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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나의 이야기

서울공대 제어계측공학과 권욱현교수님 회고록

by 恒照 2021. 12. 28.

내가 1회로 졸업한 제어계측공학과 역사를 기술하신 권욱현 교수님 글입니다. 저희 1회는 35명정도이며 대부분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나를 포함 3명은 KAIST(당시 '과학원)'로 진학했습니다. 다수가 박사학위 이수후 교수로 활동했고 일부는 산업계로 진출했습니다. 지금도 제우회라는 이름으로 동기들이 얼굴들을 보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졸업 40주년이 되네요.


[권욱현교수님 글]


1. 서언


고명삼 교수님은 졸업 학년으로 따지면 나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하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11년 선배이시고 나이로는 13년 선배이시다. 서울대학교의 제어계측공학과가 신설된 1978년부터 고 교수님이 정년퇴직한 1993년까지 15년간 이 학과에서 함께 근무했다. 선배이고 동료 교수인 고명삼 교수님과 나는 이 기간 제어계측공학과를 세계 일류 수준의 학과로 만들기 위하여 무척 많은 일을 함께하였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어계측공학과는 더욱 발전하기 위하여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와 함께 1992년에 부분통합, 1995년에 완전통합되어 전기공학부(현 전기정보공학부)가 되어, 독립적인 학과 이름이 없어졌다. 띠라서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제어계측공학과 전체 역사에 걸쳐있다.



내가 1962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학부에 입학했을 때 고명삼 교수님은 당시 전임강사였다. 2학년 때 고 교수님으로부터 계측공학 과목을 수강한 것이 처음 인연이었다. 계측공학은 제어계측공학 분야의 한 분야이다. 나는 학부 졸업 후 육군통신학교 복무를 마치고, 1968년 2학기에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다시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다. 1969년 8월부터 전기공학과에서 유급조교로 임명되었고 1972년 미국에 유학 가기 전까지 근무했다. 그 당시 유급조교는 교육공무원으로써 학과 실험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과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그래서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고 교수님을 뵈었다. 고 교수님이 학과장이었던 1970년도 초에 미국 예일대학으로부터 2세대 컴퓨터인 IBM 1620을 전기공학과가 무상기증 받아 컴퓨터 교육에 큰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설치하여 보니 동작이 되지 않아, 고 교수님이 IBM 한국지사를 방문하여 수리를 부탁하였으나 전기공학과 조그마한 예산으로는 미국에 있는 정비 전문가를 데려오는 경비를 감당하지 못하여 수리를 포기한 상태였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으면 내가 수리해 보겠다고 고 교수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승낙을 받아 몇 달 고생하고 수리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고 교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을 보았고, 고 교수님도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고 교수님과 직접 일을 같이한 것은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전기공학과에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다. 서울공대에서는 1977년 공업교육학과를 폐과하고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계측제어공학과, 전자계산기공학과, 도시공학전공(학과)을 신설하기로 하고, 1978년도 입시요강에 다른 학과와 더불어 위의 3개 학과도 포함했다. 그 당시는 서울공대에서는 1학년 신입생을 학과 별로 선발하지 않고, 공대 단일계열로 선발하고 2학년 올라올 때 학생들이 학과를 선택하였다. 1979년 초에 제어계측공학과에 들어올 학생은 1978년 이미 1학년 교양과정에 입학했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1978년 초부터 제어계측공학과 개설을 준비하는 교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전기공학과에 왔을 때부터 고 교수님이 나한테 함께 앞으로 제어계측공학과로 소속을 변경하자고 하셨다. 나는 나의 전공 분야 학과라서 흔쾌히 동의하였다. 1978년 초부터 고 교수님과 함께 학과 개설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 교수 생활을 제어계측공학과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법적으로는 1978년 11월에 고명삼 교수님과 나 두 교수만이 제어계측공학과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원래 선배와 후배는 몇 가지 이유로 함께 일하기 힘들다. 특히 10살 이상 차이나면 더욱 그렇다. 선배와 후배가 일본이나 독일 대학에서 한 연구실 소속이면 상하 관계가 성립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은 미국 대학과 같이, 모든 교수가 각자의 연구실과 학생을 갖고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함께 일하지 못한다. 특히 선후배 사이라면 후배의 생각을 주장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 더 어렵다. 나는 사교적이지 못하고, 선배를 개인적으로 잘 모시지 못하고, 노력하지도 않는 편이다. 그런데 고 교수님과 내가 오랫동안 함께 일한 것이 왜 가능했을까 생각해본다. 고 교수님은 새로운 일에 열정이 많았었다. 그리고 후배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편이고, 후배들과 같이 일하기를 좋아했다. 개성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다. 나는 상대가 하는 일이 나의 목적과 같으면 이익을 따지지 않고 함께 열심히 하는 편이다. 고 교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고 교수님 개인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일을 따라간 것이다. 제어계측공학과가 새로 생겨,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더불어 우리나라 제어계측공학을 발전시키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제어계측공학과를 만들 때 우리 두 명만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였는데, 그 후 젊은 교수가 왔을 때도 그런 경향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고 교수님과 내가 따로 한 것은 다루지 않고, 함께한 일만 다루기로 한다. 제어계측공학과를 서울공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 하나로 키우기 위하여 실용 교육을 추구했던 일, 학과를 홍보했던 일, 마이크로로봇대회를 만들어 로봇기술도 키우고 학과 홍보에 활용했던 일도 다룬다. 제어계측공학 발전을 위하여 자동화시스템공동연구소(이하 자동화연구소) 건물을 준공하고 운영했던 일, 무인 자동화 공장(FMS)을 구축하고 공대의 대표적 방문 장소로 만든 일, 함께 산업체를 방문하여 연구과제를 추진했던 일 등을 다루려고 한다. 1978년 신설될 때는 계측제어공학과이었는데, 1982년초에 제어계측공학과로 이름이 개정되었다. 이 글에서는 처음부터 개정된 이름을 사용하겠다.



