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1)
*(노랑유부(老郞幼婦 : 늙은 신랑과 젊은 부인) 화합법.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일어난다는 말을 썼는지 모른다.
어쩌면 밤낮 누워만 있는 영감 꼴이 하도 보기가 역겨워 , 무심중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필봉은 벌떡벌떡 일어난다는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는지,
"누워 있는 사람을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는 약이 없겠냐구 ? ...옛날에 진시황(秦始皇)은 장생불로초(長生不老草)를 구하려고 동남 동녀(童男童女) 오백 쌍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지만,
그런 약은 끝내 구해오지 못했느니라. 그런 신약이 어디 있겠느냐 ! 그런 헛된 생각을 말고, 보약을 열심히 드시게 하여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심히 공대하면 보답은 반드시 너한테 돌아오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한다.
"어서 저녁상을 차려오지 않고 뭘 하느냐 !" ...
여인은 더 이상 아무말도 아니하고 나가 버리는데, 그 뒷모습이 여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누이동생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필봉은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누이동생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한창 좋은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늙은 신랑과 살면서 진정한 남녀간의 운우(雲雨)의 정(情)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여간 답답하지 않구료..."
그러자 김삿갓이 물었다.
"정녕 남자의 양물(陽物)을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는 신약은 없는 것 입니까 ?"
필봉은 고개를 가로 젓으며 말한다.
"왜 없겠소만, 그것이 쉽게 구할 수가 없으니 말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런 것이 있다면 선생의 누이동생을 위하여 구해 봄이 좋을것 같소이다만..."
그러자 필봉이 말을 하는데,
"보신 강장 식품으로는 일등이 해구신(海狗腎)이오, 생사탕(生蛇湯)이 버금가는데..
이런 산골에서야 어찌 해구신을 구할수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곳은 산골이니까 뱀은 쉽게 구할 수가 있겠구려 ?"
"아 참 ! 내가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
훈장은 무릅을 치며 김삿갓을 향해 웃어 보였다.그리고 김삿갓의 손을 다시 움켜잡으며,
"선생 ! 미욱한 나를 이렇듯 일깨워 주시니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제발 이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나와 우리 가족의 안위(安慰)를 보살펴 주소서...."
김삿갓은 필봉의 적극적인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필봉의 부탁대로 훈장 자리를 떠맡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고단한 몸을 서당에서 며칠 쉬어 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윽고 필봉의 누이동생 여정에 의해 저녁상이 차려졌다.
온종일 밥이라고는 한 술도 못 뜬 김삿갓은 차려진 저녁상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에는 산골에서는 좀체 구하기 어려운 지육(脂肉)과 어포(魚脯)까지 있었는데, 과연 부잣집 상이었다.
너무도 배가 고팠던 김삿갓은 체면을 뒤로하고 먹기 시작 하였다. 김삿갓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던 필봉이 말을한다.
"꽤나 시장하셨던게로군요. 여기 술도 한잔 하시구려." 하면서 동동주 한 사발을 건넨다.
그제서야 동동주를 발견한 김삿갓, 필봉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고,
"산골에서 이런 산해 진미의 상을 받아 보기는 처음입니다."
하며 상을 차려온 여정을 바라보며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보니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하면, 많이 드십시요"
하는 말을 남기고 , 여정은 부엌으로 물러났다.
시장기를 어느 정도 채운 김삿갓이 필봉과 함께 술을 마시며 말했다.
"예전에 제가 읽은, 성수패설(醒睡稗設)이라는 책 중에 노랑유부(老郞幼婦)라는 구절이 문득 떠오릅니다."
"어떤 책이었기에 그러시는지, 그 내용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필봉이 김삿갓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김삿갓은 붓을 들어 종이에 일필 휘지로 시 한 수를 써 갈겼다.
二八佳人八九節 이팔가인팔구절
신부는 열여섯 살 신랑은 일흔두 살
蕭蕭白髮對紅粧 소소백발대홍장
파뿌리 흰머리가 붉은 단장을 만났네
忽然一夜春風起 홀연일야춘풍기
어느 날 밤 홀연히 봄바람이 일어나며
吹送梨花壓海棠 취송이화압해당
배꽃이 날아와 해당화를 누르누나.
김삿갓이 써 놓은 시를 한 참 들여다 보던 필봉 선생이 물었다.
"이 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시 이옵니까 ?"
김삿갓은 필봉의 질문을 받고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 옛날 일흔 두 살 먹은 노인이 열여섯 살밖에 안 되는 처녀를 후취(後娶)로 맞아 왔는데, 어떤 사람이 신방을 엿보고 읊은 시 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옛날 돈 많은 늙은이가 나이어린 처녀를 소실로 맞아들였다. 돈이 많으면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앳 된 여자를 탐내는 것은, 어쩌면 모든 남자들에게 공통된 욕망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늙은이는 어린 여자를 소실로 맞아 들이기는 하였는데, 저녁이면 같은 이불 속에서 잠을
자기는 하면서도, 양물(陽物)이 말을 안 듯는 탓에, 한달이 넘도록 범방(犯房)을 한번도 못하였다.
그러니까 신부가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신부는 몇 달을 참고 견디다 못 해, 어느날 밤에는 한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는 영감님에게 성적 자극을 주어 보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뚱이로 방안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며 빈대를 잡는 척하고 있었다.
늙은 신랑은 잠자리에 누워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신부의 아름다운 나체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늙은 영감님은 오랜만에 발동이 걸렸다.
그야말로 견물생심이 불같이 일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신부를 데려온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편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신부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부는 그러한 비결을 알고 나자, 그때부터는 밤만 되면 알몸으로 방안을 기어 다니며 빈대를 잡는 척함으로써, 이틀 밤을 연달아 재미를 보아 왔다. 어린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신비로운 재미인지라, 하룻밤도 그대로 넘겨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칠십 고령인 신랑의 정력은 사흘씩이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이틀 밤이나 야근을 해온 늙은 신랑은 기운이 완전히 탈진해 버려,
이제는 여인의 아름다운 나체를 아무리 보아도 정작 그 물건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부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날 밤에도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알몸으로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빈대를 열심히 잡고 있었다. 늙은 영감은 잠자리에 축 늘어져 누운채, 빈대를 잡고 있는 새 색시의 아름다운 육체를 그윽히 바라 보다가, 문득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애야 ! ... 빈대 그만 잡아라. 이러다가는 빈대 죽고 사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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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2)
*어쩔 수 없이 떠맡은 훈장 자리.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서당을 떠나 도망치기 위해, 눈을 뜨기가 무섭게 삿갓과 바랑을 찾았다.
