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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열국지시리즈

열국지 21-30

by 恒照 2020. 1. 3.

# 熱國誌 21

 

** 아! 강화되는 秦王의 경호

 

 

太子 丹又와 태부 국무가 田光 선생을 찾아 갔을때, 전광선생이 樊於期 장군의 망명을 받아 들이라고 한 것은 오늘과 같은 일을 미리 예상한 때문이었을까?!

또한 번어기 장군의 殺身成仁을 미리 예상하고 형가에게 大任을 맡으라고 권유하였을까?...

 

형가는 스승의 예지력에 감탄하며 번어기 장군과의 대화 내용을 태자 단우에게 전달하였다. 상세한 전말을 전해들은 태자는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다음날 아침, 太子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번어기 장군의 머리없는 屍身을 수습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난 後, 번어기 장군의 수급을 비단 보자기에 몇 겹으로 싼 다음, 예리한 비수 한 자루를 형가에게 내주며 말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바로 행차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 수하에 진무양(秦舞陽) 이라는 칼을 잘 쓰는 소년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데리고 가셔서 그 아이로 하여금 秦王을 죽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무양이라는 소년은 어떤 소년입니까 ?"

"이를테면 소년 깡패의 두목쯤 되는 아이인데, 싸움도 잘하거니와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 하는

아이입니다."

"이런 일에는 지혜와 담력이 필요한데 사람 잘 죽이는 재주만 가지고는 안 되옵니다. 제가 혼자 갈 테니, 진무양은 따라 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선생은 선물만 바치고 秦王을 죽이는 것은 그 아이에게 맡겨야 제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그러니 꼭 데리고 떠나 주소서."

荊軻는 웬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태자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므로 진무양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며칠 후 형가는 秦나라 국도(國都) 함양에 도착하여 진왕의 총신(寵臣: 총애받는 신하) 몽가(夢嘉)를 만나 진왕에게 드릴 폐백( 번어기의 수급과 독항 지방의 지도)를 내보이며, 秦王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몽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확인해보고 크게 기뻐하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연유로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오게 되었소 ?"

형가가 대답하기를,

"燕王은 평소에 秦王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므로 秦王께서 저희 燕나라를 형식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만 해 주신다면 기꺼이 秦王 전하의 번신(藩臣)이 될 생각을 하고계시옵니다. 그런데 때마침

번어기가 秦王 전하를 배반하고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던바, 燕王은 그의 배신 행위를 내심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던 차, 기회가 닿자 그를 잡아들여 목을 베어 주시면서 秦王 전하께 갖다 바치라고 하셔서, 제가 이처럼 가지고 왔사옵니다."

 

"당신이 이런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대왕 전하께서는 연왕의 忠心을 매우 기쁘게 여기실 것이오. 그러면 내가 이 선물을 대왕전에 곧 갖다 바치겠소."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왜 안 되겠다는 말이오 ?"

"燕王께서 저에게 분부하시기를, 이 선물은 제가 직접 秦王 殿下께 바치도록 하라는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 "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중간에 사람을 통하여 바쳤다가, 혹시 잘못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인 것으로 아옵니다."

 

몽가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워낙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직접 바치고 싶어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소이다. 그러면 대왕전에 여쭈어서 내일 아침에 당신이 大王殿에 이 선물을 직접 바칠 수 있도록 주선해 보리다."

 

다음날 아침, 형가는 몽가의 인도를 받으며 秦舞陽과 함께 함양궁으로 입궐하였다.

秦나라의 大闕에 들어가려면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궁문(宮門)을 다섯 개나 통과해야 했다.

소년 진무양은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녀석아 ! 떨지마라.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큰일난다."

형가는 진무양에게 귀엣말로 조용히 타일렀다.

 

이윽고 마지막 중문을 들어서니, 진왕은 저 멀리 정전(正殿) 용상(龍床) 위에 위엄을 갖춰 앉아 있었고, 돌층계 아래 좌우에는 重臣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형가와 진무양은, 돌층계 아래에 미리 깔아 놓은 돗자리까지 나아가 진왕 앞에 고두숙배(叩頭肅拜 : 이마를 바닥에 소리나게 찧으며 王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 ~ 슬프게도 丙子胡亂때, 인조가 三田渡에서 淸太宗에게 항복의식을 할때도 이 의식을 했음을 기억하고 그러한 수모를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함을 다짐합시다.)하니, 秦王은 두 사람을 굽어 보며 근엄한 음성으로 말한다.

" 燕王 喜가 나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 왔다고 들었는데, 풀어보시오."

 

荊軻는 樊於期 장군의 수급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두 손으로 받들고 층계를 올라가 秦王에게 바쳤다.

진왕은 상자 뚜껑을 손수 열어 번어기의 수급을 친히 검사해 보더니 흔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번어기의 수급이 틀림 없구먼 ! "

그리고 이번에는 좌우의 중신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배신자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하다는 사실을 경들도 깊이 인식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형가를 다시 보면서 물었다.

"선물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무었이오 ?"

또 하나의 선물이란, 독항 지방의 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 소년이 올려 드릴 것이옵니다. .... 舞陽아 ! 네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를 대왕전에

바쳐라."

진무양이 들고 있는 상자 속에는 태자 단우가 하사한 비수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진무양이 그 상자를 들고 秦王 面전으로 올라가면서 전신을 와들와들 떠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중신들이 모두 수상하게 여기자

형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시골뜨기 어린애가 어마어마한 大闕에 들어오니까 겁에 질려 온 몸을 떠나봅니다.

너 대신에 내가 대왕전에 선물을 바치겠으니, 그 상자를 이리 가져오너라."

형가는 비수가 든 상자를 秦王 앞으로 들고 올라와,

"독항 지방의 지도는 이 상자 속에 들어 있사옵니다. 지도가 보자기로 여러 겹 싸여 있사오니, 대왕께오서 친히 풀어 보시옵소서."

 

秦王이 겹겹이 싸여 있는 보자기를 하나씩 끌러 보니, 그 안에는 서슬 퍼런 비수가 한 자루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

그 순간 형가는 오른손으로 비수를 움켜잡고 , 왼손으로는 진왕의 옷소매를 다그쳐 잡으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내리 찔렀다.

그러나 秦王은 원래 武術이 능한 자라, 기겁하여 놀라 몸을 피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잘리고 몸은 재빠르게 피했다.

 

형가는 비수를 움켜잡고 도망가는 秦王을 재빠르게 쫒아갔다.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몸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검이 워낙 길어서 빠져 나오지를 않았다.

형가는 비수를 꼬나 들고 秦王을 쫒고, 秦王은 기둥을 둘러싸고 쫒겼다.

군신들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秦나라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宮中에 들어올 때에는 무기를 몸에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왕의 호위 무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宮門 밖에 있었다.

너무도 순식같은 일이 일어나다보니 밖에 있는 호위 무사들을 불러들일 경황이 없었다.

 

쫒고 쫒기는 숨가뿐 추격전이 계속되는 동안, 시의(侍醫) 하무차(夏無且)가 허리에 차고 있던 약주머니로 형가의 얼굴을 내리갈겼다. 그리하여 형가가 잠시 비틀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大王이시여 !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시옵소서."

 

秦王은 그제서야 몸을 피해가며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니, 그제서야 검신(劍身)이 쑤욱

뽑혀 나오는 것이었다. 秦왕은 劍을 뽑자마자 형가를 내리쳤다.

피하던 형가는 왼쪽 다리가 잘리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秦王의 가슴을 향하여 힘차게 비수를 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날래게 피하는 秦王을 스쳐가 기둥에 박혔다. 그러자 秦王은 형가에게 덤벼들어 長劍으로 닥치는대로 내리치고 찔러댔다.

형가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절규하였다.

 

"아아, 슬프다 ! 네놈을 단숨에 찔러죽일 수가 있었는데, 天運이 따르지 않는구나 ! "

"이놈이 아직도 아가리를 놀려?! "

秦王은 괴성을 지르며, 형가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형가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나를 죽여도, 내 정신만은 죽이지 못할 것이다. 天意를 유린한 극악무도한 침략자의 말로가 어찌 되는지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 "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秦王은 형가의 屍身을 걸래처럼 갈기갈기 찢고 조각 내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秦王은

"이 시체 조각을 모두 주워서 기름불에 태워 버려라 !...

 

秦王은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자 다시 분부했다.

"오늘의 위급상황을 면하는 데는 侍醫 夏無且의 공로가 지대하다. 그에게 황금 2백 일(180 Kg)을 하사하노라."

 

이리하여 秦王을 암살하려던 刺客 荊軻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秦王에 대한 警護는 그야말로 철통같이

바뀌게 된다.

 

(그러게 秦舞陽인지 어린애인지 데려가기가 싫거나 웬지 찜찜하면, 처음부터 한사코 거절했어야지!..

쯔쯔쯔..

 

 

 

<계속 >

 

 

# 熱國誌 22

 

 

** 燕, 魏의 멸망.

 

秦王은 荊軻의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으로 大 怒하여, 趙나라에 주둔중인 왕전 장군에게 20 萬 군사를 추가로 보내 면서 燕나라를 쳐서 王族과 重臣들은 씨도 없이 죽여 없애라는 命을 내렸다.

이에 왕전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燕으로 쳐들어가니 燕軍은 추풍낙옆 처럼 쓰러져갔다.

 

秦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거듭한 燕王은 城문을 굳게 잠그고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秦軍의 기세가 너무도 막강하여 우리로서는 대항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

중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오늘날 이와같은 환란을 겪게 된 것은 오로지 태자의 잘못 때문이옵니다. 태자가 암살 사건을 일으키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변란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結者解之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킨 太子의 수급을 秦王에게 베어 바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옵니다."

 

이와같이 燕나라 중신들 모두가 정신이 썩어 빠진 者 들인지라 國亂을 타개해보려는 대책이 그야말로 한심, 그 자체였다.

燕王은 한숨을 쉬면서 탄식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기로 어찌 태자의 목을 내 손으로 벤 단 말이오 ? "

중신들이 다시 말한다.

"대왕께서는 아드님이 여러 분 계시옵니다. 그러니 태자의 목숨을 국가의 멸망과 바꿀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사태가 워낙 다급해지자, 燕王은 태자를 불러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重臣들은 네가 암살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나라가 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이라도 나라가 무사하려면 네 머리를 베어 秦王에게 바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 "

 

태자 단우는 울면서 대답한다.

"小子가 秦王의 암살을 시도한 목적은 나라를 보존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소자의 목숨이 필요하다면, 소자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사옵니다. 그러나 소자의 머리를 베어 바쳐도 秦王은 우리나라에 대한 정벌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중신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 어찌하겠느냐."

 

태자는 땅을 치고 통곡하며 말한다.

"아! 重臣이라는 者들이 이처럼 썩어 빠져있으니 어찌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우리 燕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사옵니다. 이렇듯 亡할 바에는 소자는 최후까지 적과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대왕께서는 小子의 이 비통한 심정을 헤아려주시옵소서."

 

태자 단우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대궐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萬 여 명의 직속 부하들에게 비장한 어조로 말 한다.

"나라가 亡하게 된 지금 나는 敵과 싸우다 죽으려고 나가는 길이다. 나와 生死를 같이할 사람은 따라 오라 ! "

 

그러나 태자를 따라 나서는 장졸은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太子는 그들만을 데리고, 울면서 敵陣으로 돌진하였다.

태자 단우가 돌진해 간 곳은 秦將 이신(李信)의 진영이었다.

 

李信은 단우가 공격해 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나가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李信은 40 戰의 勇將인지라, 단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신은 불과 10 여 合을 싸우다가 마침내 단우의 목을 베어 버림으로써 전투에서의 승기를 잡았다.

 

한편, 왕전은 이신과 단우가 겨루는 기회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물밀듯이 쳐 들어가 燕王을 생포함으로써 燕나라를 단숨에 괴멸시키고 말았다.

燕나라는 <戰國 七雄> 中,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로 소공석(召公奭)이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燕王으로 책봉된 이후, 34 代 898年 만에 秦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亡해버리고 말았다.

 

이신은 태자 단우의 머리를 함양으로 가지고 돌아와 진왕에게 승전 결과를 보고하니, 진왕은 이신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燕나라를 평정했으니 이제는 내친김에 楚나라도 쳐 없애야 하겠소. 楚는 일찍이 燕과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서 우리를 괴롭혔던 일이 있음으로 , 우리는 이번 기회에 楚에 대한 복수도 해야 하오. 장군은 군사를 얼마나 가지면 楚를 정벌할 수 있겠소 ?"

 

이신은 燕과의 戰爭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마음이 교만해져, 대왕의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20 萬 군사만 주시면 臣이 기필코 楚를 섬멸시키겠습니다."

그러나 秦王은 신중을 기하려고 왕전 장군을 불러, 이신과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이 돌아왔다.

 

"楚는 본시 强國이기 때문에 60 만 군사는 가져야만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알겠소. 물러가서 편히 쉬시오."

왕전이 물러가자, 진왕은 곁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돌아 보며,

"왕전 장군이 이제 너무 늙었나보오. 이신은 20 萬이면 楚를 섬멸시킬 수가 있다고 하는데, 왕전은 60 萬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러고서야 어찌 勇將이라고 할 수 있겠소 ?"

 

그러면서 이신과 몽이(夢怡) 두 장군에게 군사 20 萬을 주어, 초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승상 이사가 진왕에게 품한다.

"楚와 魏는 동맹 관계라, 우리가 楚를 치면 魏軍이 반드시 가세(加勢)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楚를 치기 전에 먼저 魏나라를 쳐야 합니다."

秦王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魏나라부터 치기로 합시다. 그러면 어느 장수를 보내 위를 섬멸할 수가 있겠소 ?"

승상 이사는 신중히 생각해 보다가 대답하는데,

"왕전 장군을 총 사령관으로 보내시면 위를 틀림없이 정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진왕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왕전 장군은 너무 늙어서 안 되겠습니다. 이신장군은 20만을 가지고 초를 섬멸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왕전 장군은 60 萬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니, 이렇게 무력해진 老將이 어떻게 魏를 제압할 수 있겠소?."