2. 제어계측공학과를 서울공대 최고 학과 하나로!


1978년 서울대학교 입시요강에는 공과대학 신입생을 공학 계열로 선발했지만, 공대 소속 학과가 나열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제어계측공학과도 있었다. 따라서 제어계측공학과는 1학년 기준으로는 1978년에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법적으로는 1978년 11월에 설립되었다. 1979년 초에 2학년으로 올라오는 학생이 제어계측공학과를 선택하고 진학하였다. 1979년 교수진은 고 교수님과 본인 두 명만 있었다. 고 교수님이 1979년부터 1982년간 4년간 학과장을 맡았고, 내가 1983년부터 1984년까지 2년간 학과장을 맡으면서 기초를 다졌다. 제어계측공학과 학사과정을 다른 학과와 차별화하기로 고 교수님과 뜻을 모았다. 우린 실용 위주로 과목을 구성하기로 하였다. 다양한 실습 장비를 구비하여 실험 교육을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많이 활용되기 시작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이론 및 활용 과목을 강조하였다. 고 교수님은 실험 교육에, 나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교육에 많이 치중했다. 그리고 실제 시스템을 만드는 설계과목을 강조하였다. 특히 졸업프로젝트를 4학년 과목으로 정하고, 그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유용한 시스템을 만들도록 하였다.


1979년 초 처음으로 학과를 선택할 때, 학생들은 지난 1년 동안 다녔기 때문에, 선배나 동료를 통하여 학과 평판을 들었다. 학과 선택 직전에 전체 학생을 강당에 모아놓고 19개 학과 학과장의 자기 학과소개를 청취한 후 지망하도록 했다. 제어계측공학과는 독특하게 공대 학과로는 처음으로 교과 내용, 진로 소개, 로봇 소개, 인공위성 제어, 공정 제어 등이 포함된 학과소개 브로슈어를 만들어 학과를 소개하였다(사진 1). 3단으로 접히고, 앞뒤에 내용이 있는 한 장짜리였다.



학과가 신설되었을 때 초기 학과 명칭은 계측제어공학과이었는데, 고 교수님과 합의하여 1982년 3월에 제어계측공학과로 학과명을 바꾸었다. 그 당시 많은 일반인에게 계측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였으며, 줄자가 떠오른다는 얘기가 있었고,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계측보다는 제어 관련 과목의 비중이 컸다. 이런 이유로 이름 순서를 바꾼 것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학과 이름을 바꿀 때 타 학과에서 반대가 없어야 하는데, 내용이 같은 것이라 반대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학과 이름으로 사진 1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브로슈어를 다시 만들었다. 19개 학과 중에서 시작할 때는 5번째로 인기가 높았는데, 내실 있는 교육과 이런 홍보 활동으로 2학년 올라올 때 학과 선택하는 마지막 해인 1983년에는 3번째까지 인기가 올라갔었다.


