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41-60
恒照
2021. 4. 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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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7
-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갑자사화가 시작된지 70일이 지난 후 연산은 이만하면 백성과 신하들이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는 매우 조심스런 대신들의 간언에, “10년은 풍속을 바로잡아야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신들을 아연실색하게 하였습니다.
연산의 자칭 개혁은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졌고 잔혹해졌습니다. 연산은 죄인을 잡아올 때 손바닥을 꿰어 끌고 오게도 하고, 배를 가르고 뼈를 바르는 광인과도 같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또한 연산은 어미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고, 조참에 백관을 꿇어앉도록 하고, 하급 문신과 대간들을 자신의 가마를 메게 하는 등 하는 짓이 점점 해괴해졌습니다.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 그리고 중국의 예에서 보면 신하들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어찌되었든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에 있으나, 연산에게는 가혹한 권력만이 있을 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이유 없이 죽이는 등의 가혹한 행위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산은 점점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흥청망청(興淸亡淸)”입니다.(지면 관계상 각자 찾아보기)
그런데, 연산은 과연 미친 것일까요? 아니면 에 기재된 내용이 과장된 것일 뿐 실제는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연산이 미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른 야사에도 연산의 위와 같은 행위가 많이 나오고 역사가들의 이견도 없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이 있다 하더라도, 연산이 수백 번 죽어도 마땅한 패악을 저지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생각컨대, 연산은 가혹한 통치만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한 왕권을 유지시켜주는 길이라고 믿었고, 연산은 포악한 권력을 아무런 견제 없이 휘두르다 스스로 휘두르는 권력이라는 괴물에 이성이 마비되어 사실상 미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뭏든 연산은 자신을 견제하는 모든 장치가 해제되자 더욱 향락의 길로 빠져들었고, 급기야 신하들의 부인까지 수시로 탐하고 나들이하는 길 위에서 교합을 하는 등 연산의 타락은 끝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임금이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곤 없다”라는 익명의 투서가 전해지고,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옛 글에도 있는 것이다. 가엾은 백성들아 나의 의병을 따르라”라는 익명서 등이 붙으니, 이는 연산이 몰락할 필연의 조짐이었습니다.
연산은 이런 조짐에 내심 큰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러한 두려움이 오히려 연산을 더욱 광폭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즈음 연산을 오랫동안 모셨던 내시 처선이 연산에게 충언을 하다 팔 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두 가지 걱정과 근심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는 연산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요, 둘은 어디선가 정변이 일어나면 자신들도 연산과 함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산의 광폭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기에, 오로지 생존을 위한 정변의 기운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이제 누군가 그 팽팽한 줄에 칼을 대기만 한다면, 정변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즈음 연산을 몰아내는 반정을 구체화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박원종입니다.
연산의 운명이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도가 지나치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게 당연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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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
- 연산의 죽음, 중종 등극
박원종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인 박씨의 동생으로서, 성희안, 신윤무 등과 반정을 논의한 후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씩 물었는데, 조정 대신들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반정계획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올 것이 온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비교적 연산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던 박원종이 왜 반정을 시도했는지, 우국충정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야사에는 연산이 박원종의 누이인 월산군 부인을 겁탈했다고 하나, 월산군 부인의 나이를 보나 그즈음 의 내용을 보나, 이런 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박원종은 신수근, 임사홍 등 극소수의 연산 측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하들의 호응을 얻어 경복궁에 무혈입성하였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 모두 도망가 버린 궁궐에는 연산만이 남아 있었고, 연산은 옥새를 내어 놓으라는 반정군에게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옥새를 내 놓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합니다.
박원종은 곧바로 대비전을 찾아 연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성대군이 이 날로 즉위하니 이 사람이 곧 중종입니다.
이후 연산의 여인 장녹수는 반정군의 칼을 맞은 후,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돌을 맞아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으며, 연산의 아들들은 각기 따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되었고, 연산 역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에 유배 되었다가 두 달 만에 역질로 죽고 말았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자기 세력도 없이 오직 피바람만으로 절대권력을 향해 질주했던 최악의 군주 조선 10대 왕 연산, 20세에 왕위에 올라 12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피바람으로 세운 절대권력을 오로지 자기의 향락에만 사용했기에 사후 묘호를 받지 못함은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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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종 등은 연산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13세)을 왕위에 옹립하고 실권을 거머쥔 채 모든 것을 연산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산 치하에서 연산에 붙어 영화를 누린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박원종 등 세력 등 상당수가 그런 자들이기도 했고, 또 다른 반정을 예방하기 위해 적을 만들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박원종 등은 대부분의 신하들을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중종의 부인인 중전을 연산의 측근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비시켜버렸습니다.