 

이사는 견해를 달리 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왕명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왕전 장군이 너무 늙어서 쓰시기 곤란하시다면, 그의 아들 왕분(王賁)을 보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王賁 장군은 나이는 젊어도, 아버지를 닮아 용감 무쌍한 장수이옵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왕분을 이 자리에 부르시오."

 

秦王은 왕분을 불러 말했다.

"승상의 천거로 그대를 討魏(토위 : 위를 토벌함)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군사 10 萬을 줄 것이니, 그대는 魏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도록 하라."

 

王賁으로서는 파격적인 영전인지라, 크게 감격하며 맹세한다.

"小臣, 대왕 殿下의 과분하신 은총에 보답할 만한 전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왕분은 그날로 10 만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위나라 도성인 大梁城 부근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폈다.

 

위왕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하여 군신들에게 물었다.

"秦將 王賁이 10 萬 군사로 우리 都城을 에워싸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 "

늙은 重臣이 대답한다.

"臣이 보옵건데, 王賁이라는 자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옵니다. 따라서 그는 병법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가 거짓 항복 계략으로 그를 생포하면 어떠하겠습니까 ? "

 

"그것 참, 신묘한 계략이오. 그러면 사술(詐術)을 써서 왕분을 생포해 버리기로 합시다."

위왕은 곧 왕분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할 뜻을 통보하였다.

왕분은 위왕의 서찰을 받아 보고 魏나라 사신에게 말한다.

 

"위왕이 항복을 하시겠다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있겠소이까? 그러면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고 기다릴것이니,위왕께서 우리 군영으로 직접 오셔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調印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소. 나는 그 문서가 있어야만 大王殿에 보고를 올릴 수가 있으니, 위왕께서는 반드시 내일 정오경, 나를 찾아 주시도록 전해 주시오."

"잘 알겠습니다. 곧 돌아가서 장군의 뜻을 전달해 올리겠습니다."

魏의 사신은 왕분이 자기네의 술책에 걸려든 줄로 알고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왕분은 魏의 使臣을 돌려보내고 나서 장수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魏王은 내가 나이가 어린 것을 깔보고 나에게 거짓 항복한다 하고 있으니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오."

장수들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어떤 점이 위왕의 항복이 거짓이라고 판단하시옵니까 ?"

 

"생각해 보시오. 그들도 많은 장수와 군사가 있을 터인데,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요 ? 위왕은 거짓 항복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놓고, 오늘 밤, 야음을 이용하여 우리를 기습하여 일거에 승리를 거둘 계획을 세웠음이 분명하니, 우리는 저들의 계략을 역이용, 오늘 밤 안으로 끝장을 내버려야 하겠소."

그러면서 왕분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軍令을 내렸다.

 

"우리 군사 8만 명은 4 萬 名씩 두 隊로 나누어 대량성 부근에 잠복해 있도록 하라. 그러다가 오늘 밤 위왕이 우리 본진을 기습하려고 성을 나오거든, 군사의 행렬이 모두 끝나고 성문이 닫히기 전 , 적의 본거지로 일시에 달려 들어가 대궐을 점령하라. 나는 나머지 군사를 2 隊로 나누어 거느리고 本陣에서 20 里 밖으로 후퇴해 있다가, 1隊는 敵이 내습해 올 시각에 후방으로 돌아가 적의 후미를 공격 할테니, 20 里 밖으로 후퇴하여 기다리던 나머지 1隊는 정면으로 적을 공격하여 위왕을 단번에 생포하라."

이렇게 왕분은 적의 야간 기습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세워놓았다.

 

한편, 魏王은 사신이 왕분을 만나 보고 돌아오자 사신에게 물었다.

"왕분을 만났더니 그 자가 뭐라고 하더냐 ?"

"왕분은 우리가 항복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기네 군사들을 무장 해제까지 시켜 놓을 테니 大王께서 내일 정오까지 자기를 직접 찾아오셔서 조인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魏王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 그래?!.. 왕분이란 자가 우리의 위장 항복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니, 그자야말로 젖비린내 나는 철부지가 틀림 없구나. 그러면 우리는 오늘 밤을 기하여 적을 일거에 섬멸하고 왕분을 생포하리라."

 

魏王은 호언 장담하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全 軍을 총동원하여 親히 秦軍 섬멸의 선봉에 올랐다.

대량성 인근에 매복해 있던 秦軍은 魏王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城안으로 밀고 들어가, 魏의 본거지를 손쉽게 점령해 버렸다.

 

魏王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군사를 휘몰아쳐서 秦의 本營으로 기습해 쳐들어 갔으나 적은 한 명도 보이지않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魏王은 크게 당황하여 급히 군사를 돌리려고 하는데, 돌연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오더니 어둠 속에서 적군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게 아닌가!?..

 

魏王은 당황하여 급히 大梁城쪽으로 도망을 치고자 하는데, 이번에는 왕분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다.

"魏王은 왕분의 칼을 받으라 ! "

 

눈 깜짝할 사이에 , 왕분의 칼이 달빛에 번쩍이자 이어서 魏王의 머리가 馬上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리하여 魏는 나라를 일으킨지 8代 179年 만에 秦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 熱國誌 23

 

 

** 百戰老將의 智略

 

젊은 장군 왕분(大將軍 王翦의 아들)이 위왕의 사술(詐術)을 역이용하여 위나라를 일거에 패망시키고 함양으로 개선해 오자, 秦王은 그를 손수 맞으며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젊은 장수라야 해 !"..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李信 장군에게 군사 20 萬으로 楚를 치라는 命을 내린다.

李信은 몽이(夢怡) 장군과 함께 20만 군사를 이끌고 자신 만만하게 楚나라를 향해 떠났다.

楚나라에서는 정탐꾼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급히 중신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老臣 부추(負芻)가 王에게 아뢴다.

 

"지금 秦將 李信과 夢怡가 군사 20 萬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오고 있으니, 이들을 조속히 무찌르지 아니하면 국가의 存亡이 위태롭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楚王은 대장군 항연<項燕>을 불러 명한다.

 

"장군에게 군사 20萬을 내어줄 테니, 곧바로 나가 그들을 섬멸하시오."

항연은 수많은 楚將 중에서도 맹장으로 소문난 장수였다. 어명을 받들자 즉석에서 대답했다.

"이신과 몽이는 젖비린내 나는 장수들이오니, 무엇을 두려워 하오리까 ? 臣이 곧 달려나가 그들을 생포해 와 대왕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項燕은 휘하 장졸에게 말했다.

"이신과 몽이는 兵法도 모르는 우장(愚將)들이다. 내가 먼저 단신으로 나가 싸우다가 거짓으로 쫒겨 올 테니, 그대들은 산협(山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나를 추격해 오거든 일시에 산 아래로 내달아 가차없이 공격을 퍼부어라. 그리하면 저 둘을 쉽게 생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항연은 이러한 작전 계획을 미리 시달해 놓고, 소수의 군사를 대동하고 秦軍 앞으로 나아가 단기 필마(單騎匹馬)로 적진을 향하여 달려 나가며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젖비린내 나는 李信과 夢怡는 이리 나와, 대장군 항연의 청룡 은월도(靑龍銀月刀)를 받으라 ! "

 

그러자 이신과 몽이는 약이 바짝 올라 長劒을 뽑아들고 항연을 향하여 내달리며 외쳐대었다.

"오냐 ! 네가 , 楚나라의 늙은이 항연이냐 ? 오늘 그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리라 ! "

양쪽의 장졸이 숨죽이고 지켜 보는 가운데, 들판 한 복판에서 1대 2의 장수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창 검이 불꽃을 내며 부딪치기를 30여 합 , 항연은 일부러 숨을 헐떡이며 쫒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이신과 몽이가 항연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격하기를 삼십 여 里,

그러나 산협이 가까워 오자, 이신은 추격을 멈추고 몽이에게 말했다.

 

"敵은 필시, 성부 산협(城父山峽)에 陣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오늘은 일단 돌아갔다가 부대를 정비하여 수일 내에 본격적으로 쳐들어가기로 합시다. 우리가 동서 두 방면으로 일시에 쳐들어가면, 적을 틀림없이 괴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오."

몽이도 그 작전 계획이 옳다고 여겨, 그들은 추격을 멈추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楚將 項燕은 이신과 몽이가 끝까지 추격해 올 것으로 알았는데, 중도에서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크게 실망하였는데,

급히 첩자를 보내 알아보니 적은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本陣에서 30리 후방으로 이동 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楚將 항연은 첩자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졸들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秦軍은 부대를 再편성하기 위해 30 里를 후퇴하고 있다하니, 이때야말로 敵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부대가 후방으로 이동할 때에는 경계가 소홀해지는 법,

우리가 지금 곧 지름길로 저들을 앞질러 가서 그들이 지나갈 유곡 산협(維谷山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 모조리 몰살해 버린다."

 

이에 楚軍은 빠른 속도로 지름길을 가로질러 가 維谷 山狹에서 秦軍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楚將 項燕의 예상대로 이신과 몽이는 부대의 再정비를 위한 이동이라 경계도 별로 하지않고 이동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곡 산협을 절반쯤 통과했을 때, 楚軍은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함성을 지르며 구름떼처럼 전후좌우 사방에서 들고 나와 벼락같은 기습을 감행한다.

 

무심하게 이동중이던 秦軍은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으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楚軍은 닥치는대로 秦軍을 휘몰아쳐 죽였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이신과 몽이는 도저히 楚軍을 당해낼 수 없어 그들도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지없이 참패하고, 겨우 5 萬 여 명의 군사만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왔다.

20 萬 군사만 주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장담하고 출정했던 李信으로서는 진실로 면목없는 귀환이었다.

 

李信과 夢怡가 楚나라의 名將 項燕에게 大敗하고 돌아오자 秦王은 大怒하여,

"당장 이신과 몽이의 목을 쳐라."

하고 추상같은 命을 내린다.

그러자 군신들이 간한다.

"殿下, 전쟁에서 一勝 一敗는 兵家之 常事라고 하였사옵니다. 더구나 敵將 항연은 智勇을 겸비한 名將이므로 이신과 몽이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장수들이었으니, 바라옵건데 저들의 그동안의 전공을 생각하시와, 斬刑만은 免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秦王은 그제서야 수긍되는 점이 있는지 이렇게 말한다.

"하기는 왕전(王翦)

장군은 60 萬은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李信의 말만 믿고 그에게 20 萬 의 군사만 주어 보냈으니, 내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아무튼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하겠으니, 王翦장군

을 급히 모셔오도록 하오."

 

王命에 의하여 老將 왕전이 御殿에 출두하였다.

그러자 秦王은 친히 壇下로 내려와, 왕전의 두 손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

"내가 불민하여 李信의 말만 믿고 장군의 말을 무시했다가 오늘의 참패를 초래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장군은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나와 함께 지략을 모아 楚를 다시 치기로 하십시다. 나는 오로지 장군만을 믿겠소이다."

 

누구에게나 절대 君主로 군림해 왔던 秦王으로서는 처음있는 겸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지나친 겸손에, 왕전은 오히려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느껴졌다.

노장 왕전은 고개를 숙인채 잠시 깊은 명상에 잠긴 後,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王의 龍顔에는 언제나 패기와 오만이 넘쳐 흘렀지만, 오늘따라 왕의 얼굴에는 우수와 불안감이 짙어보였다.

 

(命令만 내리면 되거늘, 오늘은 어찌하여 臣下인 나에게 이처럼 간청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楚軍에게 敗한 충격이 너무도 컸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楚를 이길 장수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나에게 부탁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왕전은 다시 한 번 불안감이 스쳐갔다. 만약, 자신이 楚를 정벌하고 나면, 秦王은 자기를 살려 둘 것 같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小臣은 老弱하여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사오니, 大王께서는 다른 勇將을 등용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秦王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사정하듯 말했다.

"내가 믿을 사람은 장군밖에 없으니, 수고스럽지만 내 말을 꼭 들어주기 바라오."

 

왕전은 대왕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더 사양했다가는 오히려 '괘씸죄'로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질 것같았다.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대왕께서 기어이 老臣을 쓰시겠다면, 어찌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러나,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楚를 섬멸시키려면 군사가 60 萬은 되어야 하옵니다."

"알겠소. 과인이 군사 60 萬을 내어드릴 테니, 楚를 꼭 정벌해 주시오."

 

이리하여 백전老將 王翦은 60만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60 萬이라면 秦나라 百萬 대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강한 군사였다.

(내가 만약 이처럼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楚를 정벌하고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오게 되면, 大王은 나의 존재가 두려워 그때는 나를 兎死狗烹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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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將 왕전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가 2천 여 년이 지난 현대에 재현 된 사건이 있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이라고 한 이 말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은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미국의 五星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 Douglas Mac Arther, 1880 ~ 1964 >元帥가 퇴임전, 의회 연설에서 단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아이젠 하워 장군<終戰 後, 미국 대통령에 당선>도 당시에는 맥아더장군의 참모에 불과하였었다.)

 

요즈음, 이런 名言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은 것은 교육의 잘못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의 국가관을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교육 당국, 나아가 집권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

 

* 심지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훼손하려는 불순세력에 대해서도 미온적으로 對하고있는 현실임에랴!...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불의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이 유엔 총회에서 16개 연합군의 참전을 결의 함으로서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UN軍 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었고 그는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전격적으로 감행하여 전쟁 판을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맥아더 장군은 여세를 몰아 서울 수복 후, 38 선을 그대로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후퇴를 거듭하던 김일성은 中共의 毛澤東에게 화급히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모택동은 日帝시대, 抗日 전투부대로 알려진 공산당의 '八路軍'을 한국전의 주력부대로 참전시킴으로서 한국전은 국제전 성격으로 확대되었다.

 

추가하여, ~

中國 西安은 2000 여 년 동안 과거의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 들의 首都였다. 周나라의 武王 때부터 漢, 魏, 西晋, 秦, 隋, 唐까지, 唐나라 때는 長安으로 불린 西安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王朝의 수도로 오늘날의 北京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중국의 國都였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지만 아방궁도 이곳에^^)

 

그 西安을 여행하다보면 일정 중에 西安에서 120km 쯤 떨어진 華山을 돌아 보게되는데, 케이블 카를 타기 위해 내린 휴게소 가까이에 저들이 자랑하는 '八路軍 의 銅像'이 나온다..

