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취했다고요 ? 천만의 말씀이오. 술을 마셨다면 취했을지 몰라도, 곡차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
벽암 대사는 이와 같이 익살을 부려 가면서,
"나는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유(儒),불(佛),선(仙)에 모두 능통한 선생께서 요산요수(樂山樂水)로 영풍농월(詠風弄月)로 팔도를 두루 편답하고 계시는 만고의 풍류객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만인의 입에서 널리 회자(膾炙)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날 밤이 늦도록 두 사람은 술을 마셔가며 혹은 불교를 말하고 혹은 유교와 도교를 논하며 뜬눈으로 밤을 꼬박 보냈다. 그러고도 미진해 김삿갓은 벽암 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직 참선(參禪)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는데, 참선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옵니까 ?"
그러자 벽암 대사는 대뜸 다음과 같은 선시 한 수를 적어 보였다.
一默禪心淸 (일묵선심청) 한번 참선을 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對物最分明 (대물최분명) 모든 사물이 분명하게 보인다
猶如風過竹 (유여풍과죽) 이것은 마치, 마치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지나감과 같나니
竹中不溜聲 (죽중불유성) 대나무는 바람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이 글을 읽은 김삿갓은 참선에 대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아리송하였다.
마침 그때, 상좌가 손님이 찾아 오셨다고 문밖에서 알린다.
"어떤 손님이 아침부터 찾아 오셨는고 !"
벽암 대사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아니, 일영(一影) 보살이 이게 웬일이야. 어서 들어와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찾아온 여자 손님은 방안에 들어올 생각은 안하고,
"아침부터 무례하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혹시 이라는 분이 여기 와 계시는 것은 아니온지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
방랑시인 김삿갓 (138) *김삿갓을 찾아온 일영 보살은 죽향이었다.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고 멈칫 놀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가 찾아왔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자기를 찾아올 여인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암 대사는 일영 보살이 김삿갓을 찾아온 것을 알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한다.
"일영 보살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을 찾아온 모양이구먼그래 ?
허기는 일영 보살 같은 미인이 나 같은 늙은 중을 찾아왔을 리가 있을라구.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면 지금 나와 마주 앉아 계시니, 그 분을 만나 보고 싶거든 이리 들어와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을 돌아보며,
"삿갓 선생은 무슨 염복(艶福)을 그렇게나 많이 타고나셨기에, 평양에서도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일영 보살을 아침부터 찾아오게 만드셨소 ?"
하고 농담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일영 보살이오 ? 나는 그런 분은 알지도 못합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다는 겁니까 ?"
김삿갓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그때, 일영 보살이라는 여인이 방으로 들어와 김삿갓에게 합장배례를 하는데 보니, 그녀는 며칠 전에 연광정에서 화전놀이를 할 때에 시를 가장 잘 지었던 노기 이가 아닌가.
김삿갓은 춤이라도 출 듯이 반가웠다.
"아니,이게 누구요 ?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소이까 ?"
불명(佛名)으로는 이라고 부르는 노기 이, 영명사로 김삿갓을 새벽같이 찾아오게 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연광정에서 화전놀이가 있었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죽향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노기로 부터, "김삿갓이라는 양반이 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던데, 너희들 중에 혹시 그런 여인을 알고 있거든, 그 양반에게 알려드리도록 하거라!"
하는 말을 듣고 죽향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가실이라는 이름은 죽향 자신의 본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김삿갓이 지낸다는 임 진사 댁을 찾아가 보니 공교롭게도 김삿갓은 조반을 먹기가 무섭게 구경을 나갔다는 것이 아닌가.
죽향은 김삿갓을 찾기 위해 연광정,을밀대,부벽루, 등등으로 그날 하루를 김삿갓을 찾아 헤매었다.
그래도 김삿갓을 만날 수가 없어, 다음날 또다시 임 진사 댁을 찾아가니,
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죽향은 체면 불고하고 그 길로 새벽같이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를 찾아온 죽향이라는 기생이 임을 알고 크게 기뻤다.
그리고 죽향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시를 잘 짓는 죽향이 아닌가 ? 자네 본명이 이란 것이 틀림이 없단 말인가 ?"
죽향은 울먹이며 대답한다.
"제 이름이 분명이 이옵니다. 제가 비록 열 다섯 살때에 사리원에서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야 했지만, 제 이름이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이까 ?"
"자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당신 딸이 사내놈과 배가 맞아 평양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하던데,
그 같은 사실이 있었던가 ?" 하고 따지 듯이 물었다.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대답을한다.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는 했지만, 사내와 배가 맞아 평양으로 온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자네 어머니는 어째서, 아직도 그렇게 알고 계신가 ?"
