김치를 안주삼아 소주 몇 잔을 나누고 있노라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 안주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나온 안주는 쇠고기 수육과 돼지 편육이었다.
김삿갓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많은 진수 성찬을 먹어 보았지만, 이날처럼 맛있는 쇠고기를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삶은 고기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앒게 저며져 있었고 크기 또한 적당해서 한 입에 먹기도 좋았지만, 입안에 넣으면 슬슬 녹아 버릴 정도로 기가막혔다."
"아니, 쇠고기를 어떻게 요리했기에 입 안에 넣기만 하면 슬슬 녹아 버리는 것입니까 ? "
김삿갓은 수육을 연방 집어 먹으며 칭찬의 소리를 하자, 교동 생원이 대답한다.
"개성은 워낙 요리를 잘하기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요리를 잘하기로 이렇게 까지 잘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나는 요리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수육은 푹 삶은 쇠고기덩이를 두레속에 담아 우물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할 만큼 베어낸후, 다시 끓는 물에 중탕을 해가지고 종잇장 처럼
고기결에 따라, 솜씨 있게 썰어 내온 것입니다."
"고기 맛이 이렇게 좋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긴, 정성을 그렇게 들였으니 고기 맛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쇠고기 수육도 좋지만 제육 편육도 자셔 보세요. 제육은 워낙 보쌈 김치에 싸서 먹어야 제 맛이 나는 법입니다."
김삿갓, 제육을 김치에 싸서 먹어 보니, 그것 역시 형용하기 어려운 별미였다.
(개성 보쌈 김치는 그 맛이 최고입니다.)
이렇게 술과 함께 맛있는 안주를 정신없이 먹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기름에 부친 전유어(煎油魚)가들어왔다.
상에는 먹다 남은 고기 안주를 거두어 내고, 기름에 갖튀긴 생선을 상위에 올려 놓았는데 , 생선을 한 입 베어물면, 입속에서 바삭하게 씹히는 맛이, 혀까지 목구멍으로 함께 넘어 가버릴
지경이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녹말에 부친 따듯한 파전이 나오고, 잠시 후에는 일정한 크기로 예쁘게 깍은 생율(生栗)이 나왔다.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만든 사람의 정성이 여간 알뜰할 수가 없었다.
술을 한바탕 마시고 나니, 조금전에 거두어 내간 수육에다 부침개까지 버무려 끓인, 매운탕이 나오는데, 고기와 전유어로 끈끈해진 입맛을 얼큰한 매운탕으로 개운하게 씻을수 있도록 주인 아낙이 배려한 것인데, 그런데 이맛 또한, 천하의 일미였다.
김삿갓은 술과 안주를 이처럼 맛있게 먹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교동 생원은 술을 마실 만큼 마시고 나더니, 정색을 하며 김삿갓에게 말을 한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다. 앉힘 술집은 보통 술집과 달라서 술을 다 마셨거든 곧장 일어나는 법입니다."
"알겠습니다. 내 일생에 오늘밤 처럼 맛나는 술과 안주를 먹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김삿갓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교동 생원은 주인을 부른다.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와서 아주 잘 먹었소이다. 값은 모두 얼마죠? "
"처분대로 해주십시요."
교동 생원이 이미 말한 대로, 주인 아낙네는 자기 입으로 술값을 말하지 않았다.
교동 생원은 얼마간의 돈을 내밀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돈을 넉넉히 드릴테니, 후일에 이 손님이 혼자 오시더라도 한 번 더 대접해 주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 집 음식이 선생의 입맛에 맞으시는 모양이라 미리 넉넉하게 돈을 맡겼으니, 혼자서라도 한번 더 들러, 술과 안주를 드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생원의 배려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윽고 거리로 나서니 밤은 깊어 가는데 거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교동 생원과 작별을 하고 밤거리를 혼자 걸어가며,
(나에게 술을 사준 교동 생원이라는 사람은 도데체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 ...) 하는 의혹이 자꾸 들었다.