毛澤東은 抗日전쟁에 이어 蔣介石의 국민당 軍을 격퇴하고자 "산넘고 물건너 임무를 완성한 그 부대", 즉 八路軍을 對 한국戰에 투입한다.

北進을 거듭하던 UN軍은 예기치 않은 中共軍의 대거 참전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951 년의 1.4 후퇴)

 

3~4 명이 궐기하는 그 팔로군의 銅像을 보았을 때,

느낀 묘한 감정!!.. 그곳을 다녀온 독자 제위께서도 以心傳心 저와 같은 심경이었으리라..)

 

이때, 人海戰術로 물밀듯 몰려오는 中共軍과 맞서 싸우던 맥아더 장군은 단판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불과 6 년 前, 일본을 항복시켰던 원자 폭탄을 만주에 투하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 1884 ~ 1972>은 제 3 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휴전을 원하고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큰 것 한방으로 中共의 추가 파병을 막고, 거대한 인구와 영토를 가진 중공의 기세를 사전에 꺾어버림으로써 전쟁의 승기를 UN軍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트루먼은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가 개선 장군으로 귀환하여 정치 일선에 나선다면, 자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자가 될 것으로 판단하여 UN군 총사령관 직에서 맥아더 장군을 '명령위반'罪로 소환, 해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 트루먼을 '투가리'< 흙으로 만든 깨지기 쉬운 질그릇 >로 비하, 겁쟁이로 戱畵化하기도 했었다.

 

무엇이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

역사에 假定이란 있을 수없으나,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땅을 칠 수밖에 없는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라!...

 

지난 역사는 오늘도 말이 없다.ㅜㅜ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은 2千 年 前, 절대 봉건왕조의 秦나라 시대, 秦王과 왕전 (王翦)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史實의 현대판과 흡사하다할 만하다.

 

 

왕전(王翦)은

그런 의구심이 없지 않아, 패수(覇水)까지 전송나온 秦王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老臣은 大王殿에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인지 말씀해 보오."

"황공한 말씀이오나, 老臣이 이번에 功을 세우고 돌아오면, 여생을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널찍한 장원(莊園)이나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걱정 마오. 楚를 정벌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슨 소원인들 들어 드리지 않겠소."

"다른 욕심은 아무것도 없사오니, 노후에 화초를 가꾸며 농사나 지어 먹고 살 莊園 하나만 하사해 주시면 되옵니다."

"하하하 ! 걱정 마시래두 그러시는구려."

秦王은 크게 웃었다.

 

 

王翦(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楚나라로 가는 도중에도, 秦軍 상황을 보고하는 파발마(擺撥馬)의 보고서 말미에,

"小將이 살아서 돌아가게 되거든 莊園을 꼭 하나 하사해주시옵소서."

하는 청원을 세 번이나 올렸다.

 

왕전의 심복 장수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 왕전에게 직언 을 올린다.

"장군께오서 物慾을 너무 밝히시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으실런지요? "

그러자 왕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사실인즉, 내가 物慾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大王께서는 본시 난폭하신 면이 있는데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품까지 가지고 계시지 않으냐 ? 그런데 내가 우리나라 全 군사의 3분의 2에 이르는 60 萬 大軍을 이끌고 나왔으니, 대왕께서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구심을 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 그래서 나는, 아무런 野心도 없는 사람임을 大王께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낼때마다 <莊園 하나만 하사해 주십사> 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다."

심복 장수는 그 말을 듣고, 왕전의 용의 주도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전은 楚나라의 國都인 형주성(荊州城) 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형주성 근처에 陣을 치고 나서도 싸울 생각은 전혀 하지않고 참모 들에게 아래와 같은 軍令을 내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1년쯤 주둔할 예정이니, 오늘부터 군사들은 경계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참모들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장군님! 우리가 싸우러 온 것이지 농사를 지으 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안사옵니까 ?"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느냐? 楚軍은 趙, 韓, 燕, 魏 나라 等과는 格이 다른 强軍이다. 그럼으로 전쟁을 조급히 서두르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장기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만 인명 피해도 줄이고 승리할 수가 있다."

 

휘하 장졸들은 老將인 王翦장군의

원대한 작전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 列國誌 24

 

 

**王翦의 智略

 

 

한편, 楚나라는 왕전이 60 萬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긴장한다.

楚의 大將軍 項燕은 장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적장 王翦은 우리가 지난번 격파한 李信 따위의 풋나기 장수와는 비교할 수없는 百戰 老將이다. 그는 胸中(가슴 속)에 어떤 戰略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名將이니 함부로 나가 싸우지 말고 城門을 굳게 닫고 일단 수비만 하도록 하라."

 

이처럼 楚軍도 守備 일변도의 전략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敵의 의도를 알아보고자 때때로 싸움을 걸어 보기도 하였으나, 秦軍은 일체 應戰하지 않는 것이었다.

 

王翦은 날마다 장졸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배불리 먹어라. 너희들이 잘 먹고 잘 싸워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있다."

 

戰場에 나온 최고 사령관이 이렇게 나오니 사병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 입을 모아 양전을 칭송한다.

"장군님의 명령이라면, 신명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이와같이 왕전의 60 萬 大軍은 楚의 수도인 荊州城 앞에 陣을 쳐 놓기만 하고, 일체 공격할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城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楚軍이 답답해하며 스스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楚將 項燕은, 秦軍이 장기전을 펴고 있음을 알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王翦이 지략이 풍부한 백전 노장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60 萬 大軍을 무슨 수단으로 먹여 살리려고 장기전을 편다는 말인가 ? "

그러나 첩자들의 보고를 들어 보니, 왕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農事를 짓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

 

더구나,

"秦軍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린 수확이 大豊"이라는 보고가 잇따르자..

사태가 이렇게 되어간다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쪽은 자기편 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楚將 項燕은 석 달이 넘도록 城안에 갇혀있다시피 하면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게되었다.

참다못한 項燕은 副將 마충(馬忠)을 불러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린다.

 

"敵은 싸울 생각을 않고 농사만 짓고 있다고하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敵을 공격하여 무찔러버려야 하겠다.

나는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적의 後方으로 돌아가 뒤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갈 것이니, 그대는 前면으로부터 적을 쳐 나오라. 이렇게 전후에서 협공하면 秦軍을 반드시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項燕은 夜陰을 이용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진군의 후방으로 은밀히 우회하였다.

그러나,

첩보망을 거미줄처럼 쳐 놓고 있는 王翦이 그런 적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全軍을 비상 소집해 놓고 다음과 같이 독전의 말을 吐했다.

 

"兵者養之百年用之一 (병자양지백년용지일)이라고, 군사는 하루를 위하여 백년동안 양성해오는 것이다. 敵은 오늘 밤 우리의 前方과 後方에서 동시에 협공해 올 것이다. 전 후방으로부터 일시에 공격을 받게 되면 견딜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60 萬 대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내가 한 부대를 이끌고 後方에서 쳐들어올 敵軍을 기습작전으로 공격할 것이니, 다른 한 부대는 성하(城下)에 은밀히 잠복해 있다가 마충이 성문을 열고 나오거든 그 기회에 총공격을 퍼부어 형주성을 일거에 점령하도록 하라.

우리가 개선군으로 고국에 돌아가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반갑게 만나 볼 수 있느냐, 아니면 異國 땅, 楚나라의 황야에 떠도는 고혼(孤魂)으로 헤매야 하느냐는 오로지 오늘 밤 전투의 성패에 달려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같이 死力을 다하여 필승을 기해 주기 바란다."

 

王翦의 웅변은 피를 吐하 듯 간절하여, 60만 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하였다.

(흡사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벌인 '7일 전쟁'이 생각나는데 왜그럴까?..

 

단 7 일만에 '모세 다얀'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 軍은 이집트의 전투기와 탱크를 고철덩이로 만들고 全 군사력을 괴사 직전의 상태로 몰아넣은 그 전쟁이!..)

 

왕전이 군사들에게 행동 개시를 命하자, 부장(副將) 몽선(蒙先)은 30만 군사를 이끌고 은밀히 형주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리고 왕전 자신도 30 萬 군사를 거느리고, 楚軍이 우회해 올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楚將 항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적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야음을 이용, 군사들을 급히 이끌어오고 있었다.

王翦은 楚軍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전격적인 기습작전을 개시한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예기치 못한 秦軍의 습격을 받게된 項燕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렇게 秦, 楚 兩國軍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함성과 비명 속에서 창검이 번개처럼 번쩍이고,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아우성이 끝없이 교차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혼전이 이어졌다.

楚將 項燕도 楚나라 제1의 명장인지라, 전격적인 기습에 놀라 당황하면서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이 先手를 쳐 공격해 오고, 반대쪽은 守勢에 몰린 방어 위주의 반격이라 ,

승패는 이미 '뻔할 뻔字'였다.^^

 

楚軍이 크게 수세에 몰려 무너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楚將 項燕은 王翦을 상대로 敵將끼리 1 : 1의 싸움으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項燕은 대장기를 들고있는 王翦을 향하여 말을 달려 나갔다.

10합, 20합, 30합 ~...項燕과 王翦은

불꽃 튀는 창검 대결로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秦將 왕전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머리를 돌려 쫒기는체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項燕은 승부는 바로 이때다 하고,

"네 놈이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가느냐? ...."며 말에 채찍을 가하여 쫓아가 왕전을 長槍으로 찌르는 순간, 왕전이 날세게 몸을 숙여 옆으로 피하면서 長劍으로 項燕의 가슴을 가르니, 항연은 왕전의 불의의 일격에 피를 쏟으며 말위에서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百戰 老將 王翦의

虛虛實實戰法 (거짓 쫒김)에 속아서 楚의 名將 項燕이 어이없게도 속절없이 순식간에 戰死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자 왕전이 楚 軍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의 大將軍 項燕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항복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니,

모든 楚軍 將卒들은 무기를 버리고 깨끗이 항복하라."고 외치니, 楚軍 들은 크게 경악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항복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항복이란, 군인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이었기 때문이다.

 

王翦은 일찍이 敗將들의 그러한 심리를 파악하고 있었음으로,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친다.

"敗戰의 책임은 오로지 최고 지휘관에게만 있다. 모든 將卒이 함께 질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귀중한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보존하라.

누구든지 항복하는 자는 곧바로 집으로 돌려 보내, 사랑하는 부모 처자를 만나도록 해주겠다."

왕전의 이같은 제안은 모든 楚軍에게 큰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자,..

楚軍 장수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한 장수가 창검을 내던지며 말에서 뛰어내려

왕전 앞에 엎드리자 , 그 뒤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칼과 창을 버리고 왕전 앞에 무릅을 꿇는다.

文字 그대로 말할 필요도 없는 '무조건 항복'이었다.

 

왕전은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들은 전쟁에는 졌으나, 내 어찌 그대들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을 약속대로 곧 고향으로 가게해주겠소."

그러자, 槍劒을 버리고 항복한 楚軍 將卒들은 왕전을 우러러 보며 ,

"저희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장군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하며, 땅바닥에 엎드려 왕전을 향하여 연이어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왕전은 후방으로 공격해 오던 楚軍의 뒷수습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형주성으로 달려가니..

형주성에서는 副將 몽선이 이미 城을 장악한 後, 백성들에 대한 선무 공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楚王 부추(負芻)는 어찌 되었는가 ?"

왕전의 질문에 몽선이 대답했다.

"마충의 군사들을 괴멸시키고, 荊州城으로 들어오자마자, 楚王 負芻를 잡아 즉석에서 斬首해 버렸습니다."

"수고했네. 이로써 楚는 완전히 鎭滅되었구나!.. "

 

이로써, 戰國七雄 중, 강대국으로 자처해 오던 楚나라는 건국한지 41代 892 年 만에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王翦이 마침내 楚를 정복한 後, 楚를 '楚郡'으로 개칭하여, 몽선으로 하여금 '楚郡'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나머지 군사들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秦王에게 승전 보고를 올리며,

 

"小將이 大王의 命을 받들어 楚를 정벌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老臣의 소원대로 莊園을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하며 出戰에 앞서 소망했던 소원을 다시 아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의구심을 사지 않기 위한 묘책이었다.

 

秦王은 王翦의 戰功을 크게 치하하며

"장군이 아니었으면 저 强한 楚를 어찌 이처럼 쉽게 정복할 수가 있었겠소. 장군의 노력으로 天下 統一의 大業이 성큼 눈앞에 다가온 셈이오. 장군의 소원대로 장원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侯爵으로 封하여 국가 최고의 원로로 대우하겠소이다."

 

이리하야...,

 

王翦은 秦王으로부터 어떤 의심이나 견제도 받지 않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 미래를 바라보는 王翦의 처세술은 亂世를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 列國誌 25

 

 

** 戰國의 통일

 

 

화창한 어느 날,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秦王이 갑자기 王翦의 집을 찾아왔다.

절대 군주인 秦王이 臣下의 집을 몸소 찾아온다는 것은 前例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호위도 없이 혼자서 불쑥 찾아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王이 무슨 까닭으로 사전 통고도 없이 불시에 나를 찾아오셨을까 ?)

王翦은 秦王을 정중하게 맞아들이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秦王이 大將軍 왕전의 집을 직접 찾은 이유는, 그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알아보기 위함일 것이고,

또 하나는 특별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秦王은 왕전의 房에 들어서자 방안을 유심히 둘러보며 말했다.

 

"將軍이 거처하는 房에는 各國에서 노획해 온 무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정작 무기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너무도 뜻밖이구려."

 

무심코 나온 말인지는 몰라도 평소에 왕전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말 한마디로 드러났다.

 

그러자 王翦은

일부러 파안 대소하며 답했다.

"老臣이 목숨을 대왕전에 바쳐온 지가 오래이온데, 무기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

머지않아 죽을 몸, 이제는 화초나 가꾸며 간혹 낮잠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옵니다."

 

秦王은 그제서야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한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오? 아무리 年老하셨기로 이 나라에서 장군의 智略과 勇猛을 당할 장수는 아무도 없을 것이오."