연산의 치하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하느라 노심초사했고, 이제 연산도 죽고 본인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무시무시한 눈길에 어깨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연약한 왕 중종, 어찌되었든 이제 1506년의 조선은 11대 왕 중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결국은 뜬구름과 같은것을~~
정점에 선다는건 끝도 보인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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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
-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진성대군은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중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습니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마지 않으니 따르노라”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전망을 갖고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은 연산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개나 소나 공신이니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 차지가 되었으며, 불안한 정국에 임금이 허약하니 관직사회의 기강 해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령들은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그 몇 곱절을 뽑으려 백성의 등골에 빨대를 꽂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고 처벌을 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가뭄, 홍수, 우박에 지진까지 찾아오니, 고향을 떠나 떼도적이 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한편 기세가 왕 못지않던 반정공신들 중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이 중종 7년에 이르러 대부분 죽게 되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중종은 비로소 왕 노릇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이 자가 바로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수제자입니다.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는데, 젊은 조광조는 두 번의 사화와 스승의 죽음 그리고 중종반정을 목도하면서, "임금과 신하가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근본을 바로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조광조는 29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성균관 생도들 역시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하려하기보다는 보신과 출세와 요령취득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연산 시대를 거치면서 온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이지요
조광조는 처음부터 의관, 자세, 언행 등 모든 면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고, 처음에는 비웃던 자들도 조광조의 반듯함이 진정성 있게 지속되자 자연스럽게 조광조를 주목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반듯한 자세, 성리학의 깊은 이해와 원칙 견지, 유려한 말솜씨, 진정성에 성실함까지
임금과 함께 하는 경연장은 곧바로 조광조의 독무대가 되고 맙니다.
난세에 왕노릇은 몇곱절 하기 힘들었을텐데... 더군다나 어린 나이에~
조광조의 등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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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
- 조광조의 개혁
중종은 조광조의 학식과 됨됨이에 반해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되었고, 급기야 과거 급제 2년도 되지 않아 조광조를 홍문관의 수장인 부제학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울러 조광조가 몰고 온 바람은 조정 안팎의 젊은 선비들을 매료시켜 이들 역시 조광조를 진심으로 따르는 지경이 되었고, 대신들도 가급적 조광조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광조는 중종과 선비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신원을 회복하여 문묘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조광조가 사림의 정통 학맥을 잇는 선비임을 대외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이어서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가 시나 문장, 즉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을 뽑을 뿐 성리학의 본질에 부합하고 덕이 있는 자를 뽑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현량과의 실시를 강력 주장하였고, 중종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훈구파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현량과 : 중국 한나라 때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떠 만든 것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대책(對策) 만을 시험보고 채용하는 제도
또한 조광조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생겼을 때 일월성신에게 도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관청인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 주장하여 이를 관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종이 반대 의사를 여러 번 밝힌 일로써, 이로 인해 중종과의 유대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는데, 조광조는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강한 목적의식에 따라 훈구파들을 사장, 즉 시나 문장만을 일삼는 소인배, 구세력이라는 이유로 탄핵해 유배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속도조절보다는 가속 페달을 더 깊숙이 밟았는데, 이로 인해 훈구파들의 불만이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것들 역시 소인배들의 전형적 형태로만 여겼을 뿐 그 위험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중종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개혁조치를 강행하면서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이상을 따르는 철인군주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신하와 백성이 될 수 있는 제도와 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의 가시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며, 이와 같은 조광조의 노력이 더 계속된다면 조광조의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꿈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것으로 볼 여지도 상당했습니다.
암튼 중종의 신임과 조정 안팎의 지원을 바탕으로 힘을 최대한 비축한 조광조 세력은 드디어 이 시대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칼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117명중 무려 76명에 대해 이들이 연산군의 충신인데다 아무런 공도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었습니다.
조광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음~~기존세력에 크게대립하거나, 대항하게되면 , 되려 다치는경우가 많은듯~~이것이 지도자로써 가장 큰 고난중 하난데~~내가 다치던, 상대가 다치던,필시 짚고넘어야할 산이란건 분명하다. 탕평책을 써도 그시대만 조용하지, 결국은 왕도 독배를 마시는것과 다르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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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4
- 기묘사화(己卯士禍)(1)
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 자체를 역적질로 본다는 심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 세력은 과도한 공신 지정에 따른 폐해 수정이라는 명분과 중종의 지지를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의 위와 같은 대규모 위훈삭제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조광조 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중종은 결국 본인의 의지와 달리,다른 신료들의 지지까지 입은 조광조의 주장을 본심에 반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언제부터인가 조광조가 부담스러웠고,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이 임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과격한 노선을 추구한 조광조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을 내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입니다.