죽향은 대답을 하지않고 다시 한동안 흐느껴 울더니,
"어머니는 팔자가 기구하여 열 아홉 되던 해에 첫 번째 남편을 병으로 잃고, 저의 아버지와 재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슬하에 4남매를 건사할 요량으로
부잣집 영감님과 재재혼의 혼담이 오갔습니다."
죽향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지난날 무하향 주모, 천 씨(千氏)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죽향의 다음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재재혼의 혼담이 막바지에 이른 때, 부잣집 영감님이 저희 집에 왔다가 당시 열 다섯 살이었던 저에게 남모르게 추파(秋波)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너무도 어려서 무섭기도 하였지만,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그 영감님의 유혹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죽향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 없이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된 것 이로구만."
"예, 마침 평양으로 떠나는 동네 오라버니가 있어서 그를 따라 평양으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평양에 와서는 어떻게 기생 노릇을 하게 되었던가 ?"
김삿갓은 죽향이 어떤 연유로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평양에 와서는 ,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평양 명기 묵향(默香)의 집에서 부엌 살림을 하며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묵향이 너무 늙어 퇴물 기생으로 전락하게 되자, 저를 내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삿갓으로서는 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 자신이 만났던 죽향의 어머니, 무하향(無何鄕) 천 씨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네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 어느 하나 하고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네.
이제라도 자네가 홀로 된 늙은 어머니를 보살피는, 늦은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나 ?"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이번에는 벽암 대사에게 간곡하게 부탁을한다.
"스님 ! 삿갓 선생을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 소식을 좀더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사옵니다. 스님께서 허락해 주실는지요 ?"
벽암 대사가 흔쾌히 대답한다.
"일영 보살이 어머님 소식을 그렇게도 알고 싶어하는데, 내가 왜 훼방을 놓겠는가 ? 어서 댁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게. 삿갓 선생 ! 일영 보살은 나의 교화로 불문에 귀의한 나의 불제자올시다.
두 분이 이토록 기이하게 만난 것도 전생의 인연이니, 일영 보살을 정성껏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그 길로 김삿갓은 죽향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죽향의 집은 대동문 가까운 산기슭에 있었다. 그다지 큰 집은 아니었지만, 뜰이나 방이나 모두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족자였다.
이 몸은 윤락하여 기생이 됐을망정
어진 낭군 만나 길이 섬기고 싶었소
님의 마음 반석처럼 굳지가 못해
오래지 않아 딴 여자로 옮겨 갔구려.
妾身倫落屬娼家 첩신윤락속창가
願得賢郞送歲華 원득현랑송세화
不識郞心磐石固 불식랑심반석고
暫時移向別園花 잠시이향별원화
김삿갓은 그 족자의 시를 읽어 보고 죽향이 어떤 성품의 여자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죽향은 김삿갓을 좌상대청에 모셔다 놓고, 술을 권하며 김삿갓이 만난 죽향의 어머니의 소식을 더 듣기를 원했지만, 김삿갓은 더 이상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죽향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했다.
"내가 자네 어머니를 이곳 평양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보았는데, 자식은 여럿을 두었으나,
가까이 부양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이 고향에서 홀로 늙어가는 모습이 여간 쓸쓸하게 보여졌네,
지금이라도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 간다면 어머니가 크게 반겨주실 것이네. 그리고 형편을 살펴서
고향에서나 이곳 평양에서나, 어머니와 함께 생활 한다면 좋을 것 같네. "
죽향은 언제나 시름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건만,어머니를 만나러 갈 생각을 굳혔는지, 딴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수 일내 준비를 마치고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도 함께 가시면 어떻겠사옵니까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구름처럼 세상을 떠돌 뿐 , 한 번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는 법이 없다네.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나도 평양을 떠날 생각이니까 그동안이나 자네 집에 머물러 있게 해 주게나."
김삿갓은 임 진사 댁에 다시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죽향이 고향으로 가기 전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자 죽향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저희 집을 내버려두고 가기는 어디로 가시옵니까. 제가 수 일후에 고향으로 떠난 뒤에도 집은 계집아이가 지키고 있을 것이오니, 선생은 저희 집에 얼마든지 유숙해 주시옵소서."
"아니야 !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나도 어디론가 떠나갈 생각이네. 자네가 없는 평양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혼자만 남아 있겠는가."
사실 그렇게 좋아했던 평양이었지만 이제는 죽향이 없는 평양은 사막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자, 약간은 허전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벽에 걸려 있는 족자로 보아,
죽향은 몸을 함부로 허락할 기생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엉뚱한 욕심은 버리고 곱게 잠이 들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139) *이별과 눈물의 대동강.
김삿갓은 죽향을 무리하게 가까이 할 생각은 없었다. 시와 마음이 통하면 그만이지, 나이 어린 풋내기들처럼 구태여 살을 섞어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삿갓은 비록, 죽향과 살을 섞지는 않았지만, 바라만 보아도 서로간에 마음이 통하고 보니, 그날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죽향에게 농담삼아,
"우리들은 마치 홀아비와 과부가 한집에 모여 살고 있는 것만 같네그려."