"과분하신 칭찬에 小臣,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나는 事實을 말했을 뿐이오. 그래서 오늘은 장군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 왔소이다."

 

王翦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大王 殿下께오서 臣下인 小臣에게 '부탁'이란 말씀은 당치 않사옵니다. 大王께서는 오직

'命令'만이 계실 뿐, 어느 누구에게도 '부탁'이란 있을 수 없는 말씀이옵니다."

 

秦王은 그 말이 흡족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과인도 그런 法度를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將軍은 지금까지 統一 天下의 聖業에 너무도 공로가 컸기 때문에, 오늘은 과인이 특별히 직접 찾아온 것이오."

 

"聖恩이 망극하옵니다. 大王께오서 洪福이 풍성하시와 통일 천하를 완수하실 날도 머지않은 줄로 아뢰옵니다."

"음 ,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가 정복하지 못한 나라는 오직 제나라 하나만 남았을 뿐이오. 그래서 이왕이면 장군이 제나라까지 정벌하여 天下統一의 마지막 장을 장식해 주기 바라오. 내가 장군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소이다."

 

王翦은 王이 자기를 부르지 아니하고 직접 찾아온 이유를 그제서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오늘날까지 戰國 다섯 나라를 정벌하는 데 있어서 왕전의 공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였다. 왕전은 장장 25 년 간에 걸쳐, 어느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일이 없었지만, 특히 가장 최근에 치른 趙와 楚같은 강대국들조차, 쉽사리 섬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왕전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秦王은 왕전의 그러한 공로를 잘 알고 있기에, 이번에 마지막 하나 남은 제나라 정벌을 몸소 왕전의 집까지 찾아와 부탁하는 것이었다.

 

王翦은 제나라를 섬멸하는 데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나서서 제나라까지 정벌하여 天下를 통일하게 되면 그때가서 秦王의 생각이 어떻게 變하게 될지,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권위 의식이 하늘에 닿을 듯이 강렬한 왕임에 있어서랴!...

 

(절대권자는 자기보다도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者가 있게 되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제거해 버리는 것이 통치자의 생리가 아니던가 ? )

그런 생각이 들자, 왕전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제나라 정벌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리를 정중하게 조아리며 말했다.

 

"大王께오서 老臣을 이처럼 과분하게 신뢰해 주시는 것은 분에 넘치는 영광이옵니다. 하오나, 노신은 지금은 늙고 病이 들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이옵니다."

秦王은 그 말을 듣자 크게 실망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경이 아니면 齊나라를 정벌할 장수가 없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늙고 병든 老臣이 아니어도 쟁쟁한 장수가 많사온데, 어찌 제나라 정도를 상대로 전투를 능히 치룰 장수가 없사오리까 ? 그 점은 안심하시옵소서."

왕전의 말을 듣고, 秦王은 잠시 침묵해 있다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 아니면 제를 칠 만한 장수가 있을 것 같지 않구려. 이번 전쟁이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니, 경은 수고스럽더라도 한 번만 더 애써주시오."

 

王翦은 王이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록 더욱 불안하였다. 말은 그래도, 막상 자신이 제나라까지 정벌하여 天下

統一을 이루어 놓고 나면 ,그때는 필시 제거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전은 이렇게 둘러댄다.

 

"臣은 이미 大王殿에 목숨을 바친 몸이옵니다. 싸워서 승리할 자신이 있다면 어찌 出征을 주저하겠나이까? 그러나 병든 몸으로 자신도 없이 중책을 맡아 출정하였다가 敗北(패배)라도 하는 날이면 그런 不忠이 없사옵기에, 부득이 사양을 하는 것이옵니다."

"으음.., 그러면 어느 장수로 齊를 치게 하는 것이 좋을지, 경이 적임자를 추천해 주시오."

 

王翦은 몇 사람의 장수 이름을 열거해 보였다.

그러나 왕은 그때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무개는 勇氣는 있어도 智略이 부족하고, 또 아무개는 智略은 있어도 부하들을 통솔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안 되오."

 

王翦은 王의 예리한 지적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 將軍들의 장단점을 이처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왕전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장수들이 마땅치 않으시다 하오시면, 젊은 장수를 한번 등용해 보심이 어떠하겠사옵니까?"

"젊은 장수로서 그만한 재목이 누가 있소 ?"

"王賁은 제 자식이기 때문에 추천하기를 꺼려 왔사옵니다만, 그 아이라면 중책을 충분히 감당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아참, 그렇구려 ! 내가 왜 王賁을 진즉 생각하지 못했을까 ? 王賁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魏를 치는데 전공이 대단했었지요. 그러면 경 대신에 아드님을 '征齊司令官'으로 임명하기로

하겠소."

 

이리하여 王賁은 30 세밖에 안 되는 젊은 장수로서 40 萬 대군을 거느리고 멀리 제나라로 출정하게 되었다. 왕분이 무장을 갖추고 장도에 오르자, 秦王은 출정식에 나와, 왕분의 어깨를 정겹게 두드리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천하를 통일하려고 동분서주하기를 長長 25년, 왕전 장군의 혈전 고투로 이미 다섯 나라를 통합하였고, 이제 齊나라 하나만 남았을 뿐인데, 왕전 장군에 이어 그의 자제인 왕분 장군이 지금 마지막 장도에 오르니 秦 나라는 두 분 부자 덕택으로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소. 그러니 장군은 이번 出征에서 齊나라를 반드시 정벌하여 청사에 빛나는 名將이 되어 주기를 바라오."

 

王賁은 비록 나이가 30밖에 안 되는 젊은 장수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 王翦으로부터 兵法과 武術을 배워서 지휘 통솔력과 智略이 남달리 탁월하였다. 이러한 王賁이 40 萬의 大軍을 거느리고 旗幟槍劍(기치창검)을 번쩍이며 齊나라 원정길에 오르니 秦軍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王賁은 40 萬 대군을 이끌고 20여 일 만에 遙東(요동 : 우리 역사와 사연이 많은 곳)에 이르러, 齊나라 都城인 임치성을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산 허리에 陣을 치고 敵陣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齊나라는 秦과의 지리적인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기 때문에 秦王이 아무리 無道한 침략자라도 자기 나라만은 침략해 오지 못하리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조차 못 했던 秦이 40 萬 대군으로 침공해 왔다고 하니, 齊王 '建'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군신을 모아 놓고 말했다.

 

"秦은 兵力을 40萬 명이나 몰고 왔다는데, 10 萬 밖에 안되는 우리 군사들을 가지고 어찌 적을 막아내겠소? 좋은 의견 들이 있으면 말씀을 해보시오."

"...."

 

군신들은 깊은 한숨만 쉴 뿐 말이 없었다. 秦軍이 대거 侵攻해 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齊王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경들은 왜 말이 없소. 나라가 亡하지 않으려면 무슨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게 아니오 ?"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老 大臣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秦軍은 비록 4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오나 ,그들은 水陸 數千 里를 행군해 왔기 때문에 모두가 지쳐 있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그 많은 군사들에게 군량을 보급하기도 이만저만 어려운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다행히 우리는 城안에 10년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고 있사오니, 섯불리 많은 秦軍을 상대로 싸우기보다는 , 성문을 굳게 잠그고 수비를 견고하게 하다가 ,적이 지쳐서 돌아갈 때에 후방에서 공격을 가하면, 적을 무난하게 섬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齊王은 그 의견을 옳게 여겨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요소요소에 경비 군사를 배치해 놓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 하였다.

 

王賁은 무력의 우세를 앞세워 臨幟城을 연달아 공격하였다.

그러나 임치성은 지리적으로 難攻不落의 城이어서, 외부에서 공격만 해 가지고서는 무기만 소모될 뿐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게다가 40만 대군의 軍糧을 포함한 보급 문제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시일을 끌다가는 敵을 섬멸시키기는 커녕, 우리가 먼저 무너질 수 있는게 아닌가 ?)

王賁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제는 다른 수단으로 적을 城 밖으로 끌어내야 되겠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성안에만 틀어밖혀 있는 敵을 무슨 수로 끌어낸단 말인가 ?

王賁은 며칠을 두고 고심하다가, 마침내 회심의 착상이 떠올랐다.

 

(秦王의 이름으로 가짜 화친서를 齊王에게 보내면 敵은 반드시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王賁은 즉시 가짜 화친의 서찰을 만들어, 齊王에게 使臣을 보냈다.

그러나 齊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사신조차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王賁은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다가 和親을 압박하는 서찰을 화살꼬리에 묶어 성안으로 화살을 쏘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大秦帝國의 대왕께서 齊王에게 和親使를 보내 오셨으니, 제국은 大秦帝國과 화친할 의사가 있거든 화친사를 맞아들여 화친을 도모하도록 하시오. 만약 화친을 거부할 경우에는, 우리는 백만 대군으로 齊나라의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오.>

 

齊王 '建'은 화살에 날아온 통고문을 읽어 보고, 곧 중신 회의를 열었다.

"秦王이 和親使를 보내 왔다고 하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

그러자 중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秦나라가 和親使를 보내 왔다면, 대왕께서는 마땅히 만나 보셔야 하옵니다. 우리는 군사력에서 重課不敵으로 秦나라와 싸워서는 승리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저쪽에서 화친을 제의해 왔다면, 조건이 불리하더라도 화친에 응하도록 하셔야 하옵니다."

"알겠소. 그러면 화친사를 성안으로 불러들이시오. 내가 직접 만나보도록 하겠소."

 

이윽고 秦의 화친사가 齊王을 배알하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인은 秦王 殿下의 詔書(조서)를 전달해 드리고자 왔사옵니다."

"무슨 내용인지, 조서를 보십시다."

제왕은 즉석에서 '秦王의 가짜 詔書'를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齊公은 지체 말고 속히 항복하시오. 지금 항복하면 국가의 명목만은 보존해 나갈 수 있도록,

四方 5 百 里의 땅은 남겨 주고, 나머지 영토만 우리가 관장하도록 하겠소. 그러나 과인의 이러한 조건에 불응하고 끝까지 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다섯 나라를 멸절시켰듯이, 백만 대군을 총동원하여 제나라도 송두리째 쳐 없애버릴 것이오. 지금 齊나라의 存亡은 오로지 과인의 손에 달려있으니, 貴公은 과인의 마지막 관대한 처분에 응하여 후일, 千秋의 恨이 되지 않도록 하기 바라오.

大 秦帝國 大王 正.>"

 

화친서라기 보다 공갈 협박장이었다.

제왕은 화친서를 읽어 보고 크게 걱정되었다. 싸우자니 이길 자신이 없고, 화친에 응하자니 영토를 거의 다 내주고 겨우 손바닥만한 면적만 남을 것이 아닌가 ?

 

齊王은 자기 혼자서는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즉시 중신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워낙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기에 중신들은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왜들 말이 없소? 입을 봉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어서 기탄없는 의견을 말해보시오."

 

그러자 한 老臣이 아뢴다.

"매우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우리가 화친에 응하지 않으면 秦이 百萬 大軍으로 하여금 우리를 송두리째 쳐부수겠다고 선포해 왔으므로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화친에 응해야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다른 중신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小臣도 화친에 응함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찬성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衆論이 이렇게 돌아가자, 백발이 성성한 중신 하나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大王 전하 ! 敵이 화친책을 제의해 온 것은 싸우지도 아니하고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는 속임수가 틀림없사옵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망할 수는 없사오 니, 老臣은 끝까지 싸우다가 玉碎하기를 주장하옵니다."

이리하여 和戰兩論이 정면으로 대립하였는데, 主戰論者는 늙은 중신 한 사람뿐이어서, 그는 화친론자들로 부터 亡國者(나라를 망하게 하는자) 취급을 당하고말았다...

 

**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多數決의 原則'을 金科玉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옛날 封建王朝 時代에도 이 원칙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례가 바로 여기에 있었네.)

 

그러나 齊王 자신도 나라의 명맥만이라도 유지해 가고 싶은 속좁은 생각에서,

"和親을 주장하는 중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衆論에 따라 화친책을 채택하기로 하겠소."

라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사신을 다시 불러 물어 보았다.

"화친을 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겠소 ?"

"和親에 應하시려면, 齊王께서 몸소 문무 백관을 거느리시고 咸陽으로 가셔서 秦王 殿下께 직접 말씀드리라는 분부이셨습니다."

 

齊王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秦王을 만나기 위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가고자 城을 나왔는데...

그러자 성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王賁의 군사들이 齊王과 문무 백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40萬 대군이 臨淄城(임치성) 안으로 일시에 쳐 들어가 秦軍과 백성들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齊나라의 王宮을 점령해 버렸다.

 

齊王 '建'과 文武 百官들이 모든게 속임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눈앞의 '위장평화 속임수'에 넘어가 正道를 택하지않고 그 '평화' 제스처에 놀아나다가 결국에는 나라가 亡하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잃고만 것이었다.

 

( 이 나라의 爲政者 들이여!

옷깃을 여미고 과거의 歷史書를 읽고 또 읽은 後, 그대 들의 생각을 냉정히 돌아보라.)

 

이리하여,

齊는 나라를 일으킨 지 7代 111년 만에 亡하고, 秦나라는 마침내 天下 統一의 大業을 완수하니 때는 秦王 26년, 기원전 221年의 일이었다.

 

 

# 列國誌 26

 

 

**秦始皇 時代

 

 

(前 回나 前 前回에서 秦王의 이름이 '正' 字로 잘못 표기된 것은 '政'字로 정정합니다.)

 

 

 

秦王 政은 6國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문무 백관들을 咸陽宮으로 불러들여 천하 통일의 축하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진왕은 그 자리에서 문무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린다.

 

< 나는 오는 날 天下를 통일함으로서 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소. 이제는 어느 누가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올 것이오 ? 앞으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니, 전국에 있는 무기는 모조리 거두어 들여서 무쇠로 녹여 가지고 철인(鐵人)을 만들도록 하시오. 나는 宮庭에 철인들을 장식물로 세워 두고, 전국 시대를 회상하며 평화를 즐기도록 하겠소. 그리고 과거에도 聖王이 많았지만, 나처럼 천하를 통일한 제왕은 나 말고 또 누가 있었소 ?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는 '大王'이라는 칭호 가 너무도 왜소하게 느껴지는 바이오."