나는 1983년부터 학과장을 맡았다. 우리 학과의 실용 교육 결과를 과시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자회사들이 많이 참가하고, 관람객이 많이 참여하는 대규모 한국전자전람회(1983년 10월 개최)에서 처음으로 제어계측공학과 단독 부스(사진 2 )를 만들고,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였다. 사진 2에는, 부스 앞에 좌로부터 나, 고명삼 교수, 임혜숙, 김동식 2학년 학생이 서 있다. 임혜숙 2학년 여학생은 현재 과기정통부 최초 여성 장관이다. 김동식 2학년 남학생은 자기가 만든 마이크로로봇을 전시하였는데,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로 있다. 그 후 몇 해 더 참가하였는데 그때는 대학원생의 연구결과 위주로 전시했다. 그 당시 대학에서 이 전람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기였는 데, 관람객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과감하게 활동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은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실용 교육을 받은 졸업생은 다른 학과에 비교하여 추후 창업도 많이 하게 되었다.



신입생 입학시험에 변화가 있었다. 1학년에 공학계열로 입학하였다가 2학년 올라올 때 학과를 선택하게 하니, 일부 학과에는 학생들이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기고, 따라서 전체 학과의 반 정도는 학생들이 들어와서도 만족하지 못하여 교육에 큰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1983년부터는 1학년부터 학과를 선택하는 제도로 바꿨다. 이때쯤 고등학생들은 서울공대 학과 사정을 잘 몰랐을 거다. 학과 이름이 제어계측공학과로 바뀌어 있을 때여서, 새로운 학과 이름으로 사진1과 비슷한 학과소개 브로쇼어를 만들고 전국고등학교에 보내는 노력을 몇 년간 수행하였다. 서울공대에서는 학과에서 고등학교에 홍보 책자를 보내는 것이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제어계측공학과를 홍보하고, 젊은이에게 꿈을 심어주고, 우리나라에서 제어계측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마이크로로봇경연대회”를 제어계측공학과 주최로 1983년도에 시작하였다. 이후 장기간에 걸쳐 매년 개최되었다. 아주 인기가 있었다. 다음 3절에서 좀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외에도, 제어계측공학과에 연계하여 자동화시스템공동연구소(이하 자동화연구소)를 설립하고 1991년도에 건평 1500평의 연구소 건물을 준공하고 세계적인 자동화기술을 연구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4절에서 자세히 하기로 한다.



하학과의 실용적인 교과 내용, 홍보 책자, 전시회 참석, 마이크로로봇 경연대회, 자동화 연구 활동 등의 노력으로 제어계측공학과의 입학 합격점(커트라인)이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높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사진 3). 그 당시 가장 인가가 있었던 전자공학과와 비슷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여러 대학에서 제어계측공학과가 신설되는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하튼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에 앞서가는 인재들이 입학했으며, 그것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이었고 그러한 학생을 지도하는 기쁨 또한 컸다.



제어계측공학과를 포함하여 서울공대에는 19개 학과가 있었는데 미국의 유명대학에 비하면 학과 규모가 너무 작아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어계측공학과, 전자공학과, 전기공학과가 역사적인 합의를 하여 1992년부터 전기전자제어계측공학과군, 1995년부터 전기공학부로 통합하였다. 그러므로 제어계측공학과의 역사는 전기공학부(현 전기정보공학부)에서 계승되고 있다. 고 교수님은 이때쯤 1993년에 정년퇴직하였다.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가 신설된 1978년부터 고 교수님이 정년퇴직한 1993년까지 15년간 고 교수님과 나는 이 학과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이 학과를 최고의 학과로 만드는데 열정을 바쳤다.



3. 마이크로 로봇 대회로 젊음이의 꿈을 심어주자.


