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tc/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21-40

by 恒照 2021. 3. 22.

21

세종 문종 3
- 새로운 카리스마 그리고 한글창제

태상왕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진짜 임금이 되었습니다. 태종이 죽자 신하들은 은근히 세종 길들이기를 시도했으나 세종은 이를 알고도 그대로 넘어가는 등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새로운 제왕의 리더십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종에게는 세종의 부인 심씨 가문을 박살낸 사건의 전모를 새로 밝히는 방법으로 신하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으나 이 카드를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고, 형님인 양녕에 대해서도 끝끝내 관용적 태도를 보였으며, 그러한 정치투쟁보다는 농업, 천문과 기상, 외국어, 악기, 북방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혁신을 기하기 위한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두루 나열하기가 벅차므로 모두 생략하고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한글창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품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최고 걸작품인 훈민정음, 즉 한글을 내놓았는데, 기이하게도 이날 이전의 실록엔 한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동안 한글은 세종의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나(한글 보급과정을 집현전 학자들이 도맡았으므로), 적어도 실록에는 집현전이 한글창제에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글이 공포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후 최만리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한글은 새롭고 기이한 기예일 뿐 한자 외의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사대에 어긋나고 오랑케와 다를 것이 없다는 취지의 것이었습니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었는데, 만약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면 어떻게 최만리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라는 점, 당시 시대상황에서 세종이 어떻게 드러내놓고 한글창제를 시도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 한글 창제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문헌이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세종의 한글창제는 세종이 아들 딸 등 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과 비밀리에 추진한 프로젝트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암튼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만든 사람과 만든 때와 만든 이유가 자료에 의해 명백히 증명되는 유일한 문자이고, 그 월등한 과학성은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이미 인정한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라 있는데, 그 물리적 위대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그 정신, 즉 지배의 효율성이 아닌 백성의 이로움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5세만 되어도 전부를 깨우칠 수 있는 쉽고, 과학적이고, 철학이 있는 문자 한글!!!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자를 쓰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세종의 위대성에 감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

세종 문종 4
- 비극의 서막

세종의 장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8세 때였습니다. 후일 문종 임금이 되는 세자는 아버지의 성품과 자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야 말로 성군 중의 성군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종은 세자로 30년을 지내면서 세종으로부터 고품격의 왕위 수업을 받았으나,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단종을 남기고 죽으니, 이것이 비극의 서막입니다.

사람들은 문종이 요절한 것으로 많이 알고 있는데, 문종이 세상을 뜬 것은 39세로 성종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요절했다는 이미지를 갖는 것은 재위 기간이 위와 같이 매우 짧았던 데다가, 어린 단종을 남기고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에구~ 애만 좀 일직 낳았어도...)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번의 이혼을 하고(두 번째 세자빈의 폐출 사유는 동성연애였다고 합니다) 셋째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얻었는데 산모는 바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견인을 잃고 말았으니 단종의 앞날이 참으로 막막하기만 합니다.

세종은 과로에다 운동부족에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소갈증(당뇨)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그런 이유로 말년에는 문종에게 섭정을 시키고 뒷방으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세종은 부인 6명에 18남 4녀를 뒀는데, 정비인 왕비 심씨가 낳은 아들은 8명이었습니다. 장자인 문종 밑으로 3, 4, 5살 등등 터울이 있었고, 하나 같이 총명하고 제주가 있었으나, 오히려 재주 있는 자식을 여럿 둔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고 맙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과 달리 형제간의 우애를 매우 중시하여 자식들에게 일찍부터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겼고, 나아가 자신의 명령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종 입장에서 보면, 장성한 잘 준비된 세자가 있고, 세손이 잘 크고 있으며, 대군들도 아비와 형님의 말을 잘 들으니 자신의 병 말고는 걱정거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렇습니까. 갑자기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세상을 떴고, 거기에 세자마저 등에 난 종기가 갈수록 커져 위험한 지경에 이르니, 세종의 걱정은 깊어만 갔습니다.

세종은 이와 같이 자식들과 부인의 죽음을 맞고 세자의 병을 걱정하다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뜨니, 향년 54세였고 재위기간은 31년이었습니다.