※ 4대사화 : 무오사화(연산, 조의제문), 갑자사화(연산, 어미 복수),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
중종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내친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인데, 이를 재구성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남곤은 성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 치하에서 벼슬을 하다 갑자사화 때 귀양을 갔던 사람으로서, 중종조에 이르러 탁월한 정치감각과 문장으로 신진세력의 리더로 꼽혔으나, 조광조의 출현으로 빛이 바랬고 급기야 이들로부터 구세력으로 몰려 입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남곤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역시 조광조 세력으로부터 구세력, 소인배로 몰려 탄핵을 당한 동갑내기 심정, 그리고 정국공신의 상징으로서 조광조의 76인 위훈삭제로 인해 목에 칼이 들어왔다고 느낄 정도로 불안감을 갖고 있는 홍경주와 함께 의기투합하였습니다.
이들은 중종이 조광조 세력의 과도한 밀어붙이기식 개혁추진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압박 그리고 조광조의 높은 인기에 불안감과 시기심을 갖고 있고, 아울러 위훈삭제로 밀려난 공신들이 작당하여 반정이라도 일으킬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활용해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조광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조선시대 안타까운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조광조. 언제나 세상은 돌게 되어있고, 역사는 반복되고 오르긴 힘들지만 내려 가는 건 한순간, 씁쓸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과도한 칼질해 대다가 주인 입맛에 맞지 않아 짤린 요리사랄까~
중종~이 양반도 그릇이 간장종지~
에휴~ 조광조가 10년만 더 살았어면, 조선이 훨씬 더 발전했을텐데~
명분이 서고 아무리 옳은 일이라해도 내가 최고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항상 반대세력과 분란을 키우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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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5
- 기묘사화(己卯士禍)(2)
홍경주는 어느 날 밤 중종을 찾아가 조광조의 권세와 인기가 이미 임금을 능가하였고, 이에 공신들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으며, 시중에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하는 등 가뜩이나 불안해하는 중종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야사에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시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벌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쓰게 한 후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임금에게 들고 가 아뢰었다고 하나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인데다 이야기 자체가 선조 이후에 등장하는 것임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홍경주가 중종에게 주초위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의 참언을 입에 올려 중종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댄 것은 사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하튼, 조광조 세력의 과격하고 급격한 밀어붙이기식 일 추진에 가뜩이나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껴오던 중종은 홍경주의 말을 듣고, 사방이 조광조의 수족인데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하문하였고, 홍경주는 임금이 조광조를 치는데 뜻이 있다는 밀지를 내린다면 남곤, 심정 등 충신들과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답을 하였습니다.
이에 중종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에게 “정국공신을 모두 내친다면 경들은 어육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엔 과인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미 간당이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되었으므로 함께 꾀하여 그들을 제거하고 종사를 안심시키도록 하라”는 취지의 밀지를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그 후 중종과 홍경주 등은 은밀히 조광조 제거 시나리오를 짜고, 신하들이 조광조의 죄를 청하는 글을 미리 지은 후 그 밑에 대신들의 이름을 마음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조광조 등은 저희끼리 붕당하여 권세 있는 요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며, 위를 속이고 사정을 행사하기를 가리지 않고, 후진을 유인하여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방해토록 함으로써 국세가 전도되게 하였다.
- 이에 조정이 모두 속으로는 분개하였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조심하기에 급급했다.
중종은 어느 날 밤 조광조의 측근인 승지를 전격 교체하고 조광조 세력 대부분을 금부에 하옥하도록 하는 어명을 내린 후 입시한 중신들에게 위와 같이 미리 작성해 놓은 문안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대신들과 성균관 생원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을 모두 외방에 유배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옥에 갇힌 조광조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중종의 돌변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천문이 멀어서 생각을 다 아뢸 길이 없사오나 잠자코 죽는 것은 참으로 결딜 수 없사오니 한 번만 친히 국문해 주옵시면 만 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사옵니다”라는 옥중상소를 올렸습니다.
조광조는 자신이 직접 임금에게 조목조목 해명을 하고 설득을 하면 오해가 풀릴 것으로 기대를 하였겠으나, 본질은 임금의 오해가 아니라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세력을 쳐 냄으로써 왕권을 온전히 유지하겠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므로, 결국 조광조의 기대는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랫 것이 너무 잘나면 안돼~
오히려 웃전의 사랑이 독이 되는 날이 오니까...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시시콜콜 보고하고~
일을 도모함에, 너무 앞서가거나, 급진적이거나 하면 중생들의 이해는 뒤에 오고 .........
결국 험한 일을 당하나보다.