고명삼 교수님은 일본어를 아는 세대였고, 동경대에 반년간 방문교수로 계신 적도 있어 친분이 있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반면 나는 일본학계와는 친분이 거의 없었다. 일본에서는 “마이크로 마우스경연대회”가 있었는데 학생과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생쥐같이 미로를 빨리 찾아가는 시합이다. 고 교수님이 주최 측과 연락하여 고 교수님과 내가 대회에 초대를 받았다. 아주 격식 있게 대회를 치르는 것도 구경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도 같은 시합을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꿈을 심어주고, 우리나라 제어계측 분야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특히 제어계측공학과를 홍보하기 위해서다. 일본에서는 생쥐(마우스)가 귀엽다고 인기가 있는 모양인데, 한국에서는 생쥐가 그렇게는 인기가 없었고, 또한 로봇기술을 소개하기 위하여 생쥐를 로봇으로 명칭을 바꾸기로 고 교수님과 합의했다. 그래서 제1회 “전국 마이크로로봇 경연대회"를 제어계측공학과가 내기 학과장이던 1983년에 주최했다. 고 교수님이 대회장을 맡고 나는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나는 준비위원장이었지만, 동시에 학과장이라 할 일이 많았었다. 일본대회 규격대로 미로를 국내 업체에 제작을 의뢰했는데 좀 엉성했지만 할 수 없었다. 대회 규칙도 일본과 비슷하게 하고, 참여하는 팀이 없으면 안 되니까 일부 제어계측공학과 학생둘에게 졸업프로젝트로 마이크로 로봇을 만들도록 미리 부탁하였다. 대회 전날 저녁 늦게 예행연습을 진행하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쓰러지고 잠시 후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내가 난생처음 겪은 신체적인 무리였다. 본부 학생회관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 되어 온 마이크로로봇 경연대회의 시초였다( 사진 4 참조). 처음에는 5개 팀이 전부 제어계측공학과 학생이었지만,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1986년 4회 대회에서는 20개 팀이 참여하였고 관중이 500여 명이나 되기도 하였다. 얼마 동안은 KBS TV 등의 9시 뉴스에도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아울러 제어계측공학과 홍보도 많이 되었다. 몇 해 후에 일본마이크로마우스협회의 주선으로 일본과학기술재단으로부터 국제규격의 미로 장치를 기증받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고 교수님이 대회장, 내가 준비위원장을 한 후, 내가 몇 해 대회장도 맡았다가 후배 교수에게 넘겼다.



1996년 제14회 대회부터는 학과가 통합되어 전기공학부가 주최하기 시작하였다. 2008년 제26회 대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간 상당한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 대회가 우리나라 젊은이에게 많은 꿈과 기술을 심어주었다. 그간 국내에서 여러 다양한 로봇 경기대회가 생겼는데 모두 우리 학과의 마이크로로봇 경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4. 자동화시스템공동연구소 건축하다.

서울공대가 공릉동 캠퍼스에서 서울대 관악갬퍼스로 이전을 완료한 것은 1979년 말이었다. 1980년부터 서울공대에서는 대학원 인원이 늘어나고 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학사과정 교육을 위주로 하였던 공릉동 캠퍼스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 공간이 관악캠퍼스에 지워졌기 때문에 연구공간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에 신설된 제어계측공학과, 컴퓨터공학과, 도시공학과는 관악캠퍼스에서 규모가 아주 작은 38동을 사용했는데 한 학과가 1개 층만 사용했었다. 학사과정 교육시설도 작다고 불평하면 현재 학생 수가 적으니 나중에 해결하자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38동 건물을 확장하였지만 30% 정도 확대되는 데 그쳤다. 제어계측공학과도 1978년 학사과정 입학생들이 1982년부터 대학원에 입학하기 시작하자 연구공간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높은 학과 인기로 대학원 학생 수가 많아 연구실험실이 더 필요한데 도저히 마련할 수 없었다.



전자공학과 젊은 교수들이 주도하고, 전자공학과 출신 정부 고위공직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85년 7월에 반도체공공연구소를 설립하고, 1500여 평 규모의 연구소 건물이 1988년 7월에 준공되었다. 100% 정부의 지원이었으며, 당시 반도체가 국가적으로 중요하였으므로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공은 반도체 분야가 아니지만, 추진력 있는 시니어 교수로 고명삼 교수님이 초대되어 반도체공동연구소 초대 소장을 2년간 맡았다. 이 반도체공동연구소가 서울공대에서는 처음의 연구소이었으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분야의 교수님들이 자기 분야에서 연구소를 갖고 싶어 했다.