세종은 눈을 감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까요? 수양, 안평...이들이 설마...


23

단종․세조 1
- 열두 살 임금

조선 제5대 임금으로 즉위한 효자 문종은 슬픔을 딛고 세종 못지않은 정치를 펴 나갔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즉 자신의 건강과 세자의 어린 나이, 그리고 아우들 특히 수양대군의 존재였습니다.

문종은 바로 아래 동생인 수양대군의 정치적 힘과 거침없는 기질, 그리고 언뜻 언뜻 내비치는 야심이 두려웠으나, 행여 섣불리 견제하다가는 오히려 반발의 명분만 주어 정난을 불러 올 수도 있는데다, 무엇보다 그 성격상 수양을 제거하는 일 따위는 어울리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어찌 보면, 수양을 제거하기에는 수양이 너무 커 버려 오히려 문종이 수양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종은 자신이 진정으로 수양을 아낀다면 수양 역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양은 다른 마음을 가질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수양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시종일관 수양을 감싸고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종 재위 2년 3개월, 다시 등에 난 종기가 급격히 악화되어 이로 인해 곧 세상을 뜨게 되니,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과 신하들은 세종이 죽었을 때보다 더욱 슬퍼했다고 합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의 슬픔은 바로 나이 어린 세자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결혼도 안했으니 부인도 없고 처가도 없는, 그야 말로 이 험난한 세상에 홀로 선 열두 살 단종은 이렇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넓디넓은 궁궐에 홀로 남겨진 소년 임금은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나, 국정운영이란 면만 보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없으므로 당시 의정부에서 정사가 이루어졌고, 단종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는데, 그렇다고 의정부 대신들이 왕위를 넘볼 것은 아니므로 단종이 제대로만 커준다면 사실 별 문제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의정부에서 인사에 관한 사안을 올릴 경우, 미리 후보 중 한 사람 옆에 노란 표시를 해 두면 단종은 여기에 결재를 하곤 하였는데, 이를 황표정사라 했습니다.

단종은 비록 나이 어렸으나 세종과 문종의 혈통을 이어 받은 용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소년 단종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자리의 막중함을 깨달아 갔고 성군의 자질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니, 몇 년 만 있으면 단종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모두 안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소년 단종이 장성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24

단종 세조 2
- 단종실록, 그리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단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대표적인 옥의 티로서, 원래는 노산군일기란 이름으로 편찬되었다가 뒷날 숙종 때 이르러 단종실록으로 개칭되었으나, 그 내용에는 여전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단종실록은 편찬 경위는 물론 편찬 일시나 편찬자의 이름 조차 나와 있지 않은데, 그 내용도 수양대군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단종실록의 기본 방향 및 강조점은 어리고 불안한 임금 → 김종서 등 대신들의 전횡 → 안평대군의 왕위찬탈 음모와 대신들의 결탁 → 수양대군의 영웅적인 면모와 우국충정 이렇게 되겠으나, 지나친 치우침으로 인해 오히려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이는 진실을 감추는 것의 한계로서, 부득이하다 하겠습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단종실록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유교경전, 역서, 병법, 풍수, 음악이론과 악기연주에 능하고, 힘이 세서 강궁을 다루는 등 무인적 자질이 출중한, 문무에 능통한 그야 말로 슈퍼스타 중에 슈퍼스타였습니다.

수양은 아비인 세종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여러 번 선보이며 후계자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보였으나 아비의 장자 사랑은 확고부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양은 세종 말년에 나타나는 세자 문종의 병세를 보고 “형님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고, 조카는 어리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기회는 있다”는 생각을 굳히고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엿보는 한편,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때때로 커진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함부로 자신을 내치지 못하도록 시위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세종은 생전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 하에 문종의 동생들을 중용하였는데, 그 결과 무시못할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된 사람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었습니다.