어물어물 하다가는 꼼짝 없이 잡혀, 공맹재 훈장을 떠맡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잠자리에 들 때 머리맡에 놓아 두었던 삿갓과 바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것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여기에 놓아 두었구먼 ...)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 구석 저구석으로 삿갓과 바랑을 찾고 있노라니까 필봉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선생은 아침부터 무엇을 찾고 계시오 ?" 하고 물으며 빙글빙글 웃고 있다.
"삿갓과 바랑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선생이 치우셨습니까 ?"
김삿갓이 그렇게 묻자 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선생이 도망칠 눈치가 보이기에, 내가 삿갓과 바랑을 볼모로 붙잡아 놓았소이다. 하하하."
김삿갓은 보기 좋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
그러자 필봉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선생은 올 때는 마음대로 오셨지만,
떠날 때에는 마음대로 떠나시기가 어려울 것이오."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면, 나를 감금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오 ? "
"천만에요 ! 선생을 감금하다니요 ? 그게 무슨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시오. 듣자하니 관서지방을 유람삼아 다니신다고는 하나, 특별히 바쁘게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닌것 같고, 가실 곳도 정하지 않은, 주유천하를 하시는 모양이니, 우리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면서 몇 해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가십시다."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훈장 경험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둔다고 일이 되겠습니까 ? "
"훈장 자격이 없어도 나처럼이야 없겠소이까. 나는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고 이미 통고를 해놓았답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들 선생한테 인사를 온다는 거예요. 아마 조금 있으면 마를 사람들이 대거 몰려 올 것입니다."
필봉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몰려 왔는지 문밖에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필봉은 마을 사람들과 미리 짜기라도 했던지, 방문을 열고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은 새로 부임해 오신 훈장님을 환영하려고 오셨는가 보구료.
마침 선생이 방안에 계시니 어서들 들어와 인사를 나누시죠."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방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 오는데, 그 수효는 무려 열 두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사오십대의 학부형이었는데, 개중에는 칠십객 노인도 두 사람이 끼어 있엇다.
그들은 한 사람씩 방안에 들어오는 대로 김삿갓에게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한마디씩을 건네 왔다.
"선생께서 우리 마을의 서당을 맡아 주신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사옵니다."
"저희 집 아이는 그동안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학식이 높은 선생님이 오셨다고 하니, 내일 부터는 서당에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은 훈장 감투를 싫어도 뒤집어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흉악스럽게 치밀한 필봉의 술책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었지만, 이제와서 꽁무니를 뺄수가 없는 형편이 된 것 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인사치례를 한다고 씨암탉 한 마리와 계란 두 꾸러미의 선물까지 가지고 왔기에,
훈장에 대한 그들의 예의와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에 김삿갓은 감동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소감까지 말해 버렸다.
"제가 워낙 부족한 사람인지라, 여러분의 소중한 자제들에게 글을 충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매우 염려 스럽습니다. 그러나 필봉 선생의 지도를 받아 가며, 열과 성을 다하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며 말한다.
"저희들은 선생님만 믿고 이제부터는 마음놓고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 중에는 필봉 선생에 대한 비난의 뜻이 암암리에 내포 되어 있었다.
그러자 필봉 선생이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본래 훈장 자격도 없으면서 마지못해 훈장 자리를 떠맡아 왔었던 것이오.
그러기에 양심의 가책이 없지 않아, 그동안 훌륭한 학자님을 훈장으로 모셔 오려고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오.
그러다가 이번에 공자님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맞아 오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마을에 커다란 경사라고 생각하오. 그동안에는 자격이 없는 내가 훈장 자리를 타고 앉아 있던 관계로, 어떤 분은 아이를 서당에 보내지 않았던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훌륭한 훈장이 오셨으니 모두들 안심하시고 아이들을 공맹재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박수를 보낸다. 그 박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
어찌 보면 필봉 선생이 훈장 자리를 내 놓는데 대한 기쁨의 박수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필봉 선생의 용기있는 고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박수 같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음날부터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훈장 자리를 떠맡게 되고야 말았다.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113)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
김삿갓이 공맹재 훈장으로 들어앉자, 이변이 하나 생겼다.
지금까지의 서당 아이들은 모두가 을 배우던 조무라기 일곱 아이들 뿐이었는데, 김삿갓이 훈장으로 부임한 그날부터 소학(小學), 중용(中庸)과 사략 (史略) 같이 제법 어려운 책을 공부하는 중간치기 아이들 열 둘 씩이나 대거 서당에 몰려왔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아이들은 필봉 선생에게는 배울 것이 없어, 숫제 글공부를 포기하고 있었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필봉은 그러한 현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김삿갓에게 자신의 느낌을 토로하였다.
"약국이라는 것은 임기웅변으로 이럭저럭 명의 행세를 할 수 있지만,훈장 자리만은 아는 것이 없어
가지고는 하루도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하고 고백하며 훈장 자리를 김삿갓에게 넘겨 준 것을 크게 잘한 일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나 그뿐만 아니라 필봉은 이제부터라도 의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지,
"삿갓 선생은 아이들에게 글만 가르쳐 줄 게 아니라,나한테는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좀 가르쳐 주시오." 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의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의보감 이라는 책이 있기만 하면 설명은 해드릴 수 있으니, 우선 책부터 구해 오시죠."
"네, 알겠습니다. 빠른 시간내에 책을 구해 보겠습니다."
필봉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참, 삿갓 선생 ! 우리 마을에는 얌전한 과부가 하나 있는데, 내가 그 과부에게 중신을 들어줄 테니,
선생은 숫제 결혼을 해가지고 우리 마을에서 나와 함께 정착을 하면 어떠하겠소이까 ?"
하고 난데없는 제안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에이, 여보시오.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니, 행여 그런 말씀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시오.
나는 아이들에게 당분간 글이나 가르치다가 적당한 기회에 평양으로 떠나갈 생각입니다."
김삿갓은 혼담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고, 모든 아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아이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을 읽혀 볼 생각이었다.
천자문은 옛날 중국 양(梁)나라 시절,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지은 만고의 명저(名著)로써,
네 글자씩 짝을 이뤄 도합 250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글자의 수효는 모두 1천자에 달하여,
"천자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 주흥사는 천자문 한 권을 짓는데 얼마나 고심이 많았던지, 그 책을 다 짓고 난 뒤에는, 검던 머리 조차 하얗게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문을 일명, 백수문으로도 불러 온다.
천자문은 네글자 문장만으로도 우주 만물의 원리를 속속들이 알 수가 있으며 , 이로써 이 책 한 권만 떼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상식과 인격도 형성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첫 구절을 보자.
천지현황(天地玄黃) ..
아이들은 하나 같이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자신 만만하게 소리 높여 읽는다.