반도체공동연구소 설립에 참여한바 있는 고명삼 교수님은 자동화 관련 연구소를 창설하고 싶어 했고, 제어계측공학과 모든 교수도 원했었다. 그래서 500여 평의 소규모 연구소 기본계획을 만들고, 고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는 금성, 삼성계열 사장들을 만나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거의 모든 대기업 제조회사가 자동화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 기술이 회사의 본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1500여 평의 대규모 연구소 계획을 다시 만들고, 우리나라 산업 자동화에 열중하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를 찾아가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자동화를 담당하는 산업정책과에 내 고등학교 동기이고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주덕영 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교수님과 함께 주 과장을 만나서 우리의 계획을 설명하니, 그렇지 않아도 상공부가 자동화 문제를 최우선과제로 생각하고 발전 방향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한창 노사분규로 자동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때였다. 곧 박운서 산업정책국장을 만나게 하여 주었다. 박 국장은 아주 좋아하면서 상공부와 함께 연구소를 설립해서 산학협동을 잘 해보자고 하였다. 본인을 박 자동화라고 부르길 원할 정도로 자동화를 강조하였다. 박 국장은 소신이 있으면 강력히 추진하는 분이었다. 여러 산업체를 상공부에 초대하고는 자동화연구소 건설에 기부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였다. 국장이 이렇게 강력하게 권하니 기업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88년 10월에 자동화시스템공동연구소(이하 자동화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6개의 대기업이 25억 원을 기부하여 1500여 평 규모의 자동화연구소 건물이 1991년 4월에 준공되었다(사진 5 ). 여러 기업이 분담 지원하여 연구소를 건설한 것은 자동화연구소가 서울공대에서는 현재까지 유일하다. 대규모 시설이 들어가야하는 반도체 연구소가 아니고는, 1500평 정도의 연구소 건물은 그 당시에는 대단한 시설이었다. 제어계측공학과가 있던 38동 옆에 세워졌는데, 연구소와 학과 사이에 구름다리를 설치하여 왕래가 쉽게 하였다. 이제 제어계측공학과의 연구공간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전국대학 자동화 분야의 교수가 사용할 수 있는 공동연구소이었지만, 가까이 있는 제어계측공학과 교수가 주로 사용했다. 자동화연구소는 외부적으로는 독립기관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제어계측공학과의 일부였다. 자동화연구소는 상공부 지원으로 건립한 국내 최초의 대학연구소가 되었다.



건축 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하면, 건물은 외관이 아주 중요한데 고 교수님과 나는 설계업체에 맡기지 말고, 서울 시내를 차를 타고 다니면서 가장 멋있는 건물을 골라서 비슷하게 하자고 했다. 돌아다니다가 역삼동에 있는 새로운 건물로 상록회관이 좋아 보여 그렇게 지었다. 주어진 경비로 공간을 많이 해 달고 부탁하니,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철골 크기를 줄여주어 고맙게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증축하려 했을 때, 하중 때문에 한층 정도만 가능했다. 1층에 큰 공장을 넣기 때문에 큰 계단식 강의장을 갖지 못하고 작은 규모로 설계하였는데, 시공업체가 잘못하여 바닥에 시멘트를 평평하게 부어버렸는데 이미 굳은 상태였다. 마음이 약해 재시공하라고 요구하지 못했는데, 준공하고 보니 아쉬웠다.



고 교수님이 1988년 11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4년간 소장을 맡았다. 자동화연구소 건물을 준공하였고, 고 교수님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1990년도에 한국전력회사로부터 운영기금으로 10억 원을 지원받았는데, 연구소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다. 나는 1992년 11월부터 4년간 자동화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자동화연구소는 제어계측공학과 교수들이 모두 참여하고 다양한 연구결과를 얻었다. 그중에 아주 독특한 연구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10년간 FMS(유연생산시스템)을 구축, 연구, 운영한 것이다. 다음 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여기에는 간단히 소개한다. 고 교수님이 상공부로부터 8억의 연구비를 얻고, 몇 개 산업체로부터 자동화기기를 기증받아 자동화연구소에 모범적인 FMS를 1992년 4월에 완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사진 9). 김종원 교수가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 후 내가 1991년에 설립한 제어계측신기술연구센터(이하 제계연센터)가 과학재단으로부터 매년 10억 원가량을 9년간 받았는데, 센터 연구 활동으로 고기능 FMS를 구축하고 운영하였다. 제계연센터는 독립적인 기관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동화연구소 일부였다.