수양과 안평은 오랜 세월 아비와 형을 도와가면서 함께 있어 왔지만 둘 사이에는 형제애보다는 경쟁심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수양의 자질이 할아버지 태종을 닮은 무인적 과단성이라면, 안평은 타고난 예술가로서 당대 최고의 명필이란 평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수양과 안평의 힘이 커지자 조정 안팎은 수양파와 안평파와 뚜렷이 대립하게 되었고, 한편, 이들 대군 그룹에 맞설 세력으로는 국가권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정승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력 다툼 속에 어린 단종은 어떻게 보위를 지키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인가!


25
단종 세조 3
- 수양과 한명회의 야망

단종실록에는 김종서 황보인 등 정승들이 왕위를 찬탈하여 안평을 옹립하려 했다고 되어 있으나, 늙은 정승들이 역적소리 들어가며 어린 왕을 폐하고 시퍼런 안평을 옹립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봄이 합당합니다.

단지 왕이 어리고 왕실에 수렴청정할 어른이 없으므로 어린 왕이 성장할 때까지 나라를 맡아 관리할 수밖에 없는 대신 그룹으로서는 대군들에 의한 정변, 특히 수양의 정변 시도를 우려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최소한 보위를 넘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안평을 끌어들여 수양을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대신 그룹과 안평의 견제로 조급해진 수양은 거의 막가파식으로 자기 세력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이러한 행위로는 반대 진영의 경계심만 자극할뿐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양이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고자 고심할 때, 수양 앞에 나타난 자가 있으니, 이 자가 바로 우리 역사 최고의 책사인 한명회입니다.

수양은 한명회를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야망을 이룰 계획을 착착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명회는 수양 앞에서, “어린 임금이 있을 때면 옳지 못한 이가 정권을 잡아 권세를 부리지만, 충의로운 신하의 반정으로 바로 잡히게 되니, 이는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라고 그럴듯하게 아뢰니, 수양은 이로써 갈 길을 명확히 하게 됩니다.

한명회는 안평, 김종서 등에 대한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는 한편, 홍달손, 양정, 유수 등의 무사를 끌어들여 충성서약을 받았고, 수양은 수양대로 신숙주, 홍윤성 등 측근 영입에 박차를 가하는 등 거사를 향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습니다.

그 중 신숙주는 합류를 권하는 수양에게 “장부가 편히 아녀자의 품에서 죽기를 바라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수양의 편에 서게 되는데, 세종, 문종으로부터 성삼문 등과 더불어 어린 단종 보호의 특명을 받은 바 있는 신숙주의 이러한 변절은 후일 ‘숙주나물’이라는 말을 생기게 합니다. 물론 수양은 ‘수양버들’이라는 말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요

한편, 수양은 상중에 있는 어린 단종에게 종묘사직을 위해 중전을 맞이할 것을 강력히 권했고, 뜬금 없이 치세와 관련된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어린 단종은 물론 노련한 김종서, 황보인까지도 수양이 왕위까지 노리는 것은 아닌 것으로 오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김종서 등의 방심을 겨냥한 수양과 한명회의 책략이었습니다.

어린 단종의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26
단종 세조 4
- 계유정난

실록에 나타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결정적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의 역모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들이 역모를 꾀했을까요