그러나, 천지현황이라는 네 글자로서 이루고 있는 뜻을 새기지 못하고 있으니, 글자만을 익혔다 뿐이지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배우기도 어렵고 새겨 두기도 어려운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본다.
한래서왕(찰 한 "寒",올 내 "來",더울 서 "暑", 갈 왕 "往") .. 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는 뜻이 된다.
천자문에 실려 있는 모든 문장은 이런 식으로 읽어야만 뜻을 알기가 쉬운 것이다.
아이들에게 묻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사이, 아이들이 글을 읽는데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삿갓의 이러한 새로운 교수법(敎修法)을,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된 학부형들은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우리 집 아이는 글 읽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했었는데, 새로 온 훈장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지금은 눈만 뜨면 서당에 간다고 법석을 떨고 있으니, 그야말로 알고도 모를 일이야."
"누가 아니래 ! 우리 집 아이도 서당에 가라면 배가 아프니, 골치가 아프니 하고 핑게를 대기가 일쑤였는데, 훈장이 새로 오고 나서부터는 서당에 일찍 가야 한다고 새벽부터 안달이거든."
"하여간 이번에 오신 훈장은 학식과 실력이 대단하신 분 임에 틀림이 없어 ! "
이구 동성으로 동네 사람들은 김삿갓의 실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한편, 김삿갓은 필봉의 계략에 말려 어거지로 훈장 자리를 떠맡게 되기는 하였으나,
추운 겨울을 지내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방 팔방을 편답(遍踏)하던 처지가 졸지에조무라기 학동(學童) 사이에 같혀 지내려니 여간 좀이 쑤시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가 아니면 만 외고 있으려니, 세상에 그처럼 따분한 일이 없었다.
그나마 머리가 총명하여 쉽게 깨우쳐 주는 아이라도 있으면 그런대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아이들이 모두가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열에 하나 같이 아둔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네 글자를 열흘이 넘도록 가르쳐 주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새까맣게 잊어 버리는 데는 똥이 탈 노릇이었다.
김삿갓은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겨 난 이유를 이제야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인간사의 모든 욕심을 털어 버리고, 한평생을 구름처럼 떠돌며 살아 가려던 내가, 어쩌다가 이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어 버렸을까.)
김삿갓은 솔직이,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그러면서도 도망을 치지 못하고 하루하루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자기가 떠나 가면 2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장래가 너무나도 불쌍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후임자를 구해 달라고 필봉에게 몇 차례 부탁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필봉은 코방귀를 뀌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임자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 삿갓 선생은 아무 소리 말고 한평생을 나와 함께 우리 마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김삿갓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훈장의 고리 타분한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어 보기도 하였다.
世上誰云訓長好 세상수운훈장호
세상에 훈장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無烟心火自然生 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없는 불길이 절로 타오르네
曰天曰地靑春去 왈천왈지청춘거
하늘 천 땅 지 하는 사이 청춘이 가고
云賦云詩白變成 운부운시백변성
부요 시요 하다 보니 머리가 세네.
雖誠難聞稱道語 수성난문칭도어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 잠이이득시비성
자리를 잠시만 비워도 비난받기 일쑤다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천금같은 귀한 자식 훈장에게 맡겨 놓고
請囑撻刑是眞情 청촉달형시진정
잘못하면 매질하라 진정으로 부탁하네.
김삿갓은 따분한 생각이 들 때마다 뒷산으로 달려 올라가기가 일쑤였다.
마을의 진산인 월출산(月出山) 중턱에는 망월정(望月亭)이라는 고색이 창연한 정자가 하나 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에 그와 같은 정자가 있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도 김삿갓은 저녁을 먹고난 뒤 답답한 마음에 망월정으로 나가 , 바람을 쏘이고 오던 길이었다.
서당이 저만치 달빛 속에 보이는 길에서 마주 걸어오던 여인 하나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삿갓 선생님 아니세요 ?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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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4)
*김삿갓을 향한 여인의 연정 (戀情)
달빛에 얼굴을 살펴보니, 그 여인은 필봉의 누이동생으로 홍 향수의 소실인 여정이었다.
"아, 오래간만 입니다. 오라버니 댁에 다녀가시는 길입니까 ? "
김삿갓은 의례조의 인사말을 건넸지만 여정은 깊은 감회에 잠긴 사람처럼 아무 말도 안하고 한동안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더니 문득,
"그동안 삿갓 선생님을 무척 뵙고 싶었어요." 하고 뜻밖에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인의 고백에서 뜨거운 연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여정은 유부녀가 아니던가. 이런 호젓한 달밤에 자칫, 유부녀와 가까이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일순, 그런 불안감이 스치자 자기도 모르게,
"참, 향수 어른의 병환은 요즘은 어떠십니까. 지난번 필봉 선생이 지어드린 보약을 잘 드시고 계시고요." 하고 화제를 의식적으로 딴데로 돌려 버렸다.
여인은 고개를 수그린 채 또다시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김삿갓의 물음에는 대답조차 아니하고,
"저는 그동안 삿갓 선생님을 무척 뵙고 싶었다는 말이예요."
하고 아까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뇌까리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목석이 아닌 이상, 여정의 가슴속에 사무치는 정회(情懷)를 못 알아 들었을리 없었다.
(이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나를 연모하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삿갓은 눈앞의 여인을 힘차게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김삿갓은 또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안 된다. 이 여인은 향수 어른의 소실이다. 이 여인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훈장 노릇도 못하고
쫒겨나게 될 것이 뻔한 일이다.)
훈장 자리에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유부녀와 간통을 하다가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는 자세를 보이며 말을 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 늦기 전에 어서 댁으로 올라가 보시죠."
그러자 여인은 몹시 원망스런 어조로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은 저를 만나 주시기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
김삿갓은 점점 입장이 난처해졌다.
"부인은 지금 무슨 말슴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부인은 향수 어른의 사모님이고, 저는 일개 훈장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이에 만나는 것이 싫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삿갓이 사모님이라는 말 까지 써가며 방어선을 쳐보아자, 여정은 갑자기 앙탈스런 말을 한다.
"저는 사모님이라는 말은 듣기조차 싫어요."
여정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는 바람에, 김삿갓은 오히려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여인의 말을 농담으로 슬쩍 받아 넘기는 대꾸를 했다.
"사모님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신다니, 그 말은 쓰지 않기로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밤중에
길가에 오랫동안 마주서 있으면 누가 무슨 곡해를 할지 모르니까, 어서 올라 가시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좀체 발길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면 어때요. 삿갓 선생은 저와 만나기가 싫으셔서, 일부러 그런 핑계를 대는 게 아니에요 ? "
김삿갓은 웃을밖에 없었다.