자동화연구소의 우수한 연구내용을 알리기 위하여 내가 소장일 때인 1994년에 한국전자전람회에 참가하였다 (사진 6). 최신의 기술을 보여주어서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 몇 번 더 참여하였다. 1994년 서울대 본부에서 산하 연구소를 처음으로 평가할 때 자동화연구소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후에도 2년마다 평가할 때 여러 해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여러 번 1등을 하였다. 지동화연구소가 서울대학교에서 최고의 연구소로 인정받았다. 자동화연구소(제계연센터)는 미국 생산공학회(SME)가 전 세계공과대학의 생산 자동화 관련 연구소 중에 가장 우수한 대학 한 곳에만 주는 CASA/SME University Lead Award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미 잘 구축된 FMS 공장 외에 심사기준에 부족했던 교육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해야 했다. 삼성전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CIM 교육센터도 1993년 11월 구축하였고, 김종원 교수와 함께 이제까지 없었던 생산자동화에 관련된 여러 교과목을 대학학과와 연계하여 개발하였다. 1996년도에 신청하였는데, 해외 심사위원 3명이 3일간 자동화연구소에 와서 현장심사도 하였다. 생산자동화에 강한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등 여러 대학을 제치고 우승하는 대단한 영예를 얻었다. 자동화연구소(제계연센터)는 상패를 받고, 대표적인 참여 교수들이 상장을 받았다. 미국에서 개최된 수상식에 수상자로 김종원, 이범희, 나, 박진우 교수(사진 7 좌측 사진에서 우로부터)가 함께 참여했으며 내가 대표로 상패를 받았고 수상소감을 발표하였다. 수상식에 턱시도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수상소감에서, 오늘 난생처음 턱시도를 입고 상을 받으니 이 상이 엄청 중요하게 느낀다고 유머러스하게 말했더니 그날의 여러 연사 중에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자동화연구소는 제어계측공학과가 1995년 전기공학부(현 전기정보공학부)로 최종 통합되면서 실제적으로 전기공학부 일부가 되었고, 계속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자동화연구소를 통하여 서울공대를 알게 된 박운서 차관은 서울공대를 2배 확충하여 산업체들을 지원하자고 하였다. 후에 서울공대가 학생 수. 교수 수, 대학 시설이 2배가량 확충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자동화연구소뿐만 아니라 서울공대에도 은인이다. 1995년도 서울공대 발전공로상을 받았다.

 

 


5. 세계가 인증하는 FMS/CIM 공장 구축하다.


자동화연구소를 지을 때 1층에 산업체 공장같이 천장이 아주 높고 널찍한 200평 규모의 공장 같은 실험실을 만들었다. 장래에 큰 규모의 장치도 실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공장에 FMS (Flexible Manufacturing System, 유연생산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컴퓨터를 더 많이 활용하면서 CIM(Computer Integrated Manufacturing) 공장이라고도 한다. FMS 공장은 여러 단위로 구성된다. (1) 제품 보관 창고 셀, (2) 제품을 이동하는 이동로봇 셀, (3) 가공을 담당하는 NC 공작기계와 로봇을 포함한 가공 셀(Cell), (4) 제품을 조립하는 로봇이 포함된 조립 셀, (5) 제품의 규격을 측정하는 측정 셀, (6) 제품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7) 설계를 담당하는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공장 전체를 최적하게 통제하는 중앙처리실이 포함된 중앙전산실, (8) 이러한 각종 셀에 연결되어있는 제어기와 중앙전산실을 연결하는 생산통신망 등, 이런 모든 셀과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FMS 공장이다.