단종실록에서 안평과 김종서의 역모 증거로 제시되는 첫 번째는 김종서의 측근 이징옥이 북방의 무기를 한양으로 빼돌렸다는 것인데, 안평과 김종서 등이 힘을 합쳤다면 역모사건을 조작한 후 한양의 군을 동원해 수양을 치고 단종을 압박하면 될 일이지, 대단한 것도 아닌 칼과 창 같은 무기를 굳이 북방에서 한양으로 옮길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의정 황보인의 노비 아무개가 황보인 등의 구체적 역모계획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갖바치가 등장하는데, 어떻게 일개 종이 거사계획의 내밀한 부분까지 샅샅이 알게 되었는지는 고사하고 그 아무개 종의 이름조차 실록은 밝히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모로 보나 이는 수양과 한명회가 만든 억지 명분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어쨌든, 수양은 계유년 모월 모일 거사일을 정하고, 활쏘기를 명목으로 군사를 모은 후, 가노인 임어을운, 양정 등 소수의 무사들만 데리고 직접 김종서의 집으로 가 임어을운으로 하여금 방심한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치도록 했고, 이로써 북방의 대호라고 불리운 천하의 명장 김종서는 허망하게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김종서만 해치우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한명회의 장담대로 김종서가 쓰러지자 달리 수양의 행보를 막을 그 어떤 시도도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수양과 한명회는 그동안 규합한 군졸들을 몰고 그날 밤 입궐해 안평이 김종서 등과 공모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하였기에 먼저 김종서 부자를 베었다고 하면서 대신들을 모두 대궐로 불러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날 밤 입궐한 대신들은 문 너머의 책임자 한명회의 손짓 여하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었는데, 야사에는 한명회가 직접 살생부를 작성한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신들을 죽일지 말지를 고개를 끄덕이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날로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은 강화로 압송되었다가 얼마 뒤 사사되니 안평의 나이 36세였습니다. 또한 잠시 살아났던 김종서 역시 그 날로 이승을 하직했고, 그 외에 수양의 반대편에 섰던 무수한 대신들이 죽었으며, 그 아들 중 16세 이상은 교형에 처해졌고, 15세 이하의 아들은 관노로 전락했으며, 처, 첩, 딸은 노비 신분이 된 뒤 공신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안평과 김종서 등의 역모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킨 수양, 그러나 그 역모의 진위를 파헤치고자 하는 어떤 시도는커녕 오히려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당사자들을 모두 서둘러 죽여 버렸으니, 이는 수양의 명분이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했음을 자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저세상에서, 손자 수양대군이 형제를 비롯한 무수한 신하들을 죽이고 장차 증손자인 단종까지 죽이려 한다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면, 과연 뭐라 했을까요? 자기를 닮아 과단성이 있다고 칭찬했을까요 아니면 다 자기의 업보라며 땅을 쳤을까요...태종만 생각한다면, 사실 조금 고소한 면도 있습니다.

계유정난의 손쉬운 성공으로 이제 세상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습니다. 어린 단종은 어찌 홀로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인가요...



27

단종 세조 (5)
- 수양대군, 왕위에 오르다

수양은 계유정난 다음 날 ‘영의정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라는 이름도 꽤나 긴 전무후무한 관직에 제수되어 왕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영의정에 왕 교육 전담에 천문 책임자에 군사 책임자에 인사 책임자까지, 말하자면 이미 신하의 지위를 넘어선 것이지요.

이어서 수양은 김종서의 형제나 다름없는 이징옥을 해치우고, 공신책봉을 한 후 공신에 책봉되지 않은 종이나 시녀들에게도 통 큰 선물을 하였는데,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임어을운 등 종들에게 내린 것이 김종서, 황보인 등의 집 한 채씩이었습니다.

총명한 어린 단종은 잠시라도 수양을 믿었던 자신을 탓하며, 밀려드는 두려움과 서러움을 감추어 삭이고 “모든 권한은 다 줘도 상관없다. 몇 년 만 이 자리를 지키면 된다”라는 생각 하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왕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때로 흐르는 두려움과 서러움과 외로움의 눈물만은 감출 수 없었겠지요.

그로부터 1년.. 민심이 수그러지길 기다리던 수양은 슬슬 왕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하는데, 그 첫 번째는 상중이어서 안 된다는 단종의 의사를 누르고 강제로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정변 이후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세간에는 수양이 왕위를 넘본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단종은 급기야 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내용이 제법 그럴 듯 했습니다.

그 내용은 “근일에 이르러 숙부께서 나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나 이는 간교한 무리의 선동이다. 숙부는 주공과도 같은 분이다”

‘주공’이 누구인가,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서, 무왕이 일찍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하자 숙부로서 강력한 섭정을 편 후 왕이 성장하자 미련 없이 섭정을 그만 두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단종의 위와 같은 유언비어와 ‘주공’을 언급한 것은 수양에게는, 수양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묶어두자는 의미로밖에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수양이 존경하는 인물은 형제들과 조카를 주살하고 왕위에 오른 당나라 태종이었고, 이미 계유정난으로 왕의 허락도 없이 왕의 신하들을 죽임으로서 역모의 길에 들어섰으니, 수양도 왕이 되는 것 말고는 살아날 길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양은 드디어 소년을 넘어 청년을 향해 가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보 받을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끊임없는 역모 사건 조작으로 단종을 따르는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수양의 뜻대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 단종과 가까운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을 계속적으로 청하니, 어린 단종이 실날같은 희망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더 버티다가는 나를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 하에 드디어 대보를 수양에게 전하니, 수양대군 세조는 마침내 몽매에도 그리던 임금이 된 것입니다.