그리고 승상 이사(李斯)를 돌아보며 물었다.

 

"승상은 歷史에 밝으시니까 하나 묻겠소. 오는날까지 역사상 위대한 임금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소 ?"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역사상 위대했던 임금에는 , 三皇 五帝가 있사옵니다."

"三皇이란 누구이며, 五帝는 누구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

 

"三皇이란 고대의 天皇氏, 地皇氏, 人皇氏의 세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고,

五帝란 그 다음 시대의 소호(小昊), 전욱, 제곡, 요(堯), 순(舜)의 다섯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聖業을 나의 天下統一과 비교한다면, 어느 편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

 

실로 오만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신들은 약삭빠르게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삼황 오제가 제아무리 聖君이셨다 하기로, 그들의 업적을 어찌 감히 대왕의 천하통일의 大 聖業에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秦王은 그 아부성 답변이 만족스러워 호탕하게 웃으면서 승상 이사에게 다시 물었다.

 

"삼황 오제의 업적과 나의 업적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크다고 말들하는데,

승상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이사가 대답하는데,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삼황 오제가 善政을 베푸셨다고는 하나, 그것은 일부의 지방에만

국한되었을 뿐이었고, 대왕께서는 천하를 통일 하셨으니 어찌 삼황 오제의 업적과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옳은 말씀이오. 업적이 별로 대단치도 않았던 그들이<三皇 五帝>로 불려 왔다면, 나에 대한 칭호도 무언가 새롭고 다르게 불려야 옳지 않겠소 ?"

 

春秋 戰國 時代에는 크고 작은 국가가 70여 개나 되었고,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임금을 한결같이 大王이라고 불러왔으나, 모든 국가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한 지금에 와서는 그 흔한 大王이라는 칭호보다는 秦王은 조무라기 '대왕'들과 현저하게 차별되는 <새로운 임금>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칭호로 불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승상 이사는 秦王의 그러한 심리를 재빠르게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리며 품했다.

"천하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신 지금에 와서는 <大王>이라는 칭호는 너무도 왜소하고 부적절한 칭호인 줄로 아뢰옵니다. 古代에는 聖君을 '天子'라고 불러 왔사오니, 오늘부터 대왕께서도 '천자'로 하심이

어떠하겠사옵니까 ?"

"天子 ....!? 천자라는 칭호는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오 ?

그 칭호도 나쁘지는 않으나 '天子'라는 칭호는 남들이 이미 써 오던 칭호가 아니오 ? 그보다는 '三皇 五帝' 처럼 나의 업적을 뚜렸이 나타내 보이는 새로운 칭호로 불리고 싶구려."

 

"물론 그러셔야 하실 것이옵니다. 大王께서는 어떤 칭호로 부르게 하심이 좋으시겠나이까 ?"

秦王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별로 대단치도 않았던 임금들 조차 三皇이니, 五帝니 하고 불려 왔던 모양이나, 나의 경우, <三皇 五帝>를 하나로 뭉친 '皇帝'라고 부르면 어떻겠소 ?"

秦王의 그 제안에 승상 이사는 크게 감탄하였다.

"과연 탁월하신 착상이시옵니다. 대왕께서는 <三皇 五帝>의 모든 업적을 合한 것보다도 더 위대하신 업적을 이룩하셨음으로, 칭호 또한 마땅히 '皇帝'로 불리셔야 함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이리하여 그날부터 秦王 '政'은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로 부르게 된다.

진왕은 <皇帝>라는 새로운 칭호가 매우 만족스러운지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내 손으로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 내려가며 황제의 자리를 누리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나 자신을 <始皇帝> 와 <秦始皇>으로 부르고, 그 다음 代에는

<二세 황제> <三세 황제>로 부르게 하겠소. 이렇게 이 나라는 나의 자손들이 萬代를 누려가며 통치하게 될 것이오."

이리하여 秦王은 그날부터 자기를 <始皇帝> 또는 <秦始皇>으로 부르게 하였다.

 

** 기원전 221년, 秦王 '政'이 戰國 六雄을 제압하고 중국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였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그 스스로 皇帝가 되었다.

 

(갑자기 "역사는 반복된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E. H Carr 교수의 말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진시황이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후, 2239년이 지난 2018년 3월, 全人大(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기존의

法을 뜯어 고쳐, 21세기 중국에 또 다른 시황제가 탄생했으니 그가

바로 시진핑(習近平)국가 주석이다.

세계의 언론은 시진핑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아마도 시진핑은 푸틴을 보고 배웠으리라!...)

 

2200여 년 前, 秦始皇은 在位 26년 만에 戰國을 통일하였으나,

亡하는데는 불과 10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傳해져 오는가?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고,

 

月滿卽虧(월만즉휴),

物極必反(물극필반)이라는 말이..

 

그러나 始皇帝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大王들은 자기 자신을 '寡人' 이라 칭해 왔었소. 그러나 大王이 아니고 皇帝인 나에게는 그 말도 格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 말을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겠소 ?"

 

승상 이사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과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수많은 대왕들이 써온 어휘이므로, 황제께는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황제께오서 신하들에게 자신을 지칭하실 때에는 짐(朕)이라고 하심이 어떠하올지요 ?"

 

"朕이라!.... ? 짐이란,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오 ?"

"짐이란, 나 짐(朕) 字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내 자신을 말할 대에는 '朕'이라고 하겠소.

그 대신 '朕'이란 말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황제께서 쓰시는 <朕>이라는 말씀을 어느 누가 감히 쓸 수오이까?"

 

이리하여 <皇帝>와 <朕>이라는 말은 秦始皇에 의해 最初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시황제는

全國을 36 個 郡으로 나누어, 각 고을 군수를 직접 임명하는 中央集權制를 확립하고

모든 법률도 전국에 획일적으로 통하도록 조정하고, 度量衡 : 길이, 부피, 무게)도 전국이 동일하게 쓰도록 하였다.

 

秦始皇은 이렇게 國基를 다져 놓고 나자,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2 萬 호에 달하는 富豪들을 모두 다 咸陽으로 불러들여 수도에서 함께 살게 하는 동시에, 자신도 阿房宮이라는 거대하고 호회스러운

宮闕을 새로 지어 전국의 젊고 아름다운 美女 3천 여 명을 아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死後를 대비하여 자기 자신의 墓宮도 축조하도록 하였는데, 그 假墓는 봉분의 높이가 4 백 자에, 길이가 2 천 자에 이르고, 내부에는 축소한 黃河와 揚子江까지 만들어 놓고, 물 대신에 水銀을 흐르게 함과 동시에 수많은 諸將과 諸卒의 호위 군사상 (像)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던 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 시대에는 이러한 거대한 토목 공사가 수 없이 이루어졌는데, 그 모든 공사가 오로지 백성들의 부역(賦役)으로 충당되었으니 천하 통일의 기쁨은 오직 진시황 한 사람에 국한되었고, 백성들은 언제나

부역과 세금 수탈로 죽지못해 사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승상 이사는 法治主義者로, 때때로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공표하고,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죄질에 따라 五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五刑이란,

1)얼굴에 글자를 새겨 넣는 형벌, 2)코를 베어 내는 형벌을 비롯하여, 3)남의 여인을 사사로이

犯한 사내의 불알을 까버리는 형벌, 4)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淫行을 저지른 여자의 음부의 돌기를 잘라내는

형벌,

5)殺人을 한者는 거리에서 허리를 잘라죽이는 형벌 等, 다섯 가지의 형벌을 말한다.

 

始皇帝는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져 놓고 나자, 그때부터는 낮에는 사냥을 즐기고, 밤이면 아방궁에서 미녀들을 불러 酒池肉林 속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 그때까지 40평생을 戰國 統一의 戰塵 속에서만 살아왔으니, 천하를 제패한 이제 부터는 여생을 즐겁게 보내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丞相 이사는 시황제의 이러한 생활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바가 있어 하루는 이렇게 간한 일이 있었는데...

 

"자고로 聖君은 천하를 끊임없이 순회하시며 民情을 소상하게 살피시와 모든 民願을 정치에 반영시켰사옵니다. 황제께오서는 오늘 날 처럼 九重宮闕 에 앉아만 계셔서는 천하의 痼疾을 어찌 아실 수 있사오리까 ?

하오니 차제에 황제께서도 전국을 두루 순회하시며 민심을 두루 살피심이 좋으실 줄로 아뢰옵니다."

 

시황제는 그 간언을

좋게 여겨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거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소. 그렇지않아도 朕은, 짐의 나라 모든 국토를 짐의 눈으로 직접 돌아보고 싶었소이다. 우선 농서 지방으로 떠나도록 할 것이니 짐의 행차에 불편함이 없도록 농서까지

새로운 길을 닦아 놓도록 하시오."

 

咸陽에서 농서에 이르는 길은 첩첩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멀고 먼 千里 길이었다. 그 험난한 곳에 황제의 수레가 지나 갈 皇帝專用道路를 새로 닦아 놓자니, 거기에 죽어나는 사람들은 백성들 뿐이었다.

萬 여 명이 한 달 동안이나 끼니를 제대로 먹지못하며 새 길을 닦았지만 始皇帝는 백성들의 그 같은 노고에는 추호의 배려도 없었다.

 

이윽고 시황제가 지방 순행길에 올랐다. 황제가 타는 <온량차>는 창문이 여섯 개나 있는 거대한 수레였다. 거기에는 시녀도 10여 명이나 동승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앞 뒤에는 각각 5 千 여 명의 騎馬隊가 호위하였고, 이를 뒤따르는 무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들은 음식과 禮服, 침구류와

의료등을 전담하는 행렬이었다.

 

이렇게 거창한 시황제의 행차에는 그가 탄 온량차가 진행하는 좌우편 길가에는 황제를 전송하고 영접하는 백성들의 도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였고, 그들은 온량차가 지날때 마다, <시황제 폐하 만세!>를 소리높혀 외쳐야만 했다. 시황제는 그때마다 온량차 창문을 열고 손을 들어 백성들의 환호에 答하며,

백성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皇帝의 시혜>라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가에 엎드려 그를 영접하는 백성들은 모두가 秦에게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어서 개중에는,

(우리나라를 빼앗은 者가 바로 저 X이구나 !)

하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가진자가 없지 않았지만, 시황제는 백성들의 그 같은 원성을 개의해 본 일

조차 없었다.

 

개, 소, 돼지 같은 것 '들에게 나의 거룩한 얼굴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자비로운

聖君이냐 ?'

 

(* 개, 소, 돼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린데?...)

 

秦始皇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列國誌) 27

 

 

** 始皇帝 時代

 

 

시황제의 지방 순행에는 언제든지 대부(大夫 : 지금의 직책으로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趙高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始皇帝 일행이 농서에 도착하니, 성안에는 환영 인파가 30 萬 명이나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입으로는 '시황제 폐하 만세 !'를 외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무언가 불만과 저항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불과 얼마전에 나라를 秦나라에 빼앗긴 백성들이라

정복자 秦始皇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大夫 趙高는 그런 눈치를 재빨리 간파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는 皇帝의 御殿에서 젊은 청년 하나를 불러,

"황제 폐하께서 지금 이곳으로 순행 오신 것에 대하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황제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대답했다.

 

"聖恩이 망극하옵게도 황제께서 저희 지방에 臨御해 주시와, 저희 民草들은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趙高는 그 청년의 말을 시황제에게 그대로 告한다.

" 폐하, 이 젊은이의 말을 들어 보시옵소서. 황제 폐하의 성덕이 전국 방방 곡곡에 까지 골고루 퍼져서,

만 천하가 태평 성대를 구가(謳歌)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옵니다."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고가 미리 꾸며둔 造作劇이었다.

조고는 워낙 奸智가 발달한 인물인 지라, 예의 그 청년을 돈으로 매수하여,

황제 앞에서 ,그렇게 대답하도록 미리 꾸며 놓았던 것이다.

(과거 자유당 시절, 시장을 둘러보는 이승만 대통령..

계란 10개 들이 한 꾸러미 값을 묻자, 100환(지금 돈 10원)이라는 대답을 듣고 시장 상인의 한 달 수입을 묻고는 만족해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러한 내막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흡족한듯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 성대를 마음껏 누리게 하리라."

 

농서에는 鷄頭山이라는 높은 산이 있었다.

황제가 계두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굽어 살펴보니, 저 멀리 하늘가에 오색 영롱한 구름이 몇 조각 떠돌고 있었다.

"저게 무슨 구름이냐? 저 구름이야말로 이상한 구름이 아닌가?" 하고

始皇帝가 묻자 趙高가 대답한다.

 

"글쎄옳습니다... 수행원 중에 宋武其라는 占星師가 있사오니, 그를 불러 물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점성사 송무기가 급히 불려와, 구름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아뢴다.

 

"구름에는 상운(祥雲), 채운(彩雲), 제운(霽雲),경운(慶雲)等, 여러가지 구름이 있사온데, 지금 저것은 구름아 아니옵고 단순한 雲氣일 뿐이옵니다. 저 운기에는 妖氣가 감돌고 있사온데, 저 요기를 제압해 없애버리시려면, 皇帝께옵서 南方으로 행차하시어, 추역산 정상에 거대한 돌로 황제의 功德碑를 세우시면 될 것이옵니다."

 

시황제는 妖氣가 발동했다는 말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공덕을 기려 공덕비를 세우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음으로 즉석에서,

"그러면 지금 바로 '추역산'으로 가보자"하고 명령을 내렸다.

 

鄒忌山<추역산>은 농서에서 동남방으로 5 백 여 里나 떨어져 있는 태산이었다. 황제 일행이 추역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황제 전용 도로>를 닦아야 했다.

 

 

[**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과 인권 문제로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고 알려져 있는 카터.

 

카터는 선거에서 , 주한 미군의 감축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인권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에 상당히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카터가 訪韓했을 때, 우리가 숙소로 제공하겠다는 "5星 급 호텔"도 거부하고 美 제 2 사단 병영 內로 정한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카터가 의정부에서 잠을 자는 그 시간에, 경계 근무를 나가는 초병의 소총에서 공이를 모두 회수하여 중대본부 행정반 사무실에 보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소총의 공이는 실탄을 발사하는 중요한 부속이다.