조광조도 이런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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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6 - 조광조의 죽음
조광조는 임금과 대면할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조광조는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사람으로서, 반듯하고 사심이 없었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재라면 천민이라도 등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임금을 끝없이 계도하여 군자가 이끄는 나라를 만들고자 성심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현실정치의 냉엄함을 잘 알지 못한 치명적 실수, 군왕제 하에서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중종의 개인적 자질 부족 등 (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자는 쇠퇴의 길을 걸을수 밖에 없는데, 쪼다 중종이 복을 찼네~ )여러 이유로 그 꿈을 접은 채 정치 개혁의 길에 들어선지 4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당하니, 그의 나이 겨우 38세였습니다. 그래서 가수 조광조의 '연인이여' 가사중에 "(중종)눈에서 멀어지면 (중종)마음마저 멀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하나요~"가 히트를 친건 아니겠지요~ㅋ
중종은 조광조를 아들과 같이 아끼다가 느닷없이 그와 그를 따르는 무수한 신료들과 선비들을 납득할 만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은 채 모두 죽이니, 오죽하면 사관들조차 그 임금이 그 임금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취지의 촌평을 하였을까요
암튼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와 그의 개혁동지들은 모두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살아남은 정국공신들은 끝없이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 나갔으며, 그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민심은 늘 흉흉하여 각종 고변과 익명서가 난무하였으며, 임금에게 직언해야 할 대간마저 건강성을 잃고 권력을 쫒으니,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곧 중종의 실패였습니다.
조광조가 죽고 난 후 조정은 남곤이 제일 실력자가 되어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훈구파와는 다른 이질적인 인물이 급성장하고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김안로입니다.
김안로는 똑똑하고 이빨이 세고 매사에 해결책을 잘 제시해서 차기 또는 차차기를 이끌 인물로 주목을 받았고, 급기야 자기 아들을 중종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중종의 총애까지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남곤은 김안로를 위험인물로 보고 김안로를 소인배로 몰아 귀향을 보내버렸으나, 그도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권력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남곤은 죽으면서 조광조를 죽도록 한 것을 후회하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다행이라 할까요
중종, 인종, 명종 시대는 조광조의 등장과 퇴조, 김안로, 문정왕후, 윤원형, 윤임 등의 피 터지는 권력싸움이 벌어지던 시대인데 (“여인천하”의 소재), 그러한 권력싸움의 정점이 눈앞입니다.
20여년 전 (2001~2002년) 전인화 강수연 주연의 "여인 천하" 참 재미 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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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7 - 중종의 죽음
남곤이 죽고 며칠 후인 세자의 생일날 해괴한 일이 궁궐에서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꼬리가 반쯤 잘리고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가 동궁 숙소 근방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자(13세)는 쥐띠였습니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灼鼠의 變)”이라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 일이 누군가 세자를 저주하여 벌인 일로 보고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대왕대비가 당시 세도를 부리던 경빈 박씨(박원종의 수양 딸)를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별다른 증거도 없이 경빈 박씨는 그 아들인 복성군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음모와 모함의 달인인 문정왕후와 김안로가 있었는데, 이 중 누군가 벌인 일을 비교적 순진한 경빈 박씨가 뒤집어 쓴 것입니다.
한편, 귀양 가 있던 김안로는 남곤의 죽음과 작서의 변, 그리고 새로운 후원자를 원하는 중종의 뜻에 따라 조정으로 복귀했고, 타고난 재주를 발휘해 중종의 신임을 얻은 후 곧 조종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김안로는 심정 등 반대파들을 누명을 씌워 모두 사사하고, 새로운 저주 사건을 만들어 귀양 가 있는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까지 사사해 버리는 등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안로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이는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전인화)와 그의 친동생들인 윤원로, 윤원형(이덕화)였습니다.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야심이 두려운 나머지 문정을 폐위하고 윤원형 등을 해치우려다 자식의 혼인 잔치를 벌이던 중 체포되어 사사되고 맙니다(작서의 변이 경빈 박씨가 아닌 김안로와 그의 자식, 며느리가 일으킨 것으로 밝혀짐)
중종은 어린 시절,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이 대신들에 의해 끌려 내려가는 것을 직접 목도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왕권 유지를 위해 왕 노릇을 했고(왕노릇을 위한 왕노릇에 의한 왕노릇~~ ) 이를 위해 항상 강력한 후원자를 두었습니다.
다만, 그 후원자가 지나치게 컸다 싶으면 다른 신하들과 모의해 그 후원자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방법이 중종의 전매특허 (중종의 용인술은 한마디로 '以夷制夷' , ) 였고 이 방법으로 중종은 39년 왕위를 지킨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왕위를 지키면서 업적이 없다니~ 그러기도 쉽지 않을듯~)
중종은 박원종 그늘 뒤에서 초기 시절을 보냈고, 조광조에게 힘을 몰아주면서 왕위를 보존하다가 조광조를 내쳤으며, 다시 김안로에게 힘을 몰아주는 방법으로 왕위를 지키다가 다시 김안로를 내쳤는데, 이 때 죽은 사람이 오히려 연산 때보다 많았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중종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왕위를 지킨 것 외에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이 재위 39년만인 1544년 향년 57세에 병으로 죽으니, 조선의 백성이 참으로 불쌍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49
인종
- 인종 즉위와 끝없는 권력투쟁
중종의 뒤를 이은 조선 제12대 왕은 인종입니다. 인종은 중종의 정비인 장경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듬해 장경왕후가 죽어 궐 밖에 재상가에서 성장하였는데, 그 총명함에 신료들이 모두 탄복할 지경이었습니다.