28

단종 세조 6
- 단종복위 시도와 혹독한 대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단종은 창덕궁으로 물러나 부인과 더불어 외롭고 슬픈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삼문 등이 찾아와 복위가 멀지 않았다는 말을 하자, 단종은 감격한 마음에 성삼문과 외숙부 권자신에게 자신의 칼을 내주면서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일말의 기대와 더불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라는 자포자기적인 생각도 있었겠지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은 그 아비 등 가까운 지인들과 단종복위를 꽤했는데, 마침 하늘이 준 기가 막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세조가 명나라 사신을 위로하는 연회 를 여는데, 그 연회 자리에 서는 별운검에 성삼문의 아비 성승, 유응부 등이 내정된 것입니다.

별운검은 연회 자리에서 무장을 하고 임금의 좌우를 호위하는 무반을 말하는데, 이들이 이러한 별운검으로 내정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성삼문 등은 별운검으로 서게 되는 성승 등이 연회 자리에서 세조와 세자 그리고 한명회, 신숙주 등을 그 자리에서 모두 참하기로 하는 계획을 세우고, 연회가 열리는 날을 기다리며 시퍼런 장검을 갈고 또 갈았습니다. 성공은 보장된 것과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연회가 열리기 전날 밤 악몽을 꾼 한명회가 연회 당일 세조에게 연회장이 좁고 더우니 건강이 좋지 않은 세자를 참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하여 윤허를 받아 내고, 연회장에 이르러서는 독단적으로 별운검은 서지 않기로 했다면서 성승 등의 연회장 진입을 가로막았습니다.

성승 등 무장 출신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므로 이 자리에서 한명회와 세조의 목을 치자며 거사의 강행을 주장했으나 문신 출신들인 성삼문 등은 성공 가능성이 낮다며 후일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로 인해 이 날의 거사는 이행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한명회는 명나라 사신이 참석한 연회에 자기 마음대로 별운검을 폐했다는 이유로 세조로부터 강한 힐책을 받고 집으로 물러나 앉았는데, 한명회는 성삼문 등의 행태를 볼 때 거사를 도모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러한 역모 거사가 틀어진 이상 두려움에 고변하는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한명회의 예측대로, 거사가 성공한 후 장인인 정창손을 영의정에 앉히기로 한 김질이라는 사람이 역모 발각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정창손을 찾아가 역모가 있었음을 알렸고, 놀란 정창손은 그길로 세조를 찾아가 역모 고변을 하였습니다. 분노한 세조는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하니 순식간에 대궐은 거대한 고문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29

단종 세조 7
- 사육신(死六臣)

지난 회에서 본 바와 같이,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시도는 한명회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성삼문 등은 김질의 고변으로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성삼문 등을 우대했던 세조는 분에 겨워 성삼문 등을 더욱 혹독하게 고문하였으나, 성삼문 등은 끝내 그 기개를 꺽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사에서 전하는 장면을 조금만 소개합니다.

- 성삼문은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고 나라를 도둑질했다면서 세조를 꾸짖었고, 격분한 세조가 “그러면서 왜 나의 녹을 먹었느냐”라고 하자, “나으리가 준 녹은 창고에 손도 안 대고 쌓아놓았다”라고 답했으며, 사실이 그러했다. 성삼문은 세조가 나으리란 말을 거두라며 형리로 하여금 시뻘건 인두로 몸을 마구 지지게 하자 "나으리의 고문은 참으로 가혹하오"라는 말을 남겼다.