"허허허, 내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여사를 싫어하겠소이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여사에게 누(累)가 미칠까 싶어 조심을 하는 것이지요."
여정은 그 말을 듣고 토라졌던 마음이 한결 풀리는지,
"선생이 그런 심정으로 저와 만나기를 조심하신다면 저도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 하겠어요.
그러나 제가 선생님을 무척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어요." 하며 또다시 연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여사의 심정을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사사로이 만나서는 안 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해가며 만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 아니겠어요?
그런 점은 피차간에 삼가해야 할것 입니다."
"글쎄요.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많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견디기 어렵도록 그리워진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 "
"사람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참을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선생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여정은 이제야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듯, 걸음을 옮겨 자기 집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김삿갓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불쌍한 여인 !)
생각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여자다. 스무 살이라는 꿈많은 나이에 칠십 고령인 홍 향수의 소실 노릇을 하자니, 무슨 신통한 일이 있을 것인가.
밥 걱정 없는 것은 다행한 일이 될지는 몰라도, 사람이 밥만 먹는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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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5)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 (상편)
필봉은 홍 향수의 돈과 세력을 이용하려고 젊은 누이동생을 칠십 고령의 소실로 주어 버린 모양이니, 여정은 결국 오빠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 버림 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런 생각을 하며 서당으로 돌아오다 보니, 필봉이 경영하는 백중국 약국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한밤중에 약국에 불이 환히 켜진 것이 이상하여, 김삿갓은 약국에 들러 보았다.
"필봉 선생 계시오니까 ? "
문밖에서 그렇게 부르자, 방안에서 필봉의 대답이 들려왔다.
"삿갓 선생이오 ? ....어서 들어 오시오."
김삿갓이 무심코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필봉은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 남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 밤중에 환자가 오신 모양입니다."
김삿갓이 환자가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나오려고 하자, 필봉은 손을 흔들며 만류한다.
"환자는 곧 돌아갈 것이니 잠깐만 거기 앉아 계시오. 며칠 못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 해야 할게 아니오."
김삿갓은 술도 술이지만, 필봉이 환자를 어떤 식으로 치료해 주는지 궁금하여 윗목에 눌러 앉았다.
환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듯, 필봉은 젊은 아낙네를 보고 말한다.
"젖이 어떻게 아프다는 것인지, 젖을 내놓아 보시오."
젊은 아낙네는 외방 남자 앞에 젖을 내보이기가 거북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남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필봉이 환자를 퉁명스런 어조로 나무란다.
"나는 의원이야 ! 내 앞에서는 이보다 소중한 물건도 내보이는 법인데,젖을 보여 주기가 뭐가 부끄러워 그러는가. 그래가지고는 병을 고칠 수가 없지 않은가."
남편 되는 사람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했던지,
"어차피 병을 고치려면 선생님에게 젖을 내보여야 할 게 아닌가. 빨리 내보여요." 하고 재촉을 한다.
환자는 그제서야 옷고름을 풀고, 옷자락을 좌우로 벌려 젖을 드러내 보인다.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젊은 여인의 오른쪽 젖이 고무풍선 처럼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 유종(乳腫)이로구먼 ! "
필봉은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젖을 이모저모로 살펴 보고 나더니, 옆에 있는 남편을 나무란다.
"이 사람아 ! 마누라의 젖이 이처럼 곪기까지는 무척 아팠을 것인데, 자네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서방이란 사람이 밤마다 마누라 궁둥이만 두드려 주면 그것으로 그만인 줄 알았단 말인가 ? "
남편 되는 사람은 무안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 아니올시다.그동안 약국을 여러 군데 찾아 다녔지만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해, 결국은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음 - 처음부터 나를 찾아올 일이지, 그동안에는 괜스레 돌팔이 의원만 찾아 다녔던 모양이구먼 ! "
필봉은 한마디로, 모든 의원들을 일거에 돌팔이 의사로 처단해 버렸다.
김삿갓은 필봉이 어쩌려고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가 싶어, 옆에서 보기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환자의 남편되는 사람도 필봉의 큰소리가 미심쩍었던지,
"선생님은 이 병을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묻자 필봉은 또다시 큰소리를 치고 나온다.
"예끼 이 사람아 ! 이런 병을 내가 못 고치면 누가 고친단 말인가."
그리고 이번에는 환자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묻는다.
"그동안 몹시 아팠지 ? "
"예, 몹시 아팠사옵니다. 이렇게 곪기까지는 너무도 아파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누라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서방이라는 자는
무정스럽게도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덤벼들지 않던가 ? '
남편 되는 사람은 그 말에 다시 얼굴을 붉히며,
"아이 참 , 선생님두 ! 제가 아무리 무지막지 하기로, 설마 그렇게야 했겠습니까."
필봉은 그제서야 통쾌하게 웃으며,
"하하하, 사내 녀석들이란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닌가 ! ....안그렇소 삿갓 선생 ! "
하고 김삿갓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필봉은 이번에는 환자에게 말한다.
"젊은 아낙네가 무척 예쁘게 생겼으니, 내가 특별히 잘 고쳐주어야 하겠는걸 ....내가 이제 부터 치료 방법을 잘 일러줄 테니, 자네도 잘 들어 두었다가 마누라에게 꼭 그렇게 해드리게, 내말 알아 듣겠나 ?"
그리고 필봉은 치료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거든, 사람의 똥(人糞)을 한지(漢紙)에 겹겹이 싸가지고 화롯불 속에 묻어 두어서, 그 똥을 구어 내도록 하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불이 너무 강하면 똥이 타버리기 쉬우니까, 똥을 태우지 말고 꼭 구워 내도록 해야 하네. 똥을 구으면 회색 빛깔의 밤알만한 덩어리가 되는데,
그것을 가루로 빻아서, 그 가루를 꿀에 개어 가지고 상처에 붙여 두도록 하게. 그러면 반나절 쯤 지나면서 곪았던 젖이 저절로 터지면서 고름이 수없이 흘러 나오게 될 걸세.
필봉의 치료 방법이 너무도 원시적이어서, 김삿갓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환자의 남편도 마찬가지인지,
"사람의 똥을 불에 구워 가지고, 똥가루를 꿀에 개어 바르란 말씀 입니까.
그렇게 하면 낫게 되는 것입니까 ? "
하며 따지듯이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필봉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환자의 남편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지른다.
"이 사람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자네가 무얼 안다고 미주알 고주알 캐 묻는가 ? "
환자의 남편은 호된 책망을 듣고 얼굴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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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6)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민간요법 (하편)
"죄송함니다. 꼭 선생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똥가루를 꿀에 개어 붙이는 곳은 어디에 붙여야 하는 것이옵니까 ?"