하루에 한 번씩 선죽교를 찾아가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사람이 확실할 것인데, 그러나 더이상 그의 정체를 알수는 없었다.
그야 어찌되었던,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었기에, 김삿갓은 길가에 있는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후 계집아이가 나오더니 대문을 열어 볼 생각은 아니하고 대문 안에서 누구냐고만 묻는다.
"나는 길을 가던 나그네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으니 주인 아저씨께 그렇게
여쭈어라 ! "
그러자 계집아이는 대뜸,
"우리 집은 여인네만 사는 집이예요. 외간 남자를 들일수 없으니 다른 집으로 가보세요."
그 한마디를 매정하게 내뱉고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허허 ... 개성 인심 참 고약하다. 여인네만 사는 집이라면 남자 손님을 더욱 반갑게 맞아 들여야
옳을 일인데, 그 집 마누라는 음양의 이치도 모르는가 보구먼."
김삿갓은 혼잣말로 익살을 부려 보며, 이번에는 커다란 기와집 대문을 두드려 보았다.
이번에도 계집아이가 나오더니 대문안에서 누구냐고 묻더니 대뜸 말을 하는데,
"우리 집에는 손님을 재워 드릴 방이 없어요. 다른 집으로 가보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수 없이 한참을 걸어가다가 , 이번에는 조그만 초가집 대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 집 에서는 바깥 주인이 직접 나와 누구냐고 물어 보더니,
"우리 집에서는 장작이 떨어져서 방을 데워 드릴 수가 없으니 다른 집에 가보시오." 하며 엉뚱한 핑게를 대며 거절해 버리는 것이었다.
(거절하는 이유도 유만 부동이지, 뭣이? 장작이 떨어졌다고 ? 송악산 기슭에 살면서 장작이 떨어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야 !)
생각할 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워 주지 못하겠다는데, 싸울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김삿갓은 이곳 저곳, 잠 잘곳을 찾다가 어느 집 대문 앞에서는 "깜짝" 놀랐다.
웬 송아지 만큼 큰, 개 한 마리가 덤벼드는 바람에 몸을 피하다가 자칫, 발을 헛디딜 뻔 하였다.
("이크, 웬 개 새끼야 ! " ...)
순간, 김삿갓 등에 메고 있는 봇짐에서 둔탁한 쇳소리가 났다.
"쩔렁" ..
(웬 소리지 ?) ..
김삿갓이 메고 있던 봇짐을 풀어 보니, 그곳에는 꽤많은 엽전이 뀀줄에 꿰어 있었다.
(이게 왼 돈이냐 ? ... )
김삿갓, 곰곰히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봇짐을 풀어 본 때는 지난번 개풍에 들렸을때 뿐이므로
이 돈은 아마도 개풍 군수 강호동 사또가 전별금으로 몰래 넣어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허허 ..."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 "
김삿갓, 곤궁한 가운데 돈을 보니, 이제는 어엿한 주막으로 들어 하룻밤을 보낼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그네를 내쫒는 고약한 개성 인심에는 한마디 즉흥시가 없을수 없었다.
읍호가 개성인데 대문마다 왜 닫아 걸었으며
산 이름이 송악인데 장작이 없단 소리는 무슨 말 인가
저녁 손님 내 쫒는 인사가 세상에 어디 있노
아이고야 , 예절바른 나라에서 그대들 만은 상놈일세.
邑號開城 何閉 門 (읍호개성 하폐문)
山名宋嶽 豈無薪 (산명송악 기무신)
黃昏逐客 非人事 (황혼축객 비인사)
禮儀東方 子燭秦 (예의동방 자촉진)
방랑시인 김삿갓 (70)
*곽 노인이 말한 "팔도의 특성"
개성을 떠난 김삿갓이 예성강(禮成江) 물줄기를 따라 이틀쯤 거슬러 올라가니,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말씨도 다르거니와 얼굴조차 다르게 보였다.
(여기가 어딜까 ? )
사람들의 사투리가 정겹게 들려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기는 황해도 금천 땅이라오."