- 박팽년은 세조가 “너는 내게 신(臣)이라 칭하며 장계를 올렸던 것을 잊었느냐”라고 하는 말에 대해, “나는 신(臣)이라 칭한 적이 없다”라고 하여, 확인해 보니 “신(臣)”이 아니라 “거(巨)”라 되어 있었다.

- 성삼문 등은 국문 담당 신숙주에게 “세종께서 어린 상왕을 안고 우리에게 이 아이를 잘 보살펴달라는 당부를 한 것을 잊었느냐”라면서 오히려 신숙주를 문책하였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우리는 사육신이라 부르는데(남효은이 명명한 것임), 이들은 집에서 자결하거나 고문으로 죽거나 혹은 능지처사되었고, 모두 3일간 효수되었으며, 그 가문은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었습니다. 한편 고발자인 정창손,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 좌의정까지 올랐습니다.

위 사람들이 이즈음 지었다는 시가 많이 전래되는데, 그 중 성삼문이 형장에 끌려가며 읊었다는 시가 가장 가슴을 울립니다.

둥둥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을 재촉하고
뒤돌아보니 해는 벌써 저물고 있구나
황천길엔 주막도 하나 없을텐데
오늘 밤에 누구 집에서 잘꼬

세조는 이어서 국왕살해기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내버렸으며, 자신의 친동생인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을 역모를 이유로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단종은 부인과도 헤어진 채 홀로 영월로 끌려갔다가 그 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노산군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사실과 다른 기록입니다.




30

단종 세조 8
-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은 그 유명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곧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영월 객사로 나와 살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자, 단종은 스스로 목을 메고는 줄을 창 밖으로 빼내 당기게 하여 자살을 하였답니다.

이 외에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단종의 죽음 경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만큼 단종이 어이 없게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 때 단종의 나이 열일곱, 즉위한 지 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권력 추구의 희생양이 되어 얼마 되지도 않는 생을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다 이렇게 쓸쓸이 죽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단종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고을 향리인 호장 엄홍도가 거두어 장사를 지냈고, 중종조에 이르러서야 단종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무덤을 찾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이 밝혀졌으며, 단종이란 묘호를 받고 능으로 단장된 것은 숙종때의 일입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와 남편을 잃고 폐서인이 된 단종의 부인 송씨는 동대문 밖에 조그만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여든 두 살까지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단종의 이러한 죽음에 가장 앞장 선 종친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내 준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은 종실의 제일 큰 어른으로서 수양의 쿠데타를 막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지만, 스스로 수양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생인 세종의 손자인 단종을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 지원자가 됩니다.
태종이 뿌린 살육의 업보가 여기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다음은 단종이 영월객사에서 지내며 지은 시라고 하는데, 참으로 심금을 울립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에서 쫒겨나와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 헤매네
밤마다 자려해도 잠은 오지 않고
해마다 한을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구나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엔 어스름 달 비추고
봄 골짜기엔 피 토한 듯 떨어진 꽂이 붉어라
하늘은 귀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서러운 이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가.



31
예종 성종 1
-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1)

세조는 완전한 권력을 거머쥐게 될 때까지 안평대군 등 가까운 혈육과 김종서, 성삼문 등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인물들을 참 많이도 죽였고, 그 살육의 행진은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조의 이러한 무력질주에 대부분의 계책을 낸 사람은 한명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난을 통해 무력으로 왕이 된 절대군주가 원활한 통치와 후대의 안정적 왕권 확보를 위해 취하는 기본 방정식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 등 공신들을 끝까지 예우하며 함께 정국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한명회와 신숙주 등 공신이 계유정난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기여했고 또 이들의 재주와 처세 그리고 충성심이 워낙 뛰어나 세조 역시 이들을 없앨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한명회의 세력이 워낙 넓고 깊게 퍼진데다 한명회의 전략 구사 등 개인기가 장자방 못지않으므로 이들을 함부로 거세하려다가는 세조의 처지가 오히려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세조 시대는 공신이 살맛나는 공신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당시 홍윤성 등 공신들의 전횡과 횡포가 극에 달해 백성의 원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으나, 세조는 대부분 이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공신 중의 공신은 한명회였는데, 세조 이후 연산군에 이르기까지의 왕위 승계 과정을 보면, 이 시대 한명회의 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조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세자(의경세자)의 자리에 오른 후 왕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고, 슬하에 월산군과 자을산군이라는 아들 둘을 남겼습니다.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은 형인 의경세자가 나이 스물에 죽자 세자가 된 후 왕(예종)이 되었으나 13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예종이 죽은 후, 예종의 아들이 아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왕(성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조 이후 왕이 된 예종과 성종의 부인이 모두 한명회의 여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2
예종 성종 2
-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2)