병역의 의무를 마친 독자 제위께서는 잘 아시리라 믿고 이하 생략함..)

 

재선에서 실패한 카터가 실토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그는 "주한미군 감축과 철수는 그 당시 자신이 한국이 처한 현실을 잘 모르고 했던 空約이었다" 고 고백한 바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과는 다르게,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의 자신의 판단미스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 우리나라 대통령도 카터의 솔직함을 좀 배우라고 권유하고싶다.]

 

 

얼마후, 시황제 일행은 백성의 피 땀으로 急造된 <황제 전용 도로>를 이용하여 , 추역산으로

행차하던 도중, 갑자기 세찬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는데, 황제 일행은 길가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수가 있었다.

비가 그친 후, 황제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 느티나무에게 '五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우리나라 조선 왕조 때에도 속리산 <正二品> 소나무에 대한 古事가 있다.

 

이렇게 시황제가 鄒忌山(추역산)에 당도 해 보니, 추역산은 정상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2백 여리가 한눈에

굽어보이는 명산이었다.

시황제는 占星師 宋武其를 불러 물어 본다.

 

"계두산 상공에 감돌고 있는 요기를 제압해 버리려면 이 산꼭대기에 짐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했겠다 ? "

송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허공 중에 떠돌며 배회하는 요기를 제압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이 산성에 성상의

위업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는 길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면 이 산성에 朕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하라. 공덕비를 크고 무겁게 할 수록 효과가 클 것이니,

이왕이면 거대하게 세우라."

 

이리하여 추역산<鄒忌山> 정상에 시황제의 거대한 공덕비가 세워졌으니,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皇帝, 天位에 임하시사 官制를 새롭게 제정하시고, 法度를 분명히 밝혀 놓으시니 만천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복종하여, 사상 처음으로 태평 성대를 이루었도다. 이로써 治世의

道를 천지와 더불어 운행하시니, 대의 大義가 紹明하여 만백성들의 생업이 날로 번성해

가도다. 황제께서는 천하를 평정하신 이후, 날이면 날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 나시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오로지 國利民福에만 전념 하시니, 貴賤이 융통하고 상하가 융합하여, 황제의 德化는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도다.>

 

황제는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자신의 功德碑文을 읽어 보고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그리하여 占星師 宋武其에게 많은 재물을 내려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황제는 咸陽으로 돌아오다가 지부산<芝부산>에도 올라가 보았는데 그곳도 경치가 매우 빼어나므로 그 산 위에도 똑같은 공덕비를 또 하나 세우게 하였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狼牙山 <낭아산>에 들렀을 때에도

눈앞에 펼쳐진 황해 바다의 경치 또한 너무도 뛰어나, 그곳에서는 석 달 동안이나 체류하면서 그곳에도 또 하나의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공덕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封建王朝時代 專制 君主 들의 공통적인 생리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김정은의 共産王朝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까지도 北美회담을 잘 이끈 자신의 외교적 성과로 북한이 더 큰 도발을 하지않고 이 정도의 평화를 구축했다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지않은가?!..)

 

# 列國誌 28

 

 

**長生不老草

 

 

始皇帝가 지방 순회를 마치고 咸陽에 다시 돌아온 것은 半 年이 지난 이듬해 봄이었다.

황제가 오랫만에 환궁을 하게 되자, 맏아들 扶蘇와 둘째아들 胡亥가 만조 백관들을

거느리고 咸陽城 백 리 밖까지 마중을 나왔고, 그날은 아방궁에서 성대한 환영연이 베풀어졌다.

 

때는 화창한 봄날 이어서 아방궁 정원에는 千紫萬紅이 만발하였다. 황제는

만조 백관들과 더불어 취흥이 도도해지자,

"朕은 이번 지방 순행에서 많은 소득이 있었소. 이제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지방 순행을 꾸준히

다닐 것이오."

하고 말하니 만조 백관들은 허리를 굽히며 이구 동성으로 말한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태평 성대는 日月과 더불어 영원히 계속될 것이옵니다."

하고 일제히 제창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시황제가 顯慶殿에 나와 정사를 살피는데, 旅毒이 덜 풀렸는지 자신도 모르게 龍床에 앉은 채 깊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게된다.

 

그런데, 꿈에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童子와 붉은 옷을 입은 童子,

둘이 나타나더니 진시황의 玉璽<옥새>를 서로 빼앗으려고 싸움을 하는게 아닌가?.

이에 始皇帝가 크게 怒하여,

"이놈들아 ! 네놈 들은 어디서 온 놈 들이기에 감히 옥새를 빼앗고자 싸움질을 하고 있느냐? !"

하고 호통을 치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저는 옥새를 가져 가려고 東方에서 왔사옵니다."

하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저는 옥새를 가져 가고자 남방에서 달려 온 몸이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始皇帝는 그 대답에 더욱 怒하여 가죽 채찍으로 두 아이를 마구 후려쳤지만, 童子들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시황제를 놀리 듯이 깔깔대는 게 아닌가?

始皇帝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마침내,

"여봐라 ! 거기 누구 없느냐!? 저놈들을 당장 끌어내 능지 처참을 하도록 하라 ! "

하고 호통을 치다가 자기 고함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으음 ~..."

그런데, 꿈이 너무도 흉측한 탓이었던지 꿈에서 깨어 보니,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놈들이 옥새를 서로 가져가려고 했다면, 누군가가 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시황제는 몹시 불쾌했으나 꿈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凶夢을 꾸고 난 다음부터 始皇帝는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어느 놈이 감히 나의 자리를 노린단 말인가 ? 그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 )

 

사실 지금으로 보아서는 자신에게 도전해 올 사람은 아무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꿈만은 틀림없는 그런 의미의 꿈이 아니었던가?..

 

始皇帝는 문득 鷄頭山 위에 이상한 광채를 띤 구름이 감돌았던 일이 떠올랐다. 占星師 宋武其는 그

구름을 <妖氣가 서린 운기>라 하면서, 그 요기를 없애려면 추역산(鄒역산)에 황제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말을 했었고, 그의 말대로 거대한 공덕비도 세우지 않았던가 ?

그런데 이번에는 웬 靑童子, 紅童子가 나타나, 옥새를 서로 빼앗아 가려고 싸우는 凶夢이란

말인가?

 

始皇帝는 며칠을 두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다가 하루는 점성사 송무기를 불러 넌즈시 물어 보았다.

"朕이 근간에 꿈자리가 매우 사나운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 "

"어떤 꿈을 꾸셨사온지, 꿈 이야기를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소인이 정성껏 풀어 올리겠사옵니다."

그러나 시황제는 위신상 꿈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해 줄 수가 없어서 다음과 같이 얼버무렸다.

 

"꿈을 꾸고 나서는 모두 잊어 버리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으나, 어쨌든 꿈자리가 좋지않은 것만은 사실이니까, 거기에 대한 무슨 예방책이 없겠나 ?"

"단순히 꿈자리가 사납기만 하셨다면, 그것은 폐하께서 오랜 여행으로 심신이 피로해지신 탓일 것이옵니다. 그것을 치유하시려면 보약을 쓰실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長生不老草를 구해다 드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

 

"뭐라고?

長生不老草 ? !.. 세상에 그런 약초가 있단 말인가 ? "

始皇帝는 <장생 불노초>라는 말에 귀가 번쩍하였다.

 

"예, 海東國 조선 땅에는 영주(瀛州 : 한라산), 봉래(蓬萊 : 금강산), 방장(方丈 : 지리산)의 三神山이 있사온데, 그 산에는 장생 불노초라는 仙草가 있다 하옵니다. 그 선초를 달여서 먹으면 永生不死 한다 하오니. 황제 폐하께서는 사람을 보내시어 그 약초를 구해다 드셔보도록 하시옵소서. 그러시면 폐하께서는 영원히 생존해 계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宋武其의 말을 들은 始皇帝의 얼굴에는 환희로 넘쳐났다. 지금같은 영화를 누려 가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으랴!

그러나 <영생 불사>라는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아서, 송무기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그런 仙草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

 

송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인이 직접 선초를 본 일은 없사오나, 장생 불노초에 대해서는 방사(方士: 신선의 도를 닦고 있는)

徐市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서시란 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

"徐市는 神仙​道를 닦고 있는 소인의 벗이온데, 그가 지난날 삼신산에 가 보았더니, 삼신산에는 장생 불노초를 먹고 영생 불사하는 4, 5백 살 먹은 신선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들은 나들이 갈 때에는 鶴을 타고 다니더라고 하였습니다."

 

시황제는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서시란 도인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

하고 물으니 , 宋武其가 대답하는데,

"서시는 마침 소인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본인을 직접 불러다가 물으시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道人을 곧 이리로 불러오도록 하라 ! "

 

始皇帝의 皇命에 의해 서시가 즉시 御殿으로 들어 왔는데, 풍채가 늠름하고 백발이 성성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선풍 도골(仙風道骨)로 보였다.

그러자 ,시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수그려져,

"道人은 일찍이 삼신산에 가서 장생 불노초를 직접 자신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

하고 존댓 말을 써 가며 물었다.

"예, 사실이옵니다."

"삼신산에는 신선이 많아서 그들은 鶴을 타고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이오 ?"

"예, 그것도 사실이옵니다."

시황제는 놀란 듯이 혀를 차며,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삼신산에 가면 장생 불노초를 구해 올 수 있겠소 ?"

"물론 구해 올 수 있사옵니다."​

"그러면 道人은 朕을 위해, 삼신산에 가서 장생 불노초를 구해다 줄 수 있겠소 ?"

" ..... "

 

황제의 부탁에 대해 서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을 아니 하시오. 道人은 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 "

 

그러자 ,서시는 담담하나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皇命을 거역할 뜻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三神山에 들어가 장생 불노의 선약을 구해 오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라야 하옵니다."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그 조건을 어서 말해 보시오."

서시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한다.

 

"소인이 삼신산에 들어가 선약을 구해 오려면 童男童女 각각 5백 명과 金銀寶貨를 많이 가지고 떠나야 하옵니다."

"동남 동녀를 5백 명씩이나 데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 짐은 그 이유를 모르겠구려."

徐市가 조용히 대답한다.

 

"영생 불로초는 워낙 신령하기 짝없는 靈草인 까닭에, 바로 발뿌리 앞에 있더라도 신선들의

눈에만 보일 뿐, 보통 사람들 눈에는 결코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성을 경험하지 않은 童男 童女만은 영생 불로초를 볼 수 있으므로, 仙草를 구해 오려면 동남 동녀를 많이 데리고 떠나야 하옵니다."

 

始皇帝는 그 말에 더욱 감탄하였다.

"神仙과 동남 동녀의 눈에만 보인다면 영생 불로초야 말로 영험한 약초가 분명하구려. 그러면 도인의 말씀대로 동남 동녀 5백 쌍과 금은 보화를 부족함이 없도록 줄 테니 영생 불로초를 기필코 구해 오시오. 그런데 시일이 얼마나 걸리면 돌아오실 수 있겠소 ?"

 

"영생 불로초는 워낙 희귀한 靈草인 까닭에, 그것을 찾아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아무리 빨라도 일년 내지 二 년은 걸릴 것이옵니다.

"이년이나.. ? 시일이 너무 길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될수록 속히 다녀오시오."

 

이리하여 方士 徐市는 童男 童女 5백 쌍과 많은 금은 보화를 10척의 대선(大船)에 나눠 싣고, 영생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해동국 조선 땅을 향하여 떠났다...

 

시황제는 서시를 해동국 조선 땅으로 보낸 이후에도, 지방 순행을 끊임없이 다니면서, 서시가 영생 불로초를 구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멍청한 X.ㅋㅋ)

그러나 해동국 조선이란 나라로 떠나간 서시는,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건만, 돌아오지 않았다.

始皇帝는 서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하루는 방사 (方士) 노생(盧生)을 불러 명했다.

 

"方士 徐市가 영생 불로초를 구한다고 해동국 조선 땅으로 떠나간 지 3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대가 조선으로 가서 서시를 찾아 오도록 하오."

 

盧生은 皇命을 받고 마지못해 황해 바닷가로 나와 보았다.

그러나 만경 창파 넓은 바다에는 검푸른 파도만 넘실거릴 뿐, 해동국 조선 땅이 어느 하늘 아래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

 

 

** 海東國 조선 땅에 도착한 서시 일행은 끝끝내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애시당초 그가 말했던, 영생 불로초란 있을 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人蔘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바, 그 중에서도 부정을 타지않은 사람(산삼을 캐러 가는 심마니 들은 지금도 출발 1주일 前부터는 부인과 관계하지 않는다고 한다.) 눈에만 보인다는 山蔘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徐市가 처음부터 山紫水明한 조선 땅에서 살고 싶어 秦始皇에게 영생 불로초를 구한다는

구실로, 많은 金銀 보화와 동남 동녀 5백 쌍을 데리고 떠났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姓氏가 매우 많은데, 어쩌면 그것은 당시 서시와 동행했던 童男 童女 5 백 쌍과 깊은 관련이 있는 姓氏 들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方士 徐市는 5백 쌍의 童男 童女들과 함께 본국에는 영영 돌아가지 않았다.

海東國 조선 땅에 한 번 들어온 사람은 山 좋고 물 좋고 人心도 후한 조선 땅 말고 다른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은가보다.

 

 

 

# 列國誌 29

 

** 멸망의 前兆

(萬里長城의 築造)

 

 

盧生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徐市를 찾아 나서기는 하였으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바다 건너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수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의 命을 무시하고 그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므로

노생은 어쩔 수 없어 太岳이라는 깊은 산속에 숨어 살기로 작정 하였다.

 

그런 어느 날, 노생이 산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가는데, 커다란 동굴 어귀에서 백발의 노인 하나가 네 활개를 쭉 뻗고 낮잠을 자고있었다.

나이는 80 세쯤 되었을까? 몸에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머리는 새의 둥지처럼 헝클어져 있는데, 첫눈에 보아도 예사 노인 같지가 않았다.

 

(이 깊은 산중에 어찌 이런 노인이 .... !? 혹시, 이 노인이 바로 神仙이 아닐까...?)

