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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잡는 국정원과 경찰의 "신영복 서체 사랑" 양태

by 恒照 2021. 7. 17.

간첩 잡는 국정원·경찰의 ‘신영복 서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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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열린 최관호 신임 서울경찰청장 취임식 장면. 최 청장 배경에 쓰인 표어는 과거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됐던 고(故)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서체(어깨동무체)로 제작됐다. /서울경찰청
서울경찰청이 통일혁명당(북한 연계 지하당 조직) 사건에 연루돼 20년을 복역한 고(故)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서체(어깨동무체)로 쓴 표어를 사용 중인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앞서 국가정보원도 지난달 4일 ‘신영복체'로 쓴 새 원훈석(院訓石)을 공개해 논란이 됐다. 과거 대공 수사를 주도한 기관(국정원)과 대공 수사권을 이관받게 된 기관(경찰)이 대표적 공안사범의 서체를 원훈·표어에 사용하는 것을 두고 적절성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경찰청의 신영복체 사용에 관심이 집중된 계기는 지난 9일 열린 최관호 신임 서울경찰청장의 취임식이다. 당시 최 청장은 ‘가장 안전한 수도치안, 존경과 사랑받는 서울경찰’이란 글귀가 적힌 푸른색 벽을 등지고 취임사를 했다. 서울경찰청 측은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취임식 소식을 사진과 함께 내부망에 올렸는데, 이를 본 상당수 경찰 간부들이 문제의 글귀가 신영복체임을 지적한 것이다. 대공 수사를 담당하는 안보경찰들 사이에선 “간첩을 잡아야 할 경찰 책임자가 국보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인사의 글씨체를 적어놓고 취임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하는 기류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글귀는 서울경찰청의 ‘비전 표어’로, 최 청장의 전임인 장하연 전 청장 시절 만든 것이다. 장 전 청장 역시 작년 8월 취임식 때 이 표어가 적힌 현수막을 등지고 취임사를 했다. 당시 서울청은 신영복체로 쓴 현수막 디자인을 일선 경찰서들에도 배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서울경찰청 표어에 갑자기 관심이 집중된 것은 최근 불거진 국정원 원훈석 논란 때문인 듯하다”고 했다.

작년 서울경찰청으로부터 표어 디자인을 의뢰받은 업체는 서울청이 직접 신영복체를 골랐다는 입장이다. 업체 관계자는 본지 전화 통화에서 “당시 신영복체, 포천막걸리체 등 3가지 글씨체를 시안으로 만들어 서울청에 전달했다”며 “이 중 서울청에서 고른 게 신영복체”라고 했다. 서울청 관계자는 “현수막 시안을 받았을 때 따로 글씨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며 “실무자가 (신영복체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눈에 잘 띄는 글씨체를 골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안팎에선 “장하연 전 청장이 밀어붙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나온다. 경찰대 5기인 장 전 청장은 현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파견돼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인 윤건영 당시 국정상황실장(현 국회의원)과 호흡을 맞췄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장하성 주중 대사의 친척이기도 하다. 신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아왔고,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 등이 제자로 알려져 있다.

신영복 전 교수는 1988년 사상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 뒤에도 “난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에 이어 경찰까지 신영복체를 사용한 것을 두고 ‘정체성 부정’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안보경찰은 “정권 코드 맞추겠다고 이런 것을 지시하는 고위 간부들과 같은 경찰이라는 게 수치스럽다”고 했다.

 

[만물상] ‘신영복체’라는 부조리극

 

마오쩌둥(毛澤東)은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글자를 약간 기울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그의 서체를 마오티(毛體)라 하는데, 최고 권력자의 글을 받으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학들은 교명을 받아 정문에 내걸었다. 거절당하면 마오의 글자를 채집해서라도 현판에 썼다. 칭화대(淸華大), 우한대(武漢大) 등 100여 곳에 이른다. 문화대혁명 재앙 후 한동안 외면당했는데, 마오처럼 절대 권력자가 되고 싶은 시진핑 주석이 이를 모방하면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포털에는 어떤 글씨든 마오티로 바꿔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서체가 권력이 되는 또 다른 나라가 북한이다. 김씨 왕조의 태양서체(김일성), 백두산서체(김정일), 해발서체(김정일 어머니 김정숙)를 ‘백두산 3대장군 명필체’라 한다. 2018년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이 방명록에 남긴 글은 첫 자음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쓰고, 글씨의 가로선을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기울였다. 필적 감정가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이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씨체”라고 분석했다.

▶한국에서 권력이 된 서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신영복체일 것이다. 조정래 장편 ‘한강’의 표지, 손혜원 전 의원이 디자인한 소주 ‘처음처럼’, 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 그가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돌린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 글씨가 모두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서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가정보원이 지난달 창설 60주년을 맞아 새로 공개한 원훈(院訓)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도 신영복체라고 한다.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6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복역한 뒤 출소한 사람이다. 간첩 혐의를 받았다. 이런 사람의 글씨체를 간첩 잡는 국정원의 원훈으로 썼다니 이것도 ‘남북 이벤트'인가. 아예 국정원 간판을 내리는 것은 어떤가. 이번에는 경찰이 ‘가장 안전한 수도 치안, 존경과 사랑받는 서울 경찰’ 글씨체를 신영복체로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경찰은 국정원으로부터 간첩 수사권을 넘겨받았다. 세상에 하고많은 글씨체를 놔두고 간첩 경력자의 글씨체를 다른 기관도 아닌 국정원과 경찰이 상징으로 삼나.

▶통혁당은 민주화와 상관없이 북한을 위해 암약했던 집단이다. 문 대통령은 통혁당 관련자들과 가깝거나 유독 챙긴다. 그러자 국정원과 경찰까지 신영복체를 쓴다. 여기에 국민 세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부조리극(劇)은 자기모순적 속성과 그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꼬집는 연극 장르다. 무대에서나 벌어질 일인데, 우리나라 정부에선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