한명회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1녀를 당시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최고 측근인 신숙주의 장남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최고의 정난공신이 사돈으로 뭉친 것이지요

한명회는 이어서 3녀를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해양대군은 형인 의경세자가 세자가 된 지 2년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데, 이는 해양대군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남편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중전이 되어 보지 못한 채 대궐에서 밀려 난 의경세자의 부인(나중에 인수대비)은 세자가 된 시동생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간파하고, 시동생인 해양대군이 죽게 되면 그 후임으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울 요량으로(아니면 시동생을 죽여서라도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조에게 빌다시피 하여 한명회의 4녀를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의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결국 소원대로 자을산군은 예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리하면, 한명회는 1녀를 신숙주에게, 3녀를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4녀를 세조의 첫째 아들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고, 3녀는 남편인 해양대군이 왕(예종)이 됨으로써 왕비가 되었으며, 4녀는 남편인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성종)이 됨으로써 왕비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한명회는 말년에 한강가에 정자를 멋들어지게 지어 놓고 유유자적하였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압구정'이었고, 여기에서 오늘날의 압구정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칠삭둥이 한명회의 영광은 전무후무한 것이었고, 죽기까지 영화를 누렸지만, 계유정난 이후 곧 동생이 죽고, 왕가에 시집간 딸들도 17세와 18세에 모두 죽었으며, 본인도 손자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니, 역사가 공평하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세조 이후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세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부병에 몹시도 시달리다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해양대군(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 거짓말처럼 세상을 뜨니 재위 13년 3개월, 향년 52세에 불과하였습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상당한 치적을 쌓기도 했으나, 그 자식들이 모두 20세에 죽었고, 한명회의 여식이기도 한 며느리들도 17세와 18세에 모두 요절하였으니, 세조와 한명회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복수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33
예종 성종 3
- 예종의 죽음, 성종의 등극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탐오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예종은 실제 그럴만한 재주와 배짱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종의 이러한 꿈은 채 봉우리를 피워볼 수도 없었으니, 이는 예종이 그 전부터 앓고 있던 족질이 원인이었습니다. 예종이 앓던 족질은 지금으로 말하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왕성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족질로 급격히 기력을 잃고 졸하니, 재위 1년 2월, 20세의 나이였습니다.

한편, 예종의 이러한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겨우 족질로 그리 쉽게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에 불안감을 느낀 한명회 등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예종이 죽은 후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3명의 대상자가 있었습니다. 먼저, 죽은 예종의 아들인 원자(제안군)인데 나이가 겨우 4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가 남긴 아들 중 첫째인 월산군과 둘째아들 자을산군이었습니다.

자을산군은 후계서열로는 3위이지만 결국 이 아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아이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이 크게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을산군의 어미가 진즉에 한명회의 4녀를 며느리로 들인 덕을 톡톡히 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후계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대왕대비(세조의 부인)도 실질적 권세가인 한명회가 새 임금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열세 살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8대 임금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다운 임금이었습니다. 성종은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도 인수대비의 간섭, 한명회 등 공신들의 득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시간은 나의 편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가다듬기에 힘쓰니,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건 자연의 이치인지라, 자연스레 성종의 치세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성종 치세에는 이렇다 할 외침이나 역모도 없는 가운데 수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으나, 성종에게도 다른 선대 왕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으니, 이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폐비윤씨, 그리고 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잔혹사였습니다.



34
예종 성종 4
-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성종 4년, 가난한 집 선비 윤기무(또는 윤기견)의 딸이 성종보다 12살 많은 나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윤씨는 후궁 시절 대왕대비와 왕대비 등 대궐의 어른들을 잘 봉양하여 이들의 총애를 받았고, 중전 한씨(한명회의 딸)가 죽자 임신타법을 사용해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윤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아들까지 출산하니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입니다.