 

노생은 문득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 그 노인의 잠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문제의 노인은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몸은 피골(皮骨)이 상접하도록 야위어 있었지만, 코 고는 소리는 산울림처럼 요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 노인이 신선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깡마른 저 체구에서 무슨 기운이 있다고 코 고는 소리가 이렇게도 크단말인가?)

 

노생은 잠을 자고 있는 노인을 경외심(敬畏心)을 가지며 계속 지켜 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나절이나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난 노인이 일어나 앉다가 노생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이 깊은 산속에 댁은 뉘시요?"

노생은 노인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는 노생이라 하옵는데, 시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장생 불로초를 찾아다니는 중이옵니다."

노인은 그 소리를 듣더니 하늘을 우러러 앙천 대소(仰天大笑)를 한뒤, 정색하며 말한다.

"무어라!? ..

황제의 命으로 長生 不老草를 찾아 왔다고?

도대체 장생 불로초란 것이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다고 하던가?

始皇帝라는 者가 武力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나더니, 이제는 맛이 완전히 가버린 모양일세 그려 허허허."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이렇게 말한다.

 

"秦王 '政'은 天數가 다 되어서, 이제는 大患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네."

始皇帝가 들으면 노발대발할 소리를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옛 ? 天數가 다 되어 대환을 면키 어렵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爐生이 황급히 되물었지만 , 노인은 대답조차 아니 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더니

노생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이 책에는 사람의 生死 存亡의 天數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네. 秦王에게 이 책을 자세히 읽어 본 후에, 장생 불로초를 구하라고 하게."

 

그 책의 표지에는 <天祿秘訣>이라는 네 글자가 뚜렷하게 씌여져 있었다.

노생은 <천록 비결>이란 책을 즉석에서 두서너 줄 읽어 보았다. 그러나 짧은 글 이었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노인에게 물어 본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생사존망의 천수를 모두 알 수가 있사옵니까 ?"

"물론, 진왕이 다소나마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게 되면 장생 불로초를 구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어서 이 책을 가지고 가서 秦王에게 보이시게."

노인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표연히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노생은 다시 함양으로 돌아와 그 책을 시황제에게 바치면서 그간의 사정을 모두 告하였다.

시황제는 즉석에서 <天錄 秘訣>을 읽어 보았으나, 모든 문장이 은어(隱語)로 적혀 있어서 자기로서는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명하다는 학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읽혀 보았으나, 그들도 책의 내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李斯)를 불러 말했다.

"승상은 학문이 해박한 데다가 역사에도 밝으시니, 이 책에 어떤 말이 씌여 있는지 한번 읽어 보아

주시오."

이사도 <천록 비결>의 내용이 무슨 소린지 전연 알 길이 없었다.

 

"이 책의 문장은 은어로 씌여 있어서 쉽사리 알 길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시일을 두고 연구해 본다면 해득이 전혀 불가능 한 일은 아니옵니다."

"이 책을 아무도 해득하지 못하니까, 시일이 걸리더라도 경이 직접 연구해 보아 주시오."

 

이사는 그날부터 <천록 비결>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은어들을 공통점을 찾아 꿰어 맞추고 연결해 보기를 석달, 마침내 간단한 한 구절의 成文을 해득하였다.

"황제 폐하 ! <天錄 秘訣>의 내용을 마침내 조금은 알아볼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시황제는 그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오랫동안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그래, 그 책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소 ?"

그러나 이사는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조아리다 대답한다.

"내용을 알아내기는 하였사오나, 그 내용이 너무 흉칙하여 차마 입에 담기가 어렵사옵니다."

"아무리 흉측하더라도 알 것은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니오. 개의치 말고 어서 사실대로 말해 보시오."

이사는 그래도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 책은 수많은 은어로 구성되어 있사온데, 결국은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로 귀결되옵니다."

"뭐요 ? <亡秦者胡也>라면, <秦나라를 망칠 놈은 오랑캐(胡)>란 말이오 ?"

시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큰소리로 반문했다.

 

지난 시절, 보위에 오른 후 장장 26 年 間이나 걸려서 천하 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은 大秦帝國이 설마 망하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大秦帝國'은 자기 자신을 始祖로 하여 대대 손손이 통치권을 계승해 내려가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始皇帝>로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이세 황제>, <삼세 황제>로 부르도록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던가 ?

그런데도 천만 뜻밖에도 <천록 비결>이라는 책에 <亡秦者胡也>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니,

始皇帝로서는 氣가 찰 노릇이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노생을 급히 불러들였다.

"그대에게 이런 요망한 책을 준 늙은이를 당장 잡아 올려라. 그놈을 朕의 눈앞에서 능지 처참할 것이다. 만약 그놈을 잡아 오지 못할 경우에는 그대를 능지 처참 할 테니, 그리 알고 기필코 체포해 오라 ! " 는 嚴命을 내리는 것이었다.

 

노생은 어쩔 수 없이 성부지 명부지(姓不知名不知 :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노인을 찾으려고 太岳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 노인을 만났던 동굴로 찾아갔다.

문제의 노인은 오늘도 동굴 어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낮잠에서 깨어나 노생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貴公은 나를 잡아가려고 다시 왔구려? 그렇지 않아도 귀공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예?.... 제가 다시 올 것을 선생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

"그런 것을 몰라 가지고서야 어떻게 천수를 안다고 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다시 왔는지도 다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 "

 

그러자 노인은 또다시 仰天大笑를 하면서,

"秦王이라는 자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亡秦者胡也> 라는 글을 보고 크게 怒하여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나는 天數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나를 죽인다고 秦나라가 망할 운명을 면할 수가 있는 줄 아시오 ? 힘만 믿고 하늘의 이치를 모르는 君主란 자들은 이처럼 우매한 것들이라오. 그러니 貴公도 저 어지러운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 말고, 나와 함께 여생을 이 太岳에서 보내기로 합시다."

문제의 노인은 먼 앞날까지 꿰뚫어 본듯, 노생이 돌아가기를 만류한다.

 

노생이 난감하여 주저하자, 노인은 또 이런 말도 겯들인다.

"貴公은 혼자 돌아가도 죽고, 나를 잡아서 돌아가도 결국에는 폭군의 손에 죽게 될 것이오.

그러니까 나와 함께 이 山에 살아야 하오. 그것도 貴公의 天數요."

노생은 그 말까지 듣고 나자, 이제는 아예 돌아갈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한편, 시황제는 爐生이 <산중의 노인>을 잡아 오기를 날마다 학수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반 년이 넘어도 爐生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시황제는 그럴수록 <天錄秘訣>이라는 요서(妖書)에 실려 있는 <亡秦者胡也>라는 구절에 신경이 쓰여졌다.

(天下 無敵인 大秦帝國을 어떤 놈이 감히 망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 )​

 

시황제는 스스로 그런 허세를 부려 보기도 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승상 이사를 불러 물었다.

"문제의 妖書에 <亡秦者胡也> 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데, 경은 <胡>字를 어떤 뜻으로 해석하시오 ?"

 

이사는 심사숙고 끝에 대답한다.

"<胡> 字는 오랑캐를 의미하는 글자가 아니겠사옵니까 ?"

"오랑캐를 의미한다?!..."

 

"예, 그러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 북쪽 변방에는 동호(東胡)와 흉노족(凶奴族)들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국가를 형성하고 있사옵니다. 동호와 흉노가 다같은 오랑캐족 들이온데 그들의 세력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천록 비결>이라는 책이 알려 주고 있는 <호(胡)>란, 북방 오랑캐들을 뜻하는 말인듯 싶사옵니다."

 

"으음 ~ ... 듣고 보니 과연 경의 말씀이 옳은 것 같구려."

 

시황제는 丞相 이사의 해석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훨씬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사의 해석은 크게 잘못 된 해석이었다.

<천록 비결>에 담긴 <호(胡)>는, 오랑캐를 뜻하는 <胡>가 아니었고 시황제의 둘째 아들인 <호해(胡亥)>의 이름에서 나온 '胡'字였던 것이다.

 

시황제는 秦나라를 亡하게 할 字는 <胡>라는 글자라는 것을 <천록비결>을 통하여 알게되었으나, 설마 자기 아들 '胡亥'가 나라를 亡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바, 이사의 해석을 그대로 믿으며 물었다.

 

"亡秦者胡也 라는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 않구려. 그러면 차제에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경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시황제는 <天錄 秘訣>에 나와 있는 妖言이 아무래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승상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지금 같아서는 北方의 오랑캐 {(凶奴 흉노)- 鮮卑(선비) - 契丹(거란) - 夢古 - 滿州族(女眞族) - 後金 - 淸나라로 변화됨)}들이 우리에게 감히 덤벼 오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염려가 되오시면, 事前에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어떤 대책이 좋다고 생각하시오 ? "

"그들이 함부로 침범해 오지 못하도록 북방 국경선에 높고 긴 長城을 쌓아 올리면 어떠하겠습니까 ?"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것 참 名案이오 ! 그러면 북방 국경선에 長城을 쌓도록 합시다. 성을 쌓는다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쌓아야 하겠소 ?"

성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는 토목 공사다.

그러나 始皇帝는 그런 문제는 전혀 개의치않고, 이사에게 다시 묻는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城을 쌓아야 좋을지 丞相이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이사는 地圖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대답했다.

"오랑캐의 침범을 막아내려면 아무래도 山東省의 山海關에서 甘肅省(간쑤성)의

嘉峪關(가욕관 : 가곡관으로 호칭하면 안됨)에 이르기까지 성을 쌓아 올려야 할 것이옵니다."

 

"山海關에서 嘉峪關(가욕관)까지라면 萬里는 쌓아 올려야 할 것이 아니오 ?"

"예,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다행으로 그 사이에는 燕나라와 趙나라 때, 축조 된 기존의 장성이

있으므로 이것 들을 우리의 城과 , 연결해 쌓으면 거리는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왕 쌓으려면 높고 튼튼하게 새로 쌓아야지, 기존 장성들을 어디에다 쓰겠소. 이왕이면 만리장성을 새로 쌓아 올리기로 합시다. 그러자면 노역부(勞役夫)는 얼마나 필요할 것 같소 ?"

"기존 산성을 보수해 가면서 새로 쌓더라도, 노역부는 적어도 80만 명은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80 만 명이 아니라, 8 백 만 명이 들더라도 쌓도록 하시오."

 

이렇게 만리장성 축조를 결심한 始皇帝는, 즉석에서 대장 몽염을 불러 명했다.

"朕은 국가의 튼튼한 안보를 위해 山海關과 嘉峪關(가욕관) 사이에 萬里長城을 쌓고자 하노라. 그리하여

그대를 <萬里長城 築營都監>으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祖父인 몽오장군의 명예를 걸고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도록 하라."

 

대장군 蒙恬(몽염) 장군은 蒙骜(몽오)장군의 손자로서, 秦始皇에게는 3代를 이어온 신망이 두터운 장수였다.

몽염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소신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주시와, 皇恩이 망극하옵나이다. 만 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아 올리려면 수많은 노역부가 필요할 것이온데, 그 점은 어찌하오리까 ?"

"百 萬 명이 들어도 좋고 千 萬 명이 들어가도 좋으니 모든 노역부는 각 고을에서 朕의 이름으로 장정들을

징발하여 쓰도록 하라. 만약 단 한 놈이라도 부역(賦役)에 응하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斬刑에 처하라."

 

萬里長城 築營都監 蒙恬(몽염)은 , 시황제의 황명으로 전국 각 고을에서 <장정 징발 포고령>을 내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는 地方官의 책임하에 만리장성 공사에

2 년 간씩 부역을 해야 한다.]는 포고령이었다.

이로 인해 장정들이 날마다 만리장성 노역부로 끌려 나가는 바람에 秦나라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하루도 哭聲이 끊일 날이 없었다. 부역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한번 끌려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보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 만리장성의 築造가 秦始皇의 滅亡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을 보고 생각나는게 있다.

 

王權 强花를 위하여 高宗 때, 攝政이던 大院君이 밀어부친 '景福宮의 重建'이다.

 

처음에는 民怨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시작하였지만(願納錢<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이라 이름하였지만 실은 강제로 할당한 금액 >等) 결국에는 財源의 고갈과 이에 대한 충당을 위하여 當百錢을 발행하다보니 인플레로 물가가 치솟고 부역으로 백성들의 願聲이 높아가 드디어 대원군 몰락의 원인이 되고 말았던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

물론 대원군 덕분에 後孫 들이 宮闕다운 宮을 볼 수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 萬里長城은 총 길이 8851Km에 이르는 장성으로 秦始皇 시대에 趙, 燕의 두 나라가 쌓기를 시작하여, 再城과 蓄城을 반복해 오다 明나라 때인 16 세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또 이때 築城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간편하게 먹었던 중국식 麵醬 (면장)이 舊 韓末, 山東城에서 건너온 화교 들에 의해 우리식 이름인 '짜장면'으로 불리어져 오늘에 이르고있다.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정작 중국에 가보면(홍콩 포함) '짜장면' 이라는 메뉴는 없다.

 

 

 

# 列國誌 30

 

 

** 秦, 滅亡의 序曲

<熱血女 嫦娥 1>

 

 

萬里長城 築造 당시, 공사가 얼마나 힘들고 가혹했던지, 노역부로 끌려 나간 사람들은 열명 중 일곱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젊은들은 목숨을 걸고 부역을 기피하였고, 그에 따라 官吏들의 탄압은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始皇帝는 만리장성 축조 공사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되어 모든 관리들에게,

 

"만약 勞役夫의 책임 숫자를 채우지 못하는 지방관리는 파면한다."

는 嚴命을 미리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방관리들의 폭거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빼앗긴 六國의 백성들은 秦始皇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차에 부역부 차출이 워낙 빡세다 보니, 이제는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라,

 

"X부랄, 그놈은 남의 나라를 힘으로 빼앗더니 이제는 그것도 부족해서 백성들까지 모조리

죽여 없애버리려는가 보구나!. 이렇게 죽을 바에야 이판사판이니 우리도 목숨 걸고 들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

하고 저마다 이를 갈며 始皇帝에게 抗拒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始皇帝를 타도하고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는 저항 의식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지만,

始皇帝만 그러한 현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始皇帝를 둘러싸고 있는 奸臣들이 始皇帝에게,

"만백성은 폐하의 성덕으로 태평성대의 기쁨을 골고루 누리고 있사옵니다."라는 찬사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리장성 축조 공사 기간이 길어질수록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첫째는, 부역으로 끌려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마을마다 청상 과부(靑孀寡婦)가 줄줄이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었으니,

시황제에 대한 그녀들의 怨聲은 하늘에 닿을 듯 하였다.