인종은 관례보다 빠른 6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 되었고 커가면서 이상적인 군주 상에 가까워진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세자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즉,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 박씨(도지원)의 소생인 복성군이 있었고, 새로 중전이 된 문정왕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종은 자기의 왕위 보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승적 견지에서의 국가관이라고는 애초에 없었으니, 인종은 말만 세자일 뿐 그 앞날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게 왕이라고 앉자 있으니 선조같은게 튀나와 나라를 절단내고 맙니다.
이러한 환경에 걸맞게 세자(인종)의 어린 시절엔 전회에 본 작서의 변(이로 인해 경빈 박씨와 복성군 사사, 그 후 김안로 사사) 등 해괴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문정왕후는 왕비에 책봉된 지 무려 17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야심을 우려해 중전을 폐위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여 사약을 받았으며, 이에 비례하여 문정왕후의 힘과 야심은 더욱 커지고, 세자의 입지는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김안로가 죽고 난 이즈음 정국은 세자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한 세자의 외삼촌 윤임과 문정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전자를 대윤(大尹), 후자를 소윤 (小尹)이라 불렀습니다. 아재비 조카끼리 지랄들하고 있습니다.
세자의 나이 서른이 되도록 후사가 없자 소윤 측의 야심은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문정왕후는 예전 연속극
여인천하에서처럼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 야심을 갖고 세력을 불려나갔고, 그 전면엔 동생 윤원형이 있었습니다.
중종 38년에는 동궁 저에 큰 불이 났는데, 야사에는 이 불이 소윤 측에서 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자에 대한 위해 시도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소윤 측은 세자를 제거하지 못했고, 중종이 죽은 후 세자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 꿈도 일단 깨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50
인종 명종
- 인종독살설 그리고 명종 즉위
조선 12대 왕 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계모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고, 아들 나이인 이복동생 경원대군을 언제나 우애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인종의 어진 성품을 이용하여 인종에게 강짜를 놓기 일쑤였고(주상, 우리 집안은 살려주시는 겁니까. 뭐 죽여도 도리는 없지만~ 늙은 여우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종은 문정왕후를 더욱 지극히 대우하였습니다.
이는 인종을 방패막이로 하여 대윤 측으로부터 소윤 측의 세력을 지키겠다는 문정의 고도의 술수였습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죽는데, 이는 조선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것입니다. 참고로 영조가 52년 선조가 41년인데, 백성을 위해 한 일도 없이 참 오래도 해 처먹었습니다.
인종이 이렇게 단명한 데 대해 그 사망 원인으로 보통 두 가지가 거론됩니다.
실록에는 인종이 효심이 지극하여 부친인 중종의 제사를 예법에 맞게 원칙적으로 지낸 관계로 몸이 혹사되었고, 이로 인해 신하들은 짧은 재위기간 내내 “수라를 드시옵소서, 고기를 드시옵소서, 옥체보존은 선왕에 대한 제사 못지않게 중요하옵니다”는 주청을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결국 인종은 쇄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인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문정의 전후 행태, 인종 사망 전까지의 각종 사건 사고, 인종이 장수할 경우 문정의 동생인 윤원형 등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당시 정세, 세자시절에 특별히 지병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점, 그런데도 보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사망한 점, 인종 독살설을 기재한 야사가 유난히 많은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문종의 인종 독살설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한 년~~
어쨌든 촉망 받던 왕재 인종은 31세의 나이에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이복동생 경원대군이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곧 명종입니다.
명종의 모후인 문정황후는 왕이 어린 관계로 자연스럽게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조선시대 최고의 여걸 문정이 수렴청정을 하게 된 이상, 문정과 대립했던 자들은 살아남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51
명종 1
- 문정왕후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문정왕후(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조정의 실권은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에서 문정의 동생인 윤원로,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으로 넘어갔습니다. 아재비와 조카싸움에서 조카 승~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 측 윤원형은 그 측근인 임백령 등을 동원하여 대윤 측의 대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 무수한 신료와 선비들을 사사하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입니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으로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이후 약 50년간 신료와 선비들이 대규모로 옥사한 사화는 이로써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백성의 평안은 뒷전으로 미룬채 50년간 지랄들을 했어요.