"유종이 처음 시작될 때, 젖 속에 밤알만한 응어리가 생겼다가, 그것이 곪고 곪아서 지금처럼 전체가 부어올랐을 것이야. 어때 ? 내말이 맞지 ?"
그러자 환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러하옵니다. 처음에는 젖 속에 밤알 같은 응어리가 생기더니, 그것이 점점 곪아서 이렇게 되었사옵니다."
"물론 그랬을 것이야. 그러니까 그 약은 그 응어리가 처음 생겼던 자리에 붙이면 되는 것이야."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오면, 그 후에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고름을 깨끗이 짜고 나거든, 그때에는 찰밥을 소금에 개어 그자리에 발라 두도록 하게.
농액(膿液)을 계속해서 빨아 내는 데는 찰밥 이상으로 좋은 약이 없기 때문이네.
찰밥은 하루에도 네댓번 갈아대고, 이렇게 10여일이 지나면 고름이 마르면서 속에서 새살이 돋아 나올 것이야, 그때에는 내가 고약을 줄테니 그것을 찰밥 대신 붙이도록 하게.
그렇면 앞으로 보름쯤 지나게 되면 완전히 낳게 될 걸세."
필봉은 자신 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 후, 서랍 속에서 고약 다섯 봉지를 꺼내 주는 것이었다.
환자의 남편은 고약을 두 손으로 받아 들며 말한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내가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홀애비가 되고 말았을 걸세.
마누라 유종이 깨끗이 낫거든 내 덕택인 줄로 알게! "
"그야 물론이죠..... 약 값은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 "
김삿갓은 약 값을 얼마나 받으려는가 무척 궁금하였다.
"약 값 말인가 ? "
필봉은 말을 함과 동시에 김삿갓을 쳐다보며 싱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을한다.
"죽을 사람을 살려주는 셈이니까 약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천 냥은 받아야 할 것이야.
그러나 자네 마누라가 워낙 미인이라, 내가 특별히 깍아줄 테니, 한 냥만 내게 ! "
환자의 남편은 "천 냥"이라는 말에 어안이벙벙했다가, "한 냥"이라는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약 값을 싸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즉석에서 돈을 내놓자, 필봉은 서슴없이 받아 넣으며,
"약 값을 특별히 싸게 해주었으니까, 마누라 병이 다 낫거든 술이나 한 병 들고 찾아 오게.
그것은 의원에 대한 환자의 예의라는 것이야.... 삿갓 선생 ! 안 그렇소이까, 하하하."
필봉은 또 한번 호탕하게 웃으며, 환자더러 어서 가보라고 손짓을 해보인다.
환자가 가고 나자, 김삿갓은 아랫목으로 내려와 필봉과 마주 앉으며 물었다.
"필봉 선생 ! 그 여인의 젖이 무섭게 곪은 것 같은데, 똥가루를 발라서 치료가 되겠습니까 ? "
치료 방법이 너무도 불결하고 유치해 보여서, 솔직한 심경으로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필봉은 정색을 하며 김삿갓을 나무란다.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유종을 낫게 하는데 그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 그 방법은 우리네 조상들이 수 백년 두고 써내려 오는 방법이란 것을 모르시오 ? "
"똥가루를 꿀에 개어 바르면, 유종이 틀림없이 낫는다는 말씀입니까."
"내 말대로 해서 유종이 낫지 않는다면, 내가 환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말씀이오 ? "
필봉은 따지고 드는 자세로 반문한다.
"필봉 선생이 설마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셨을 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얼른 믿어지지 않아,한번 물어 보았을 뿐입니다."
"허어 ... 학문에 있어서는 난다긴다 하는 삿갓 선생도, 의술에 있어서는 판무식이구료.
그야 물론 쇠꼬치를 시뻘겋게 달궈 가지고 젖을 직접 찔러서 고름을 뽑아내는 방법도 없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흉터가 남아서 못쓰는 법이에요. 그러나 내가 일러준 방법대로 하게 되면 흉터가 안 생긴다는 사실을 아셔야해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내가 동의보감은 못 배웠지만, 민간 요법에 있어서는 나를 당할 자가 없어요. 천하의 명의였다는 화타나 편작인들 별사람인 줄 아시오 ? 두고 보시오. 오늘 왔던 그 사람이 한 달쯤 후에는 병을 낫게 해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술을 한 병 가지고 나를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이오.
그때에는 그 술도 삿갓 선생과 함께 나눠 먹겠지만, 우선 오늘은 집에 있는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기로 합시다."
필봉은 그렇게 말하며, 부엌에다 대고 술상을 빨리 차려 오라고 호령을 지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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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7)
*필봉의 자승자박(自繩自縛)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필봉은 술잔을 나누며 다시 말한다.
"삿갓 선생에게 "동의보감"까지 배우면, 나도 만고에 빛나는 명의가 될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그놈의 책을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김삿갓은 "명의"라는 말을 듣자, 불현듯 홍 향수가 와병(臥病)중인 사실이 떠올라 이렇게 물어 보았다.
"참, 조금전에 집 앞에서 매씨(妹氏)를 만났는데, 향수 어른의 병환은 아직도 좋지 않으신 모양이죠 ?"
필봉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삿갓 선생이 내 누이동생을 만나셨던가요 ? 그애가 선생한테 무슨 말을 하지 않습디까 ?"
조금 전에 노상에서 만났을 때, 여정은 김삿갓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며,
"언제 한번 선생님을 조용히 만나 뵙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필봉에게 하기가 거북스러워 김삿갓은 시치미를 떼고,
"노상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을 뿐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
혹시 매씨께서 나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던가요 ?" 하고 넌즈시 물어 보았다.
필봉은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면서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한다.
"그애가 조금 아까 나를 만나러 와서, 삿갓 선생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더군요."
"매씨께서 나의 옷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날씨가 추워져서 솜옷을 입을 때가 되었는데, 삿갓 선생은 아직도 겹옷을 입고 계셔서,여자의 눈에는 무척 측은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애가 나더러 고 물어 보더군요. 나는 그거 참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대뜸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씀만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춥지 않아서 솜옷을 갈아 입지 않았다 뿐이지, 솜옷이 없어서 겹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행여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도록 전해 주십시오.
그런 일을 혹시 향수 어른께서 아시면 어떤 오해를 하실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여정이 솜옷을 지어 주겠다는 호의와 는 말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아서 김삿갓은 단호한 태도로 거절해 보였다.
필봉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향수 어른의 병세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단 말이야."
"향수 어른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뇨 ?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필봉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김삿갓을 마주 보며,
"선생이니까 말씀인데, 향수 어른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별안간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병세가 갑자기 악화라도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건 아니지만,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인데,그 어른이 요즘에는 하루, 미음 한 공기로 간신히
연명을 해오시는 중이거든요.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소이까."