당시 산업체에서는 생산자동화를 위하여 FMS를 설치하는 추세에 있었다. 그래서 자동화연구소에서도 산업체를 위하여 최신의 기술을 적용한 FMS 공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고명삼 교수님의 노력으로, 1988년도에 상공부로부터 8억의 연구비를 자동화연구소 FMS 구축비로 지원받았다. 몇 개의 업체로부터 자동화기기도 기증받았다. 설계 소프트와 전산실 컴퓨터는 IBM 한국 지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중공업에서 자동화를 담당하던 김종원 박사를 연구소 소속 특별연구원으로 채용하였다. 마침 서울대학교에서 규모가 큰 산하 연구소에서 직접 연구교수를 채용하는 제도가 생겼고, 자동화연구소도 본부로부터 교수 한 명을 채용하도록 승인받았다. 김종원 박사가 자동화연구소 소속 조교수가 되었다. 고 교수님이 책임자가 되고, 김종원 교수가 총괄 실무를 맡고, 참여 교수는 각자 FMS 공장의 한 단위(셀이라고 함)를 맡았는데 나는 생산통신망을 맡았었다. 모범적인 FMS /CIM 공장을 1992년 4월에 완성한 것이었다


한편, 내가 소장으로 있었던 제어계측신기술연구센터(이하 제계연센터)가 과학재단으로부터 우수 공학연구센터(ERC, Engineering Research Center)로 1991년에 지정되었다. 제어계측공학과 교수 10명, 서울대 타 학과 교수 5명, 타 대학교수 14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연간 연구비 10억 정도를 9년간에 걸쳐 지원받았다. 외부적으로는 독립적인 기관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동화연구소의 일부 이었다. 자동화 관련 5개 연구 분야를 수행하였는데, 지능 생산시스템, 고기능 로봇시스템, 차세대 수치제어공작기(CNC) 제어기, 삼차원 형상 인식 시스템, 지능제어이론 등이었다. 대부분 FMS/CIM 공장에 적용되는 기술이었다. 고 교수님이 구축하였던 1단계 FMS/CIM 공장에 새로 개발된 기술을 더 추가하였다. 센터에서 풀타임 병역특례연구원을 여러 명 채용하여 FMS 관련 연구와 이 공장운영에 활용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5년 말경에, 2단계 고기능 FMS/CIM 공장을 구축하였다. 외부 내빈이 서울공대를 방문하면, 대표로 자동화연구소 FMS/CIM 공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서울공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 장소가 되었으며, 그때마다 참여하는 연구원들은 데모 준비를 하느라 고생하였다.



FMS 관련 우수한 업적을 보여주기 위하여, 내가 소장이던 1994년에 FMS 파이롯트(Pilot) 공장과 미니맵(Mini-MAP) 생산통신망시스템을 상공자원부(전 상공부)가 개최한 94‘산업기술개발제품전시회(제2회 국제자동화시스템전시회 겸)에 출품하였다. 자동화연구소가 우수상을 받았는데 내가 대표로 상을 받았다. 앞 절에서 자동화연구소가 CASA/SME University Lead Award를 1996년도에 받았다고 했다. 이때 FMS/CIM 공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았다. FMS 공장 운영비가 많이 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2002년경에 FMS/CIM 공장 기기를 치우고 다른 연구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0년간 많은 열정을 쏟았고, 찬사를 받았던 FMS/CIM 공장이 문을 닫은 것이다.



6. 산업체 협동 연구 활동도 함께하다.