※ 4대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이상, 연산군),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명종)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었고, 후에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합니다. 병이다 병~
아무튼 이러한 을사사화 이래 윤원형 일파인 소윤은 수년간 반대파 숙청을 위한 음모를 계속하였는데, 이 때까지 죽은 유력 인사들만 해도 1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의 총감독은 당연히 문정왕후였습니다. 문정은 죽는 날까지 국정을 장악하고 철혈정치를 펼치니, 호불호를 떠나 실로 대단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정왕후를 야사가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정사인 실록에서도 야사 못지않게 평가를 하는 것은 다소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생각컨대, 이는 문정이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탄압함으로써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 된 점, 사관은 모두 유학자였던 점, 문정이 사림을 사랑했던 인종을 배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점, 그리고 유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불교를 부흥시킨 점(도첩제와 승과제도 부활) 등이 그 원인이 될 것이고, 여기에 “여자”라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죽이기에 힘쓰니 인재는 숨고, 간신배만 우글대는 세상
중종 인종 명종 시대의 사화~~ 이런 시간동안 나라가 한 없이 약해지고, 이어지는 사림이 붕당정치를 하면서 국력이 한 없이 약해지고~
반면에 일본은 통일이 되면서
강력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지고~
이러니 남아도는 기운을 조선에서 쓰자며 지랄지랄들을 하는데~~
52
명종 2
-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문정은 명종 8년, 명종 나이 스물에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으로 하여금 만기를 친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윤원형의 권세 역시 변함없이 강성하였습니다.
윤원형은 20년동안 권력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 끝을 모를 부패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이 농장이며, 한양에만 대저택이 10여 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최고 화제는 바로 정난정이었습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첩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정실을 내몰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이 되었습니다.
난정은 문정왕후의 사랑도 듬뿍 받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었고, 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원형과 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혼인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정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난정 역시 문정왕후와 함께 사대부들의 공공의 적이었으므로, 원형의 권력 즉 문정왕후가 죽자 원형과 함께 유배될 수밖에 없었고, 끝내는 늘 소지하고 다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형 역시 난정이 죽은 지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 윤원형이 모두 죽은 후, 이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사림이었습니다.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로 많은 유학자를 잃었지만 전국 각지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렀으며, 문정왕후가 죽자 봇물처럼 정계에 등장하여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는 등 실로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할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명종은 부인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아들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덕흥군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익선관을 벗어 써보라고 하자,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여 명종의 눈도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얍삽한 자가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가 됩니다.
명종은 외아들 사망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만인 1567년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습니다.
선조 1 - 동서분당(東西分黨)
명종이 34세의 나이에 죽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이 13세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선조입니다. 서자도 아닌 서손이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선조가 어린 관계로 대비인 인순황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달랑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에는 초기부터 사림(士林)이 크게 세를 이루어 조정에 등장하였습니다.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이이 등이 그들로서,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여러 가지 상소를 하는 등 조정을 좌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백성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실로 쓸데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정신세계도 좋지만, 백성은 굶어 죽고 국력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기일원론이니 사단칠정론이니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꼴이 영 재수가 없습니다. 곧 조선 백성 태반이 죽어 나자빠지는 변란이 일어나게 되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마당에, 급기야 조선 정치가 붕당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입니다.
선조 7년 인사권을 가진 요직 중 요직인 ‘이조 정랑’ 자리가 비었는데, 젊은 사류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되었으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김효원은 결국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었고, 김효원은 보란 듯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이 일을 두고, 김효원을 지지 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적대적 방향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김효원이 동쪽인 건천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이라 칭하였습니다.
사림은 사화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은 이후의 조선 정치의 기준이자 큰 장애가 되고 맙니다.
"난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양반이야" 하고 외치고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있었던 시절~~
53
선조 1 - 동서분당(東西分黨)
명종이 34세의 나이에 죽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이 13세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선조입니다. 서자도 아닌 서손이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선조가 어린 관계로 대비인 인순황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달랑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에는 초기부터 사림(士林)이 크게 세를 이루어 조정에 등장하였습니다.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이이 등이 그들로서,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여러 가지 상소를 하는 등 조정을 좌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백성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실로 쓸데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정신세계도 좋지만, 백성은 굶어 죽고 국력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기일원론이니 사단칠정론이니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꼴이 영 재수가 없습니다. 곧 조선 백성 태반이 죽어 나자빠지는 변란이 일어나게 되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마당에, 급기야 조선 정치가 붕당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입니다.
선조 7년 인사권을 가진 요직 중 요직인 ‘이조 정랑’ 자리가 비었는데, 젊은 사류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되었으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김효원은 결국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었고, 김효원은 보란 듯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이 일을 두고, 김효원을 지지 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적대적 방향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김효원이 동쪽인 건천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이라 칭하였습니다.
사림은 사화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은 이후의 조선 정치의 기준이자 큰 장애가 되고 맙니다.