"일전에 읍내에서 지어 온 보약은 자셨는가요 ? "
"보약도 소화시킬 만한 기운이 있어야 효과를 보실게 아니오."
필봉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침통한 침묵에 잠겼다가,
"그애를 향수 어른에게 주어 버린 것은 나의 일생 일대의 실수였어."
하고 자탄하듯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필봉의 애타는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는 홍 향수의 돈과 세도를 이용하려고
누이동생을 소실로 들여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홍 향수가 너무 늙어서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데다가, 덜컥 죽어 버리기라도 하게 되면 여정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것 아니겠나.
필봉은 지금 그런 경우를 생각하고 혼자 한숨을 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것이랴.
김삿갓은 그런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말했다.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실 것도 아닌데, 왜 지나친 걱정을 하시오."
필봉은 술을 마셔 가면서,
"물론 나도 향수 어른이 오늘 내일로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러워요."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으니, 사람의 앞날을 누가 알 수 있겠소이까."
"그야 물론 그렇기는 하지요. 당장 죽을 것 같으면서도 4,5년씩 길게 끄는 목숨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어차피 늙고 기력이 쇠약해져, 죽을 사람이 목숨만 오래 끌면 무엇하오.
그럴수록에 누이동생의 신세만 비참해질 뿐이지요."
김삿갓은 이와 같은 우울한 화제에서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우울한 애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유쾌하게 마십시다. 이 좋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맛이 떨어집니다."
"알겠소이다. 그런 애기는 집어 치우고 술이나 마십시다."
술잔이 오고 가는 동안에 두 사람은 어지간히 취했다.
그러나 필봉은 아무리 취해도 누이동생 일만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지, 또다시 그 애기를 들고 나온다.
"어머니,아버지가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은 그애가 여섯 살때의 일이었지요.
그때부터는 그애를 내가 맡아 길러 왔으니까, 그애는 말이 누이동생일 뿐이지 나에게는 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에요."
"매씨 애기는 안하기로 해놓고, 그 애기를 또 끄집어내면 어떡합니까 ? "
"그애의 장래가 너무도 암담해 보여서 그래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우겨서 향수 어른의 부실(副室)로 들여보냈거든요."
"아무리 그렇기로니,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
필봉은 한동안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이런 말을 한다.
"그애가 머지않아 과부가 될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삿갓 선생은 그애를 불쌍하게 여겨서, 적당한 기회에 거두어 주실 용의는 없으시겠소 ?"
김삿갓은 필봉의 말을 듣고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홍 향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거든 그의 소실인 누이동생을 거두어 달라는 말은, 아무리 가상의 말이라 하여도 있을 수 없는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여보시오. 필봉 선생! 주정을 해도 분수가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런 소리는 두번 다시 하지 마시오."
그러나 필봉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는 주정이 아니고 진담이에요. 삿갓 선생도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내가 왜 독신입니까. 관서 지방을 구경가는 길에 필봉 선생에게 붙잡혀서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지, 고향에는 처자식이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처자식이 있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 하나만 데리고 산단 말이오.
그애는 제법 쓸 만한 아이라오. 가만히 보니까 그애도 삿갓 선생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삿갓 선생의 옷 걱정을 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애가 만약 불행하게 되거든, 선생이 그애를 꼭 거두어 주시오. 나의 간곡한 부탁이에요."
김삿갓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더이상 애기를 해보았자, 귀결이 맺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애기는 그때에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십시다."
하고 억지로 필봉의 말을 막아섰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김삿갓 생각에는, 필봉이 워낙 끈기가 강한데다, 무슨 일이나 자기 본위로
밀어 붙이는 성격인지라, 그의 함정에 빠져들까 봐 내심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필봉은 새삼스럽게 술을 권하면서,
"우리가 언젠가는 남매간이 될 것을 나는 꼭 믿고 있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술을 한잔 받아 주시오."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술잔을 받기는 하면서도 속으로는 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필봉이 언제 무슨 술책을 부려 자기를 업어 넘기려고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이곳을 떠나 버릴 궁리를 골똘히 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몸이 아닌가 ? 그렇다면, 하루속히 후계자를 구해 놓고, 나는 나대로 다시, 방랑의 길로 오르리라.)
필봉과 헤어진 김삿갓은 후계자를 사방으로 구하면서 , 필봉과의 만남은 의식적으로 피해가면서 날마다 망월정에 올라 가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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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8)
*오랫만의 운우지정 (雲雨之情)
김삿갓이 필봉을 경계하며 지내던 어느날 밤, 김삿갓이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로
"삿갓 선생님 ! "
하고 작은 소리로 김삿갓을 부르며 몸을 흔든다.
김삿갓은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며,
"누구요 ?"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불 속의 여인은 놀라 일어나려는 김삿갓의 몸을 짓누르며 침착한 어조로,
"삿갓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저예요."
"저가 누구요 ? "
"필봉의 누이동생 여정이예요."
"엣 ? 여정 여사 ?"
김삿갓은 다시 한번 놀라며,
"여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소 ?"
자다가 놀라 잠을 깬, 김삿갓의 손에 닿는 여인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였다.
불시에 잠을 깬 김삿갓의 코에는, 젊은 여인이 알몸뚱이로 누워 있는 탓인지, 이불 속에서는 향기로운 지분 냄새가 정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여정은 김삿갓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으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오라버니 께서 오늘밤 삿갓 선생님을 모시라는 말씀이 계셔서 체면없이 이렇게 모시러 온 것입니다."
"뭐요? 필봉이 나를 모시라고 해서 왔다구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오래 전부터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당신에게는 홍 향수가 있는데 이럴 수가 있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삿갓은 젊은 여인의 육체가 몸에 닿는 순간부터,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본능적인 욕구가, 터져 나오려는 화산 처럼 꿈틀거렸다.
" ......."
여인은 김삿갓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 없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여인은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여인이 울고 있음을 깨닫자, 김삿갓은 별안간 측은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울기는 왜 우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애기 좀 들어 봅시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 하듯 말한다.
"홍 향수는 명색이 영감님일 뿐이지, 저한테는 있으니 마나 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 양반이 처음부터 싫었지만, 오라버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어쩔수 없이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예요."
"싫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
김삿갓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의식적으로 꾸짖어 보였다.
그러자 여인은 어깨가 들먹이도록 울어 대더니, 문득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제가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삿갓 선생님을 알고 나서는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니,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김삿갓의 팔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철이 없었을 때에는 돈만 많으면 인생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옳게 생각했구려. 인생이 돈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체면 불고하고 이렇게 삿갓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삿갓 선생을 모시라는 말씀도 계셨지만,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언젠가는 삿갓 선생님을 반드시 찾아왔을 거예요."