공과대학은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1980년대는 아직 정부에서 주는 연구비가 극히 드물었고, 산업계도 자체 기술개발에 관심 두기 시작하였으나 외부 연구를 지원할 때는 아니었다. 고명삼 교수님과 나는 산업체를 함께 방문하고 산업체와의 협동 연구를 타진하였다. 제자를 많이 알고 있고 존경받고 있는 시니어 교수와 해외에서 학위를 한 주니어 교수가 함께 방문하여 아마도 좋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창원에 있는 한국기계연구소를 방문하여 연구과제 ”다관절 산업로봇의 제어부 설계에 관한 연구“를 1983년에 계약하였다. 고 교수님이 주관하고 나는 일부 참여하였다. 연구결과를 84’ 한국전자전람회의 제어계측공학과 부스에 전시하였다. 우리는 제어계측 기술을 많이 다루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여러 번 방문하고 제어계측 관련 기술 강죄를 여러 번 하였다. 포철공장 운영을 담당하는 전산제어부에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생이 있어 연락이 쉬웠다. 1984년에 고 교수님과 나는 작은 규모의 연구과제를 각각 계약하게 되었다. 고 교수님 과제는 지금 생각이 안 나는데, 나의 경우는 코크스를 소결시키는 제4소결공장의 컴퓨터 자동모드 운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연구결과를 사용하여 소결공장을 저녁 10시부터 밤 1시까지 컴퓨터 자동모드로 운전하였는데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 교수님이 잘 알고 계시는 강진구 사장이 운영하는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전전자로 통합)을 방문하였다. 강진구 사장님은 외산으로 되어있는 자동화기기는 국산화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래야만 고장이 났을 때 금방 수리할 수 있고, 회사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하면서 공동개발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그래서 고 교수님은 산업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스카라로봇 개발을 계약하였고, 나는 제어기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형제어기(PLC, Programmable Logic Controller) 개발을 계약하였다. 그때가 1985년이었다. 고 교수님은 스카라로봇의 시제품(프로토타이프)을 성공적으로 개발 완료하였고, 삼성전자가 이에 기초하여 상용화 과정을 거쳐 산업계에 사용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공장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서울공대에서 1992년부터 매년 교수들에게 학술상과 기술상을 수여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고 교수님이 제1회 기술상을 받았다. 마침 고 교수님의 업적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연구지원소장(현 연구부학장)으로 수상자 선정에 관여했었다. 3절에서 얘기했듯이 고 교수님은 일본에 지인이 많은데, 동경대 한 교수가 고 교수님을 일본에서 유명한 산께이 신문이 수여하는 산께이아시아상(과학기술분야) 후보자로 추천하였다. 심사과정을 거쳐 고 교수님이 2005년도에 영예의 수상을 하였다. 일본 총리가 시상식에 참석하는 아주 유명한 상인데, 고 교수님은 이 상에 아주 큰 보람을 느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사회 발전에 기술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큰 사람을 선정하여 주는 상이다. 고 교수님은 스카라로봇 개발업적을 바탕으로 수상하였는데 고 교수님의 부탁으로 고 교수님 연구업적을 영문으로 작성하는 데 내가 도움을 드렸다.



7. 결언


이 글에서는 고명삼 교수님의 많은 업적 중에서 나와 함께한 내용에 국한하였다. 제어계측공학과와 그 과에 연계된 마이크로로봇 경연대회, 자동화시스템공동연구소, FMS/CIM 공장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1978년에 탄생한 제어계측공학과가 신설된 이후부터, 더욱 발전하기 위하여 전기공학부(현 전기정보공학부)에 통합되어 학과 이름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15년간의 찬란한 역사는 나에게는 귀중한 추억이다. 선배 고명삼 교수님과 함께 서울공대 최고 학과 하나로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마이크로로봇 경연대회는 1983년부터 26년간 운영되다가 이제는 없고, 자동화연구소는 전기정보공학부에 연계되어 계속되고 있지만, FMS/CIM 공장은 1992년부터 10년간 운용되었고 지금은 없다. 그래서 그들 이야기가 기록되어야 하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 교수님과 함께한 일로, 한국자동제어협의회와 한국자동제어학술대회도 있지만, 서울대학교와 직접 관계가 없어서 이 글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고명삼 교수님을 제외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또 다른 선배 교수나 혹은 후배 교수와 오랫동안 협력한 적이 없다. 고 교수님과 비슷한 연배에 계시는 다른 학과의 교수님이 고 교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주 부럽다고 나에게 이야기해주신 분도 계셨다. 고 교수님은 꿈이 있었고, 일에 열성이 있었고, 리더십이 있었다. 나의 꿈과 비슷하여 따라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웠다. 고 교수님과의 관계에 치중하다 보니, 제어계측공학과와 자동화연구소에서 함께 수고하고 노력한 다른 교수님들을 이 글에서 소개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서울공대 40년사와 50년사에도 제어계측공학과와 자동화연구소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글의 대부분은 거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제 92세이시고 몸이 좀 불편하신 선배 고명삼 교수님이 만수무강하시기를 빈다.



2021년 9월

권 욱 현







< 권교수님 약력>

저는 197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2008년에 정년을 맞이하여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연구실에 들어온 많은 인재들과 함께 어울리며 연구를 하였던 것은 가슴설레이는 일이었습니다. 인재들과 여러가지 업적을 이룬 경험이 있습니다. 이제 이 경험을 글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늦게 배운 골프에 과학을 접목하여 보려고 합니다. NAVER 창에서 권욱현 치면 저의 소개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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