"난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양반이야" 하고 외치고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있었던 시절~~
배움은 써먹으려고 배우는건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소모전만 했던 것~
당리당략에 안 맞으면 일단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지랄하는~
이러한 시기, 그나마 인물이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등장하니, 이 사람이 율곡 이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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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 - 율곡 이이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혔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누구는 열세살에 담배를 배웠는데)
효자인 이이는 어머니이자 스승인 사임당 신씨가 죽자 인생에 회의를 느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했고, 하산해 성리학에 전념하여 20대에 이미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이이는 명종 19년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뒤, 선조 1년에 이르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적 명성과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실상 이이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사림은 서경덕, 이황, 조식 등 자신들의 스승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그들 대로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이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독학파인데다 서경덕, 이황, 조식을 비판하기까지 하였기에 사림과 신료들 간에 이른바 왕따를 당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이는 동서분당의 시대에 사실상 홀로 중립을 지키며 동서 간의 화평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동서의 강경파 이발과 정철을 불러 중재를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간의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간의 적대감이 계속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편, 임금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고 믿고 의지할 정치 세력도 없이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선조,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림들이 조정에 가득 찬 가운데 자칫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누구입니까. 어린 나이에도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은 기지를 발휘해 두 형을 제치고 옥좌를 차지한 인물답게, 조선시대를 통 털어서 가장 얍삽하고 가장 비겁한 임금답게, 붕당 상황을 방관, 조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왕권을 확립해 나가는 재주를 보였습니다.
선조는 어느 편에도 있지 않은 이이를 이용해 세가 높아지는 동인을 견제하고자 마음먹고, 이이를 중용해 국가의 주요 대사를 맡겼는데, 그 능력이나 마음가짐에 선조도 반했는지 이이가 사직상소를 올리고 물러나 앉았을 때에는 엄청난 애정과 신뢰를 담은 비답을 내리기도 했으니, 이이가 인물은 인물이었나 봅니다.
이이는 모처럼 조정의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아 국가구조개혁, 공물. 군제, 민생 등의 개혁적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그럴듯한 성과도 나오기 전인 고작 1년 남짓 만에 이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탄핵과 선조의 변심으로 사직을 당하고, 곧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고작 49세였습니다.
이이는 17년을 재조와 재야에서 한 결 같이 경장과 동서간 화해를 외쳤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동인 서인 두 붕당은 새로운 차원의 격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니, 이게 탁상공론의 달인들인 선비들 집단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나 봅니다.
이래저래 조선은 비극의 나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천재는 왜 끝이 별로일까요?
본인은 정직하고, 참하게 살다가서 후회 없는 것이었을까요?
55
선조 3
- 사화, 붕당, 그리고 조선의 위기
조선시대 정치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조의 계유정난 이래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 집단인 훈구파가 조정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를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고,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하여, 사림의 무수한 선비들이 옥사하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후 선조 대에 이르러 윤원형 같은 외척세력이 쇠퇴하자, 사림이 다시 정계로 대거 진출하였는데, 사림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끼리 뭉쳐 상대방과 반목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붕당입니다.
선조 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정랑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으로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이 갈린 이래,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지해, 결국 거의 모든 사림이 대를 이어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사림의 동서분당 이후 붕당은 계속 핵분열을 일으켜, 동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강경론을 주장한 남인(南人)과 온건론을 주장한 북인(北人)으로 갈리었습니다.
또한 서인(西人)은 나중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니, 이와 같이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흔히 사색(四色)당파라 하였습니다.
붕당간의 대립은 지극히 배타적이었을 뿐더러 주로 복상(服喪) 문제, 세자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즉, 치열한 붕당간의 대립은 영조, 정조 등의 탕평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19세기에는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붕당정치의 평가는 곧 서양의 정당정치에 비견될 장점이 상당히 있다는 긍정적 평가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망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폐해만 많은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선조 즉위 이래 조선은 이와 같이 동인, 서인으로,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으로 나뉜 붕당정치에 골몰하고 있었고, 역사의식과 통찰력이 없는 임금은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위험한 형국으로 치닫고 있어, 아차 하다가는 백성은 몰살을 당하고 나라는 통째로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형국을 호랑이 앞의 토끼 신세인 조선만 정작 모르고 있었으니, 불쌍한 것은 오로지 백성이었습니다.
계파 싸움하다 시간 다 보내고, 저들의 권력싸움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 해집니다.
저들의 정치는 과연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
임진왜란,병자호란 앞에서 처참해지는건 백성들~~
56
선조 4 - 예고된 침략(1)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붕당 정쟁으로 나라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던 1590년경, 명나라에서는 13대 황제 신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세가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북방에서는 만주족 누루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국시대가 오다 노부가나와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통일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00년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극도의 자신감에 더해, 끝없는 전쟁을 통한 최정예의 수십만 군대를 보유하였으니, 이러한 자신감과 군대를 활용하고픈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언제든지 반기를 들 여지가 있는 영주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관심사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십만의 정예군대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할 꿈을 꾸게 되고, 그러기 위해 면저 조선을 침략해 빠르게 항복을 받은 후 조선의 도움을 얻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히데요시의 대착각이었습니다.
일본은 침략을 결정한 이후 많은 밀정을 조선에 들여보내 조선 지도를 제작하고 조선의 사정과 지형, 인구와 물자 분포 등을 파악했지만, 최고위 수준에서의 정보가 부실하였습니다.