여정은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호소하며 김삿갓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이렇다 보니, 김삿갓이 제아무리 도덕 군자이기로, 여인의 유혹을 물리쳐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몸을 힘차게 끌어당기니, 여인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전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며 접근해 왔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금욕 생활을 해오던 처지인지라, 굶주린 호랑이가 살찐 암캐를 낚아채 듯이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여인도 오랫동안 애욕에 굶주려 온 듯, 사나이의 포옹을 뜨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여인의 몸을 완전히 점령한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의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나는 지금 필봉의 흉악한 음모에 걸려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러나 그런 의혹에 연연하여 여인을 떨쳐 버리기에는, 눈앞에 향락이 너무도 황홀하였다.
여정도 오빠를 닮았는지 의욕과 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김삿갓의 온 몸을 더듬어 가며, 또다시 향락의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두 남녀간에, 한번 터진 봇물은 동녘이 밝아 오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이윽고 멀리서 새벽 닭소리가 들려 오자, 여정은 그제야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는지,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으며, 무척이나 아쉬운 어조로 말한다.
"날이 밝아 와요. 누가 보기 전에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알고도 남을 만한 소리다.
"남에 눈에 띄기 전에 어서 돌아가시오."
"제가 돌아가고 나거든 한잠 더 주무세요. 이따가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이 있겠지만, 오늘밤이나 내일 저녁이나 형편 보아서 또 오겠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쭉 돋았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필봉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어서려는 여정의 치맛자락을 부랴부랴 움켜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방랑시인 김삿갓 (119)
*필봉의 흉계를 간파(看破)한 새벽의 탈출.
"잠깐만 ...가기 전에 말 좀 물어 봅시다."
여정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어깨를 이불로 감싸 주면서 스스럼없이 말한다.
"고단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무슨 말을 물어 보시려고 그러세요."
김삿갓은 여정이 과부가 되더라도,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까닭으로 알몸으로 이불 속으로 침입해 왔는지, 배후의 인물과 이유 만큼은 분명히 알고 싶었다.
"우리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지 ?"
말할 것도 없이 여정이 안심하고 입을 열게 하려는 김삿갓의 의도였다.
아니나다를까, 여정은 자못 행복스런 웃음을 보이며 김삿갓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는 맘대로 찾아왔다고 야단을 치시더니, 그동안 마음이 변하셨어요?"
"우리는 이미 남남지간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그럴밖에 없지 않아 ?"
김삿갓은 손을 뻣어 여정의 젖가슴을 만지던 손을 엉덩이 쪽으로 옮겨 ,정답게 어루만져 주다가 별안간 생각이 난 것처럼 물었다.
"참, 당신은 오라버니가 나를 모시라고 해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처럼 말했는데, 오라버니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
여정은 김삿갓이 당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불러주자, 얼굴에 기쁨에 빛이 들면서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그러나 대답만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저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삿갓 선생님을 찾아왔을 거예요. 저는 그만큼 삿갓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던걸요."
"나같이 못난 사람을 그처럼 사모하고 있었다니 고맙군그래 ..오라버니가 뭐라고 하면서 나를 모시라고 하던가 ?"
"향수 어른이 돌아가시거든 삿갓 선생님과 결혼시켜 줄 테니, 지금부터 정을 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음 ! 필봉이 그런 생각으로 당신을 내게 보냈구먼."
김삿갓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실상인즉 필봉의 무시무시한 음모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여정은 김삿갓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혹시 삿갓 선생님은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에요 ?"
김삿갓은 당황히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 내가 후회할 리가 있는가. 그러나 홍 향수가 언제 죽을지 그게 문제거든 ! 한두 달쯤 뒤에
죽는다면 기다릴 수 있지만 일 년후에 죽을지, 이태 후에 죽을지 그것만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 말에 여정은 자신 있는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할 거예요."
"오래가지 못하다니 ?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자 여정은 김삿갓의 손을 꼭 움켜잡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 애기는 누구한테도 말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영감님은 열 흘안에 꼭 돌아가시게 되어 있어요." 하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여정의 말을 듣고 가슴이 섬뜩하였다. 홍 향수가 열 흘안에 꼭 죽게 된다고 확언하는 것을 보면, 필봉과 여정은 공동으로 모의를 하여 홍 향수에게 독약이라도 먹여,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정이 어떻게 그런 장담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겪어 온 필봉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위인임이 틀림 없어서, 누이동생 여정조차, 한밤중에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알몸으로 덤벼들어 가게 시키지 않았던가.
김삿갓은 음모의 진상을 좀더 상세히 알고 싶어, 슬쩍 이렇게 물어 보았다.
"홍 향수는 지난 겨울부터 돌아가신다고 하면서 아직도 살아 있는 분이 아닌가 ?
그런 분이 열흘 안으로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 말야."
여정은 또다시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 문제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오라버니가 그러시는데, 이번만은 틀림없이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 오라버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러네, 지난 겨울에도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직도 살아 있지 않은가 ? 그러니 당신 오라버니 말씀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사정이 달라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우리 사이에 숨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주어요.
그래야 나도 당신을 믿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을 것 아닌가."
그 말에 여정은 무척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 놓기가 너무도 거북스러운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오라버니가 이번만은 그 양반한테 특별한 약을 쓰고 계신 것 같아요."
하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신의 추측이 적중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놀라며,
""특별한 약이라니, 대체 무슨 약을 쓰고 있기에 ?"
하고 예사롭지 않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 만큼은 여정도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어떤 약을 쓰고 계시는지 그것만은 저도 몰라요."
김삿갓은 그 대답 한마디로 필봉의 음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려고 그에게 보내는 약에 독약을 섞어 먹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필봉의 엄청남 음모를 속속들이 알고 나자, 여정을 더이상 붙잡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 여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정의 등과 엉덩이를 의식적으로 정답게 어루만져 주면서 이렇게 말을했다.
"홍 향수가 열 흘안에 죽게 되면 , 우리들은 그때부터는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
"그 양반만 돌아가시면 저희들의 문제는 마음대로 될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아요 ! "
"그럼, 가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드리겠어요."
여정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휴우 ...."
김삿갓은 잠자리에 털썩 누워 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필봉은 지금 홍 향수를 독살하고 있는 중인데, 그를 살려 낼 무슨 방도가 없을까 ?)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송장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홍 향수를 억지로
살려 내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 같았다.
그보다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가만있어보자, 홍 향수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물어 보나 마나, 필봉은 홍 향수를 죽이고 나면, 여정을 김삿갓과 강압적으로 결혼시키려고 덤빌 것이 뻔한 일이다. 누이동생을 한밤중에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들여보낸 것도 그에 대한 전주곡이 분명하였다.
