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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 별세(향년90세)

by 恒照 2021. 11. 23.

현대사 비극’ 쓴 전두환 전 대통령 2021.11.23 별세  --  지병으로 연희동 자택서 숨져… 향년 90세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던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집에서 쓰러져 오전 8시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고 오전 9시12분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사망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시신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전 전 대통령은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돼 세브란스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아왔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나 대구공업고, 육군 사관학교 11기를 졸업했다. 이후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청와대경호실 차장보, 국군보안사령관,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육군대장 등을 지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됐고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했다. 1980년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며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해 현대사에 비극을 썼다. 1981년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퇴임 후 내란과 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한편 12·12 군사 쿠데타 동지 관계인 노태우 전 대통령도 지난달 26일 별세했다.

 

 

<전대통령 이력>

출생1931. 경상남도 합천,  사망2021. 11. 23.

가족배우자  이순자, 아들  전재국, 아들  전재용, 아들  전재만, 딸  전효선

 
학력
~1984  페퍼다인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1965  미국육군보병학교 수료
~1960  육군고급부관학교
~1955  육군사관학교 학사
~1951  대구공업고등학교

수상내역

  • 미국 동성훈장

경력사항

1981~1988.2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
1980.9~1981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1980             육군 대장
1980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1980.4~1980.7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
1979~1980     국군 보안사령관
1976           청와대경호실 차장보
1971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0            제9사단 29연대장 (월남 백마부대)
1967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1966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하였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뤄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간접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16]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이후 반란수괴죄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7] 하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두 명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유력 후보 세 명(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대선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사면되었다.

퇴임 후 지낸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한다. 원래 나이에 비해 상당히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연희동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절친 노태우가 사망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으며, 이로써 20세기에 집권한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2·12쿠데타’로 권력 장악 → 5·18 무력 진압 ‘피의 집권’

 

軍 사조직 ‘하나회’ 주축 신군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서울의 봄’ 민주화 열망 꺾고 광주 5·18민주화운동 짓밟아
체육관 선거로 11대 대통령 올라… 발포 명령자 등 진상규명 안돼
1979 10 28일 전두환 당시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건개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특보. 동아일보DB1979 12 12일 오후.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12·12쿠데타가 시작된 것. 이들은 전 전 대통령이 결성한 군 사조직 ‘하나회’ 소속으로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정권 장악 시도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정 총장에게 적용했다.1955년 2월 육사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0시간의 쿠데타로 권력 장악
허 대령 등은 이날 오후 6시 50분 제33헌병대 병력을 정 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한 뒤 오후 7시 10분경 정 총장을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같은 시간 전 전 대통령은 총리공관에 있던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정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상의하겠다”며 서명하지 않고 버텼다.

노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나온 총소리를 듣고 가족과 함께 피신한 뒤 국방부 장관 집무실로 향했지만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신군부에 체포됐다. 결국 최 대통령은 노 장관의 건의를 수용해 13일 오전 5시 10분 정 총장 체포안에 서명했다. 동시에 신군부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공백 상태에 있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신군부가 작전명 ‘생일집 잔치’로 일으킨 12·12쿠데타가 단 10시간 만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쿠데타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치며 빠르게 집권을 향해 나아갔다. ‘서울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분출됐지만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하고 국회도 폐쇄했다.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년 8월 전역(육군 대장), 국가보위비상 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하야를 선언했고 전 전 대통령은 8월 27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 여전히 더딘 5·18 진상 규명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쳤지만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에서 일어난 최초 발포,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이뤄진 집단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가 진상 규명의 핵심이지만 명령자가 누군지 아직 특정하지 못한 상태다. 전 전 대통령은 5월 27일 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기소돼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 5월 21일과 27일 발생한 광주 도심 헬기 사격 책임자와 시신 암매장 장소, 성폭행 가해자 관련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 측은 “시위대의 공격에 군인들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일 뿐”이라며 발포를 명령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무장 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 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