하고 말했더니, 죽향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옛날 시에, 화소성미청(花笑聲未聽 : 꽃은 웃어도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이요, 조제누난간 (鳥啼淚難看 :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볼 수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하옵니까. 삿갓 선생만은 소첩의 심정을 충분히 알아 주시리라고 믿고 있사옵니다."
진실로 변죽을 두두리면 복판이 울리는 멋진 대답이었다.
김삿갓은 죽향이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 준비를 하는 중에 때때로 이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사흘만에, 죽향의 고향 출발의 날이 밝아왔다.
마음이 통하는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짧은 사흘이었다.
김삿갓은 배낭을 먼저 짊어지고 나서며, 죽향에게 말한다.
"자네를 대동강 나루터까지 전송하고 나서, 나도 관서 지방으로 떠나기로 하겠네."
그러자 죽향은 도리질을 하면서 말한다.
"아니옵니다. 선생을 전송해 드리고, 저는 나중에 떠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여자고, 나는 사내 대장부가 아닌가.자네를 전송하기 전에는 나는 발길이 무거워 떠날 수가 없네."
두 사람은 서로 전송하겠다고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은 죽향이 먼저 떠나게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대동강변에 있는 나루터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죽향은 나룻배에 오를 생각은 안 하고, 김삿갓의 얼굴만 눈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배에 오르게나 ! "
죽향은 그래도 배에 오르지 않고, 김삿갓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시 한 수를 읊는다.
대동강상별정인 大同江上別情人 대동강에서 정든 님과 헤어지는데
양유천사미계인 楊柳千絲未繫人 천만 올의 실버들도 잡아매지 못하오
함누안간함누안 含淚眼看含淚眼 눈물어린 눈으로 눈물 젖은 눈 바라보니
단장인대단장인 斷腸人對斷腸人 님도 애가 타는가 나도 애가 끊기오.
그애말로 애 간장이 녹아나는 시였다.
거기에 대해 김삿갓도 한마디 응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펼쳐진 대동강 풍경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취금난희대심부 翠禽暖戱對沈浮 푸른 새는 강물에서 정답게 노닐고
청경란산야미수 晴景欄珊也未收 난간에서 바라보니 풍경은 아름답건만
인원만수산북입 人遠만愁山北立 님 보내는 시름은 북쪽 산에 어리고
노장유견수동류 路長惟見水東流 멀리 떠나가는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수양다재앵제역 垂陽多在鶯啼驛 꾀꼴새는 버드나무숲에서 울어 쌓는데
방초무변객의루 芳草無邊客倚樓 나는 다락에 기대 풀밭만 바라보노라
초창송군자애반 초창送君自崖返 그대를 보내고 나 혼자 언덕에 남으면
나감낙월하정주 那堪落月下汀洲 달이 질 때 설움을 무엇으로 달래랴.
죽향은 김삿갓이 읊는 이별의 시를 듣고, 옷소매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없이 흐느낀다.
아직까지 잠자리조차 같이해 본 일이 없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서로 미치면,모든 것이 통 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지금 대동강가에서 이별을 앞에 두고, 가는 사람은 죽향이요, 보내는 사람은 김삿갓이었다.
죽향과 김삿갓은 좀처럼 헤어질 줄을 몰랐다.
"배가 떠날 모양이니, 어서 배에 오르게."
김삿갓이 배에 오르기를 재촉하자, 죽향은 눈물을 씹어 삼키며,
"선생은 이제부터 어디로 가시옵니까 ?"
하고 울성으로 묻는다.
"나는 원래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몸,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기가 어려울 걸세."
죽향은 그 말을 듣자, 설움이 북받쳐 올라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별의 시를 이렇게 읊는 것이었다.
부디 평안히 가시옵소서 去去平安去 거거평안거
끝없이 머나먼 만리길을 長長萬里多 장장만리다
하늘에 달이 없는 밤이면 江天無月夜 강천무월야
외기러기 슬피 울으오리다 孤叫雁聲何 고규안성하
죽향은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조그만 돈주머니 하나를 김삿갓의 배낭 속에 쑤셔 넣어 주며,
"이것은 몇 푼 안 되지만, 술값으로 보태 쓰시옵소서."
마지막으로 그 말 한마디를 남기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나룻배에 뛰어올라, 숫제 외면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앞을 가려 김삿갓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죽향아 ! 부디 잘 가거라 ! 오늘의 우리들의 이별은 처음이자 마지막 이별이 될 것이다.)