 

둘째는, 혼인을 해야 할 젊은 남자들이 모조리 노역부로 끌려가는 바람에 처녀들이 신랑감이 없어

시집을 갈 수없게 된 현상이었다.

시집을 가야 할 나이에 처녀로 늙어 죽게 되었으니 始皇帝에 대한 그녀들의 원망이 오죽했을까?

이 지경에 이르자 뜻있는 늙은이들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始皇帝는 쓸데없는 蓄城 공사로 國庫를 탕진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백성까지 씨를 말려

버리지않나 싶구나. 이런데도 천벌이 없을 수 없지 않겠는가?! "...

 

전국적으로 만리장성 축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大使( 황제의 비서실장) 趙高는 始皇帝에게 이렇게 품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총각보다 처녀가 훨씬 많다고 하오니 그들 중에서 美人만 골라 전국 각처에 있는 別宮侍女로 쓰심이 어떠하올지요 ?"

 

始皇帝 이 者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好色漢인지라, <처녀>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하였다. 그리하여 만면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趙高에게 물었다.

"총각보다 처녀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고 ?"

 

총각보다 처녀가 많게 된 원인을 趙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趙高라는 奸臣은 오직 始皇帝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폐하께오서는 하늘이 내리신 어른이시온지라, 하늘이 폐하를 위하여 모든 여자들로 하여금 아들보다는 딸을 더 많이 낳게 해 주신 은덕인 줄 아옵니다."

그 말을 들은 始皇帝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며(女色을 너무 밝히면 秦始皇 이 X처럼 미친 XX가 된다.^^) 말했다.

"어허허!..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

"아니옵니다. 처녀가 많아진 것은 분명히 폐하를 위한 하늘의 뜻이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고 ?"

그러자 奸臣 趙高는 온 몸을 간들거리며 이렇게 대답한다.

 

"생각해 보시옵소서. 지금 폐하께서는 지방을 순행 하실 때에 거처하시려고 전국 각지에 別宮 열다섯 개를 지으 셨사온데, 그 별궁에는 아직 궁녀들이 들어있지 않사옵니다. 하늘은 그 사실을 아시고, 폐하께서 궁녀들을 널리 부르시게 하시려고 딸을 많이 낳게 하신 것이오니 이 기회에 각 지방마다 궁녀들을 천 명씩 선발하여 별궁 시녀로 배치해 놓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으음 ~ 그래요?..

거 참, 기발한 착상이구려"

 

"폐하는 하늘이 내리신 어른이시온지라 마땅히 하늘의 뜻에 따르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하늘의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구만. 허허허.."

 

이리하여 趙高는, 시황제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의 지방관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린다.

 

< 각 지방관은 12세 이상 18세 미만의 처녀들을 모조리 소집하여 그중에서 미인만을 1천 명씩 선발하여 別宮 侍女로 배치해 놓으라. 모든 비용은 국고에서 지출한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방궁만 하여도 궁녀들이 3천 명이 있는데, 1년에 한 번도 들르지 않는 각 지방 별궁에 시녀들을 천 명씩이나 둔다고 하니, 그 한가지만 보아도 始皇帝 이 者의 폭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로인해 각 지방 관청에서는 별궁 시녀들을 선발하느라고 야단 법석이었고, 처녀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시집을 못 보내고 처녀로 죽게 할지언정 황제의 얼굴조차 못 보고 늙어버릴지도 모르는 시녀로 보내기가 정말로 싫었던 것이다.

그 점은 처녀 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별궁 시녀가 되기를 자청해 온 처녀가 하나 있었으니, 그 처녀는 齊나라 출신인 <嫦娥>라는

열일곱 살의 소녀였다.

옛날 齊나라의 영토이었던 平原津에도 시황제의 별궁이 있었다.

따라서 평원진 별궁에 들일 시녀들을 뽑았는데, 상아라는 처녀는 平原津 別宮의 侍女 선발에 자원하고 나온 것이다.

 

모든 처녀들이 한결같이 별궁 시녀가 되기를 기피해 오고 있었는데 상아만은 무슨 까닭으로 시녀가 되기를 자원하고 나왔을까 ?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다.

 

平原津이라는 곳은 원래 제수(濟水: 황하)의 강변에 위치한 벌판이었다. 그러나 강물이 사시 사철 도도히 흘러 가고 들에는 만 가지 화초가 언제나 만발해 있는데다 각종 철새들이 수없이 날아 오고 가는 철새들의 명소이기도 하였다.

始皇帝는 지방 순행중에 우연히 평원진을 지나다가 그곳 경관에 매료되어 평원진에 별궁 하나를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허허벌판인 강가에 별궁을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수가 두려워 들판에 그대로 별궁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 별궁이 들어 설 자리에다 흙을 열 척(十尺 : 3m) 높이로 쌓아 놓고 그 위에 별궁을 짓자니, 거대한 공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舊 齊나라 백성들은 7만 여명이나 동원되었고 공사중에 사고로 희생된 사람도 무려 千여 명이 넘었다. 그 희생자 중에 <나을>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나을에게는 <嫦娥>라는 열일곱 살의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었다.

 

嫦娥는 제나라의 名醫인 華龍 노인의 외동딸로서 얼굴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높았지만, 일찍이

四書三經에 통달하여 학문 또한 심오하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처녀였다.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상아가 '나을'이라는 청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 아버지는 두 사람을 짝지어 주기로 하고, 혼례식을 곧 올리려고 하던 차에 '나을'은 평원진 별궁 공사에 노역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아깝게도 흙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고보니 상아는 시집도 못 가고 청상 과부가 된 셈이었다.

상아는 그로 인해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화룡 노인도 딸의 슬픔이 病이 되어 마침내 자리에 눕고말았다.

官廳에서 화룡 노인에게 <처녀 동원 통고문>이 도착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 某月 某日 某時에 평원진 별궁에서 시녀를 선발하기로 하였으니 12세 이상 18세 미만의 모든 처녀들은 그날 그 時에 평원진 별궁으로 반드시 출두하라. 만일 官命을 어겼을 때에는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에 이르기까지 斬刑에 처한다.>

 

화룡 노인은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통고문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 졌다. 사위 될 청년이 죽어서

사랑하는 딸을 처녀로 늙어 죽게 생긴 것도 가슴이 터질 판인데 별궁 시녀로 뽑아 가겠다고 하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華龍 노인은 관가에서 보내 온 <통고문>을 받아 놓고 혼자 한숨을 짓다가 어쩔 수 없이 딸에게 통고문을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官廳에서 이런 嚴命章이 내려왔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상아는 통고문을 읽어 보고 아무말도 없이 오랫동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화룡 노인은 가슴이 메어져 와 마침내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官가에서는 너를 처녀인 줄로 알고 이런 통고문을 보내 왔지만, 너는 '나을' 청년과 약혼을 했던 몸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처녀가 아니다. 그러므로 너 대신에 내가 관가에 출두하여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시녀 선발에서 제외 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 ?"

 

화룡 노인으로서는 할 수있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상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버님은 염려 마시옵소서. 소녀는 시녀 선발에 자원하여 응할 생각이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대답에 화룡 노인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아니, 시녀 선발에 자원을 하겠다니 .... ? 지금 , 네가 제정신이냐 ! "

상아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이 문제는 소녀에 관한 일이오니 모든 것은 소녀에게 맡겨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룡 노인은 화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너는 皇帝의 <侍女>라는 명칭에 현혹되어 始皇齊를 측근에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지 모르겠다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자원하여 시녀 선발에 應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나는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모양이냐 ! "

 

화룡 노인은 사랑하는 딸이 황제의 <侍女>라는 자리에 눈이 어두워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줄 알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다.

 

"始皇帝는 천하에 둘도 없는 탕객(蕩客 : 바람둥이)이어서, 아방궁에만 궁녀를 3 千 名이나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다섯 군데의 별궁마다 시녀들을 千 명씩이나 뽑는다고 하니, 네가 설사 평원진

별궁에 시녀로 뽑혀 들어간다 한들, 始皇帝 얼굴이나 볼 수있는줄 아느냐? 그런데도 자원해서 시녀가 되겠다는 거냐 ?"

아버지는 크게 怒하여 호통을 쳤지만 상아의 태도는 놀랍도록 침착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마치 소녀가 허영심에 들떠서 별궁 시녀가 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지만,

소녀는 결코 허영심에서 시녀가 되려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시녀가 되겠다는 것이냐 ?"

" ...... "

 

상아는 슬픔에 잠긴 채, 언제까지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화룡 노인은 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너의 어머니는 너를 가질 때에 부처님에게 천일 기도를 올려서 너를 낳게 되었는데, 너를 밸 때에는

월세계(月世界)에서 선녀(仙女)를 만나는 태몽을 꾼 일이 있었다. 네 이름을 <嫦娥>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니라. 그런데 달 속에 선녀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네가 ,천하의 폭군인 始皇帝에게 몸을 바치는 시녀가 되겠다고 하니, 이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이냐 ? 백년 해로를 철석같이 맹세하였던

<나을>이가 죽어서 네가 상심이 크리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을>이와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는 폭군 始皇帝에게 몸을 바치는 시녀가 될 수는 없지 않으냐."

 

嫦娥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저는 나을 낭군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것이 아니옵니다. 오히려 별궁 시녀가 되어 나을 낭군을 죽게 만든 진시황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죽은 나을이의 복수를 하겠다고 .... ?

차마 생각조차 할 수없는 일이구나. 그러나 始皇帝는 힘도 장사인데 네가 어떻게 복수를 한다는 말이냐 ?"

 

"힘으로 대결 한다면 뜻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을 달리하면 어찌 기회가 없겠사옵니까? 그리고 진시황을 죽여 없앰으로서 만 백성을 폭정에서 구할 수도 있을 것이며, 궁녀라는 이름으로 생지옥에서 허덕이고 있는 수천 수만의 처녀들도 해방을 맞을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진시황을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는 부득이 별궁 시녀로 간택 되어야만 합니다."

 

"오오! ...너야말로 과연 하늘이 내려 준 아이로다. 이 애비는 네가 그런 큰 뜻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너를 허영에 들뜬 아이라고 나무라기만 하였으니 실로 부끄럽구나!."

"그런데 소녀는 아버님께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이냐. 네 부탁이라면 이 애비는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

 

"始皇帝에게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侍女들이 각 별궁에 數 萬 명이 있기 때문에 제가 뽑히더라도

始皇帝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또 天佑神助로 始皇帝를 만날

기회가 오더라도 그를 죽여 없애는 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流血劇은 피하고자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어찌 피를 흘리지 않을 수가 있느냐?"

"아버님께서는 천하의 名醫이신만큼,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고도 사람을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는 秘方을 가지고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를 위해 그와 같은 비방약을

한 사람 분만 지어 주시옵소서."

 

"무어라 ? 이 애비더러 사람 죽이는 약을 지어 달라는 말이냐 ?"

화룡 노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것만은 안 된다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된다."며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부탁해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

"누가 부탁을 해도 그것만은 안 된다. 지난날 이 애비를 가르친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그 藥方文을 傳授해 주실 때, "이 약방문은 알고만 있어야지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의자(醫者)는 仁術을 베풀어야지 사람을 죽이는 약을 단 한 번이라도 지어 쓰게 되면 그 사람은 醫者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에게라도 그런 약을 지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하셨다.

 

그런데 始皇帝의 소행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醫者인 내가 어찌 사람을 죽이는 약을 지어줄 수가 있겠느냐? 비록 너의 부탁이라 해도 그것만은 안 되니 그리 알아라."

 

名醫인 華龍 노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거절이었다.

상아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의사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옳은 일이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상대자가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니 仁術이란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명의인 아버지가 사람 죽이는 약은 못 지어 주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만백성을 도탄에 빠지게한 暴君에다, 前後를 살피지 않고 무고한 백성까지 한꺼번에 죄를 덮어씌워 죽이는 殺人狂일 때는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야 할 것이 아닌가요?.

상아는 계속하여 아버지를 설득한다.

 

"사람을 죽이는 藥만은 지어 주지 못하시겠다는 아버님의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아버님으로서는

당연한 말씀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始皇帝란 인물을 살려두면 수 많은 백성들이 지난 수년 동안 겪어 온 것과 같은 고통에 계속 시달리게 하는 것이온데 그를 없앰으로써 수많은

백성을 지옥에서 구출해 낸다면 과연 어느 편이 진정한 인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아버님께서는 평소 病者를 낫게하는 인술만 생각지 마시옵고, 보다 더 큰 인술을 생각해보세요."

 

"의사에게는 오직 하나의 仁術만이 있을 뿐이다. 인술에 어찌 大小의 구분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아버님께 한 말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도탄에서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秦始皇을 죽이려는 계획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

 

嫦娥가 야무지게 따지고 들자, 화룡 노인은 무척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대답을 못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화룡 노인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네 소망이 그토록 간절하다면 네가 원하는 그 藥을 지어 주겠다. 그 대신 이 애비는 의사로써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오늘부로 醫業은 폐업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루약 한 봉지를 지어 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藥을 음식에 타서 세 번에 나누어 먹이면 그 사람은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한 달안에

죽게될 것이다."

"아버님 ! 고맙습니다. 진시황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 다시는 저와 같은 사람도 없으려니와 億兆 蒼生을 도탄 에서 구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옵니까 ?"

상아는 아버지를 부등켜안고 크게 기뻐했지만, 정작 화룡 노인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嫦娥는 별궁 시녀로 선발되어 평원진 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嫦娥가 별궁 시녀로 뽑혀 들어간 바로 그날 밤, 名醫 華龍 노인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사로서 死藥을 지어 준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嫦娥에게 과연 秦始皇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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