김삿갓은 이곳이 황해도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불현듯 복받쳐 오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가슴이 젖어왔다. 김삿갓은 어린시절,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7년을 살아 온 바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 금천에서 2백여리만 더 올라가면 곡산이 아니던가 ?
사투리가 정겹게 들린 이유가 이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의 지세는 멸악 산맥이 황해도를 동, 서로 갈라 놓고 있다.
서쪽은 바다가 가까운 관계로 연백 평야와 재령 평야 같은 들판이 많지만, 곡산이나 신계같은 곳은 서쪽으로는 멸악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에는 언진 산맥이 덮어 누르고 있는데다,
남쪽에서는 마식령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한낮에도 해를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험학한 산악 지대다.
선천군수 겸 병마 절도사를 지낸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어이없이 항복을 하자,
김삿갓의 어머니 이씨는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그 당시의 머슴이었던 김성수의 고향인
곡산으로 피신한 것도, 곡산이 그처럼 첩첩 산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김삿갓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러기에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곡산으로 오게된 김삿갓은 천진 난만하게 뛰놀며 글만 읽어 왔었다.
그것은 이미 30년 전의 일이었지만, 김삿갓의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에 김삿갓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어머니를 따라 양주, 광주, 평창, 영월,등지로 3년이
멀다 하게 이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지금도 누가,
"고향이 어디냐 ?" 하고 물어 본다면,
"내 고향은 황해도 곡산이라오."
하고 대답하고 싶을 정도로 곡산에 대한 추억이 너무도 많았다.
물론 황해도에서는 곡산 이외에도 보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았다.
해주(海州)와 구월산(九月山)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이끄는 곳은 역시, 곡산이었다.
(그렇다 ! 이번 겨울에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곡산에서 보내기로 하자 ! )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흥분이 일었다.
이렇게 황해도 금천으로 들어선 김삿갓은 첫날밤을 어느 서당에서 자게 되었다.
산골 훈장이라면 의례, 입성이 꾀죄죄하고, 언동도 옹졸한 법이다.
그러나 "선풍재(仙風齊)" 라고 하는 그 서당의 훈장은 구렛나루가 허연데다가 풍채가 유난히 좋아서, 마치 신선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채가 저렇게도 좋은 양반이 무슨 할 일이 없어, 이런 산중에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을까 ? )
이름이 곽호산 이라고 하는 훈장은 김삿갓과 수인사를 한 후, 묻는다.
"보아하니 귀공은 공부를 많이 하신 선비 같은데, 이런 산중에는 무슨일로 오셨소 ? "
"저는 워낙 역마성을 타고나서,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신다니, 그거 참 좋은 팔자시구료.
말만 들어도 귀공의 팔자가 부럽소이다."
"팔자가 기박해서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는데, 뭐가 부럽다는 말씀입니까 ? "
"그나 저나 선생은 본시 이 고장 어른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떤 사연이 계시기에 이런 산골에서 서당을 열고 계시옵니까? " 하고 김삿갓이 물어 보았다.
그러자 곽호산 훈장은 "허허".. 웃으며 말을 하는데,
"나는 본시 한양 사람이라오. 내 조부께서 벼슬을 지내시다가 이리로 귀양을 오게 되셨지요.
나는 삼 십년 전에 조부님을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산수가 하도 좋아, 조부님이 세상을 뜨신 뒤에도 이곳에 그냥 눌러 살고 있다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심심 파적거리이구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다시 묻는다.
"그래, 명산 대천을 두루 찾아 다니신다니, 각 도의 풍습과 인심은 어떠합디까 ? "
"아직 삼남 지방은 가보지 않아, 뭐라고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는 이미 다녀 보았는데, 각 도마다 사투리도 달랐지만, 특히 사람들의 기질은 제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귀공이 보기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게 달라 보이더이까 ? "
"글쎄올시다. 뭐라고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함경도 사람들은 끈기가 있어 보였고,
강원도 사람들은 부처님 처럼 순박해 보였고, 경기도 사람들은 말은 잘하지만 미덥지가 않아 보였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은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아시오 ? "
김삿갓은 옛날 어른들이 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훈장께 솔직하게 물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과문 (寡聞)한 탓으로 옛날 어른들이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모르옵니다.