마음 속으로 그렇게 뇌까리며 발길을 돌리는 김삿갓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 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가버린 내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울어 검은눈을 적시나 ---------------//--------------//------------
방랑시인 김삿갓 (140) *돈이 갖는 마성(魔性)
김삿갓은 죽향이 타고 있는 배가 시시각각 멀어져 가는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산속에 파뭍혀 버리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니, 산골짜기에는 철쭉꽃이 붉게 피어 있었고, 숲속에서는 온갖 새들이 청량한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별의 슬픔을 달래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오는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조차, 영원이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만고의 이치가 아니던가.
김삿갓의 끝없는 방랑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평안도는 워낙 산수가 험한 곳이어서, 안주(安州)로 접어 들었지만 산은 점점 더 험악하기만 하였다. 산이 험한 곳에는 인가가 드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험한 산골에도 인가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김삿갓은 밥을 굶은 채 진종일 걷다가,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서야 어느 촌락에 도착하였다.
안락촌(安樂村)이라고 부르는 그 마을은 옛날에 전쟁을 많이 치른 지역인지 마을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촌중으로 들어오니, 유관(儒冠)을 쓴 늙은이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며 팔자 걸음을 하면서 유유자적 걸어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늙은이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었는데, 이 마을에서 자고 갈 만한 집이 없겠습니까 ?"
그러자 늙은이는 김삿갓의 행색을 위 아래로 훝어 보더니,
"개천가에 객줏집이 있으니, 그리 가보게."
하고 씹어 뱉듯이 한마디 내던지고 저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뭐 저런 늙은이가 있어 ! )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멀어져 가는 늙은이의 뒷모습을 한동안 멀거니 지켜 보고 있었다.
머리에 유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 딴에는 선비랍시고 행세하는 것 같은데, 수 많은 인생의 풍파를 겪은 늙은이의 태도도 아니고, 선비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예 도 갖추지 못한 늙은이가 아닌가.
선비의 행색을 꾸렸으면 행실도 선비다워야 옳은 일이 아니겠나.
진짜 선비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 늙은이는 김삿갓의 남루한 옷차림만 보고 사람을 덮어놓고 업신 여겼는데, 그것은 사도(士道)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다.
김삿갓은 쓰디쓴 웃음을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겨,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하룻밤 자고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 아낙네는 부엌에서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며,
"일 없시요 ! 우리 집에서는 밥을 다 해먹었으니, 밥을 얻어먹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나 오시라요 !"
하며 숫제 거렁뱅이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두 집 세 집 대문을 더 두두려 보았으나 매정하게 거절해 버리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허허, 인심 한번 고약하군 !)
집집마다 그 모양 그 꼴이니,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돈을 주는 객줏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알려준 대로 개천가에 있는 객줏집으로 찾아 들어가니, 주인 아낙네는 김삿갓의 옷차림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우리 집에서 자려거든 돈을 먼저 내노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선금을 받지 않으면 손님을 재워주지 않씨요." 하고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돈타령부터 꺼내 놓는다.
김삿갓은 부하가 치밀었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지만, 객줏집에서 선금을 내라는 소리는 처음들어 보오."
김삿갓은 자신의 행색을 보고, 선금을 내라는 소리에 은근히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주인 아낙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돈을 먼저 내고 싶지 않으면 다른 집으로 가보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재우기 전에 돈부터 받는다오 ! "
"평안도 객줏집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돈을 먼저 내야 재워준답디까 ?"
"우리 집에 왔으면 우리 집 방식에 따를 일이지, 쓸데 없이 남에 집 애기는 왜 물어 보시나요 ?
남에 집 일을 알아보고 싶거든 그 집에 가서 알아보시라요 !"
마을의 이름은 <안락촌>이건만, 마을의 인심은 조금도 안락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선금을 주고 객줏집으로 들어올밖에 없었다.
대동강변에서 죽향이 이별할때 배낭에 찔러 넣어 준 돈은 자그마치 백 냥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나도 백 냥 부자가 되었으니, 이만하면 한동안 돈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 ! )
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돈이란 것이 애써 벌어 본 사람이 아껴쓰는 법인데, 김삿갓은 애써 돈을 벌어 본바 없으니 쓰는 것 조차 아껴 쓸 줄 몰랐던가. 그동안 안락촌에 이르기까지 돈을 흥청망청 썼던 관계로, 객줏집에 선금을 치루고 났을 때에는 돈이라고는 닷 냥밖에 남지 않았다.
(평안도 땅으로 들어와서는 밥을 공짜로 얻어먹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은데, 돈이 이렇게도 없어 가지고서는 어떻게해야 좋단 말인가 ?)
김삿갓은 오십 평생 <거지 생활>을 해오면서도, 돈 걱정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인 듯 싶었다.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돈이 워낙 없을 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건만, 돈이 있다가 없어지고 보니, 돈 걱정이 새삼스러워졌다. 돈이 가진 마성(魔性)을 느끼는 순간, 김삿갓은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