특히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의 국가 규모나 정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조선을 힘으로 강하게 위협하면 국왕은 곧 항복할 것이고, 왕이 항복하면 조선인은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니 조선인까지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조선은 일본 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조무래기로 취급하여 그 국력을 턱없이 낮추어 보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일왕과 최고실력자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가나의 죽음을 두고 “왜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왕을 시해했으므로 이런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절을 보내줄 수 없다"며 일본의 통신사 파견요청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조선을 겁주어 복속하려는 일본의 거듭된 통신사 파견 요청을 거절하던 조선은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드디어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겪어 보지 않았지만, 전쟁은 더 이상 인간이 인간 일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는 것 일테지.
시대적운명과
시대적 사명과
시대적정신이
언제나 존재하기에
역사는 돌아가고
지구도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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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5 - 예고된 침략(2)
조선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실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당당하게 일본의 무례를 꾸짖은 반면, 황윤길은 재물확보에 급급해 비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김성일이 유성룡과 같은 동인인데다, 전쟁발발에 대해 헛다리를 짚는 걸 보면, 유성룡의 김성일에 대한 후한 평가는 자기 붕당에 대한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김성일은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정세파악을 그르치고 조정에 사실상 허위보고를 하고 마는 크나큰 우를 범합니다.
조선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고 지략이 풍부해보였으며, 여러 사정을 볼 때 머지않아 조선을 칠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같이 생긴 인물로서 두려워할 바 못되고, 조선을 칠 의사와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나는 것이 아니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겠지 설마 전면전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보다 마음 편한 선택인 김성일의 의견을 믿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일단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인명이 죽고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진 “전쟁”이 과연 실제로 발발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면밀한 과학적 분석과 전략적 탐색이 아닌 토론으로 결론 내리는 이 신기한 문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조정은 이순신, 송상헌 등을 남쪽 최전방에 배치하고, 전국에 축성, 성곽보수 등을 명했으나, 이마저도 김성일은 민심이반을 걱정하며 반대하였습니다.
조선은 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문신의 나라였고(권력은 붓끝에서 나온다!), 이들이 병조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해 무신들을 부리고 다스렸으며, 이렇다 할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되면서 그나마 조선 초에 있던 진법훈련이니 병기개량이니 하는 것들 마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말을 듣는 장수가 여진족 몇을 베게 되면 이를 과장해 명장이라 치켜세워 승진을 시켰고, 장수는 장수대로 인사권을 쥔 문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축재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군졸들은 아무 빽도 없고 도망갈 배짱도 없는 약자 중의 약자들로서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삼위일체 체제에, 왕 같지도 않은 왕에, 거기다가 전쟁은 없다는 동인정권의 결정적 오판까지 겹쳤으니, 이 나라가 어찌 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진년 봄, 왜인들이 머무르는 왜관은 이미 텅 빈지 오래였고,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이 홀로 거북선을 타고 포격훈련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선은 조용했고, 예고된 전쟁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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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6
- 침략, 그리고 조선판 킬링필드
선조 25년인 1592년 1월 히데요시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했습니다. 이 소식은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정은 이 소식을 무시했습니다.
그해 4. 13. 조선은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왜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으나, 상륙 저지를 위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최정예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1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 제2선봉대 가토 기요마사군이 속속 부산포로 상륙했고, 부산진과 동래진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조선군이 왜군과 처음 대적한곳은 부산 진성, 첨사 정발 이하 군민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성은 곧 함락되고, 성안의 백성 3,000명이 살육당하였습니다.
곧이어 동래산성에서는 송상현 등이 죽기로 싸우다 모두 전사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왜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왜인들의 이상징후를 느끼고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전력에 차이가 나 이런 준비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송상현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까지 합세해 왜군과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무참히 패배했고,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한 뒤, 여자, 어린아이 등을 가릴 것 없이 5천의 관민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최근의 발굴과 연구에 의해, 다음의 충격적인 사실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왜군은 단순히 전투 과정에서 동래성의 백성과 관군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전투가 모두 끝난 후 5세 정도의 유아의 머리에 지근 거리에서 조총 조준사격을 하고, 주저앉혀진 20대 여성의 두개골을 위에서 수차례 칼로 내려치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어린 아이, 여성 등을 포함한 무수한 민간인들을 대놓고 학살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학살은 단순히 “저항하면 다 죽인다”는 시위를 하기 위한 목적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군은 왜란 내내 조선 군민에 대한 학살을 계속했고, 돌아가는 그 날까지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문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러한 히데요시의 명령은 전장에서 조선인을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가 그의 관심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장의 왜장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인과 방화와 강간은 왜군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위였고,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자행된 조선판 킬링필드의 현장이 동래성이었으며, 왜군의 이러한 만행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저런 저런 개, 소, 말, 돼지 같은 놈들, 아주 썩을 넘들, 오살할 놈들이여 눈감으면 코베어 간단 말이 저때 부터 유래 되었다하니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