선생은 저의 무식을 깨우쳐 주소서."
"귀공이 무식하다니, 무슨 말씀을 ! "
곽 훈장은 김삿갓을 어떻게 보았는지 , 깍듯이 존대를 해주어 가면서,
"좋은 벗이 멀리서 오셨으니 우선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면서 애기합시다."
하며 사환 아이더러 안에 들어가 술상을 차려 내오라고 이른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 오고, 술잔을 기울여 가며 김삿갓이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알고 계시는 옛 어른들의 팔도 사람의 특색을 들려 주십시오."
"허허 .. 귀공은 지식욕이 대단하시구료. 그러면 내가 옛어른들이 이르는 팔도 사람들의 특색을
적어 보이지요."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이는 것이었다.
1. 京畿道는 鏡中美人 (거울 속에 비친 미인)
2. 江原道는 岩下老佛 (바위위에 앉은 늙은 부처님)
3. 咸鏡道는 泥田鬪狗 (흙탕밭 속에서 싸우는 개)
4. 黃海道는 石田耕牛 (돌투성이 밭을 갈고 있는 소)
5. 平安道는 猛虎出林 (숲속에서 달려 나온 사나운 호랑이)
6. 忠淸道는 淸風明月 (맑은 바람 부는 밤의 밝은 달)
7. 全羅道는 風前細柳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버드나무)
8. 慶尙道는 泰山峻嶺 (첩첩 태산 속의 험준한 고갯마루)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비유가 모두 그럴 듯 합니다.
저는 아직 다른 지방에는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강원도를 암하노불이라 하였고, 함경도 기질을 이전투구에 비유한 것은 어쩐지 수긍이 갑니다.
경기도의 특색을 경중미인에 비유한 것도 그럴듯 하고요."
"하하하,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나 역시도 남도 지방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고향이 제각기 다른 내 친구들을 두고 따져 본 일이 있는데, 모두들 그 비유가 옳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살고있는 지역에 따른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각 지방의 특색이 형성되는 모양 입니다."
"물론 그럴겁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니까요. 그러나 황해도를 석전경우라고 하는 것은 약간 어색한 것 같은데, 선생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 하시옵니까 ? "
곽 노인은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보기에는 황해도 기질을 석전경우에 비유한 것도 옳은 표현인 것 같아요.
소란 놈은 다소 우둔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아첨을 하거나 군림을 하려는 동물이 아니거든요. 자기 일 밖에 모르는 소가 돌밭을 꾸준히 갈아 나가고 있다고 했으니, 그것이 어찌 황해도 사람들의 기질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이래서 황해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예요."
"황해도 사람들의 그런 기질이 마음에 드셔서, 한양에 돌아가지 않으시고 이곳 황해도에 뿌리를
내리신 겁니까 ? "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남에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것이 황해도 사람들의 특색이 아니겠어요 ? "
곽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귀공은 고향이 어디시지요 ? "
하고 물어 본다.
"집이 강원도에 있으니까, 제 고향은 암하노불에 해당하는 강원도 입니다. 그러나 저는 열 살이 넘을 때까지 황해도 곡산에서 자랐으니까,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래요 ? 첫눈에 보아도 어쩐지 황해도 사람 같다 싶었다오. 그러면 이번에는 어렸을 때의 고향인 곡산을 찾아 가시려오 ? "
"곡산을 일부러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나 정처없이 다니다 보니, 불현듯 곡산에 가고 싶었습니다."
"고산종승타산호(故山終勝他山好 : 아무리 좋은 산천도 고향 산천만 못하다)라, 어릴때 자란 고향이
그리우신 모양이구료. 고향이란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에는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떠난지 오래
되었다면 막상 고향에 가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를일이요.가실때 가시더라도 이왕 내 집에 오셨으니 , 며칠 묵으면서 이 근방 산수 구경이나 하시고 떠나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