만약 필봉의 마수에 걸려들어, 싫든 좋든 간에 여정과 깊은 관계가 맺어지게 되면, 삿갓 자신은 훈장 신세를 영원히 면하기 어려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칠 노릇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주저하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당장
이 시간에 멀리 도망을 쳐버려야 한다.)
김삿갓은 별안간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옷을 추스려 입기가 무섭게 삿갓을 깊숙이눌러 쓰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필봉의 무시무시한 마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삼십 육계만이 있을 뿐 이었다.
(가자,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길을 가야 한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훈장 노릇을 해온 것은 순전히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외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할 홍 향수가 천명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고, 필봉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자 ! )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새벽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른 봄의 새벽 공기는 살을 에이는 듯 차갑다.
그러나 김삿갓은 누군가 추격을 해올 것만 같아서 숨 가쁘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동쪽 하늘이 환히 밝아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제야,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의 세계를 되찾은 것만 같아서, 가슴을 활짝 펴며 기운차게 걸어 나갔다.
방랑시인 김삿갓 (120)
*인생자고 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건곤불노 월장생(乾坤不老月長生).
희환산은 황해도와 평안도 사이에 걸쳐 있다.
김삿갓은 그 희환산 기슭에 있는,용천관(龍泉館) 주막에서 술을 마시며 주모에게 물었다.
"혹시 이 근방에 구경할 만한 명소가 없는가 ?"
"이곳 용천관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데 그러세요. 여기서 산속으로 5리쯤 들어가면 환희정(歡喜亭)
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정자 아래에는 오열탄(嗚咽灘)이라는 유명한 여울이 있지요."
"오열탄 ? .. 이상하구려, 이곳에 와보니 산의 이름이 희환산이요, 정자의 이름도 환희정이라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오열탄이라니?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선남 선녀가 그 여울물 앞에서 이별을 나누며 흐느끼기라도 했던 모양이구려."
"손님은 오열탄의 유래를 잘도 알고 계시네요."
"이 사람아! 나는 오열탄의 유래를 알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세. 오열탄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만한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어마, 그러세요? 아닌게아니라, 오열탄이라는 여울에는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사실이랍니다."
"나는 평양으로 가는 길인데, 오열탄이라는 여울을 꼭 구경을 하고 싶네그려.
자네가 그 여울목에 얽혀 있는 설화를 좀 말해 줄 수 있겠나 ?"
"그러시지요. 이 근방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애긴걸요."
그러면서 주모는 다음과 같은 말을 김삿갓에게 들려 주었다.
오래전에 유홍준(劉弘俊)이라는 사람이 황주 고을에 선위사(宣慰使)로 와 있는 동안, 안악 기생 옥향(玉香)과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유홍준이 평양으로 떠나게 되자, 옥향은 용천관 여울목 앞까지 전송을 나왔는데,
서로 헤어져야 할 순간이 되자, 이별이 서러운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목이 메도록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여울목도 무심치 않았던지, 지금까지 조용히 흐르고 있던 여울물이 갑자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 여울의 이름을 오열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것 참, 기가 막힌 설화일세. 사람이 흐느껴 울자, 여울물도 흐느껴 울었다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동화(同和)>가 아니던가. 이렇게 우리네 조상들은 자연과 어울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며 함께 호흡하며 살아왔다네 ! "
인간 세계에서는 만남과 이별이 항상 존재한다. 영원한 삶도 있을 수 없으며, 백 년 전에 살기시작한 사람이 지금에 존재 할수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백 년 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 자연은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가 매일 만나 보고 있는 하늘과 땅과, 별과 달은, 천 만년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감회에 젖어 문득, 인생자고 수무사, 건곤불노 월장생 (人生自古 誰그無死 , 乾坤不老 月長生) ...
<인생은 자고로 죽지 않는 사람이 뉘 있으리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늙지도 않고 달과 함께 영원히 살아온다 >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희한산 계곡은 과연 천하의 절경이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도도하게 흘러 내리는 물은 돌에 부딪쳐 구슬이 되고, 언덕을 흘러 넘어 가선, 폭포가 되었다.
환희정(歡喜亭)이라는 정자는 오열탄을 눈 아래 굽어볼 수 있는 언덕위에 있었다.
김삿갓은 정자위에서 쉬고 있는 늙은 나무꾼에게 물어 보았다.
나무꾼은 땀을 닦으며 대답한다.
"내가 어릴적 만 해도, 저 여울물을 <황공탄>이라 불렀다오. 그러나 4,50년 전부터 오열탄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옛날에 어떤 임금님이 저 여울물을 친히 건너가셨다고 해서, 그때부터 황공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지요."
그러나 임금님이 이 깊은 산속에 올라, 저 여울물을 친히 건너셨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오열탄을 옛날에 황공탄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틀림 없었던지, 서거정(徐居正)의
시 두 편이 정자 위에 걸려 있었다.
皇恐灘前皇恐意 황공탄전황공의
황공탄 여울 앞에 황공스러운 마음
喜환山下喜환情 희환산하희환정
희환산 아래에서의 뜨거운 애정
如何嗚咽龍泉水 여하오인용천수
용천물은 어이하여 목메어 우는고
去似情人哭別聲 거사정인곡별성
애인끼리의 이별로 흐느끼는 것 같구나
黃州관裡花滿開 황주관리화만개
황주관에 꽃이 만발한 걸 보니
前度劉郞三度來 전도유랑삼도래
지난날의 유랑이 다시 찾아왔던가
嗚咽灘聲何日歇 오인탄성하일헐
목메어 우는 소리 언제나 끊이려나
朝朝送別哭如雷 조조송별곡여뇌
날마다 우는 소리 우뢰소리 같구나.
오열탄 여울로 가까이 내려가 물소리를 들어 보니, 수많은 바위들에 부딪쳐 흘러 내려가는 물소리가, 아닌게 아니라, 흡사 사람이 목메어 흐는끼는 울음소리와 같았다.
만남은 한없이 기쁜 일 이지만, 이별이란 언제나 슬프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별을 그토록 슬퍼했던 그들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모두, 저승으로 갔을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문득 한 해 전에 사별한 수안댁을 떠올려 보았다.
한때나마, 정을 붙이고 살던 마누라와 사별한 것은 정녕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그 옛날, 지금 저 오열탄 앞에서 이별의 슬픔에 흐느껴 울던 유홍준과 옥향의 슬픔도 자기와 다르지 않겠다고 느낀 김삿갓은 ,
(당신네들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거든, 저승에서나마 꼭 이루소서 ! ) 하며,
두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 부터의 축원을 올리며 계곡을 따라 발길을 상류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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