가난한 집 선비의 딸로 태어나 인생 역전의 대박을 터트린 중전 윤씨, 그 녀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빛날 것 같았으나, 그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실록에는 중전 윤씨의 죄가 세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일,
음조의 공은 없고, 투기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하게 하거나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등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일,
엄소용, 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중전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은 일 등이 그것입니다.

중전 윤씨는 위와 같은 일들로 폐위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맙니다.

일국의 왕비가 폐비되고 사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폐비 과정에 궁궐 여인네들의 암투가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이 외에 특별한 정치적 긴장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폐비 윤씨에게 실제로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폐비 윤씨가 끝내 사약까지 받게 된 것은 만약 폐비 윤씨가 살아 있는 가운데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 폐서인 과정에 관련된 자들이 보복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들이 이를 두려워해 사약을 내리도록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폐비를 사사했어도 이와 관련해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사하면서도 정작 그 아들을 그대로 원자의 자리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명회 등 여러 신하들은 장차 폐비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되어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예상했으나,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성종에게 대놓고 원자를 폐하라는 불경한 주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어린 원자에게 폐비 윤씨의 일을 알리지 말 것과 누구도 이때의 일을 입에 올리지 말 것을 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종의 생각일 뿐, 성장하여 어미의 일을 궁금해 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으며, 그러한 자식의 효심을 이용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려는 자들의 출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성종과 그 어미인 인수대비의 판단은 실로 아둔하고 그 이후의 일은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성종은 배꼽 밑의 작은 종기에서 비롯된 병으로 갑자기 기력을 잃고 1494년에 죽으니 재위 25년에 향년 38세였습니다.

성종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착하고 여린 그 아들이 아비의 뜻에 반해 어미의 일로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킬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5
연산군일기 1
- 연산의 초반 모습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그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등 잔병치레가 잦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왕자같지 않고 삐리리한 모습에 별로 신경이 안쓰임)

연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고 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자 시절에 이미 어미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연산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정의 경계심 자극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으므로,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지혜로운 왕자였는데~/)

연산의 아비 성종은 모범군주답게 대간(고려~조선시대 감찰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업무를 맡은 간관의 합칭으로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 백관의 과실을 간쟁,탄핵하는 등 실세중의 실세였다)들의 입바른 간언(전하 아니되옵니다~~)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산은 성종이 대간 등 신하들을 억눌러 제압하지 않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연산은 성종의 굴복으로까지 보이는 부드러운 통치에 대한 반감과 아직은 가슴속에 눌러만 가지고 있는 폐비 윤씨의 일로 인해 속은 늘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은 즉위하자마자 불교식 제사를 지내는 문제,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 등에서 신하들 특히 대간들과 대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강경책을 폈는데, 연산의 이러한 말이 갖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때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연산의 강경책에 대간들은 연산의 버르장머리를 잡겠다는 듯이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집단사직 등 더욱 강한 초강경책을 펴니, 아직 힘이 미미한 연산으로서는 분통터지지만 대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은 즉위 4년까지 대간들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 때마다 대간들의 집단 사직, 복직이 이어지는 양상이었으며, 비록 겉으로는 대간들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와 같은 시간은 연산의 힘과 내면의 의지를 점점 강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연산은 곧 터질 무오사화 전까지만 해도 권세는 임금에게 있어야 한다는 왕권에 대한 인식,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힘의 관계를 잘 이해했고, 신하들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도록 힘쓰는 한편, 국정운영에도 꽤 신경을 쓰는 등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자질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연속극 등을 보면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자기 어미의 복수를 한다고 마구잡이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나, 연산군은 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보통 이상의 선정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무오사화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자리에 자력으로 오르는 등 고도의 정치력을 보유한 군주로 보는 것이 적정합니다.

물론 연산군이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한 복수를 시작함으로써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하게 되나, 이는 연산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미인 중전을 폐해 사사까지 하면서 그 아들을 그대로 세자로 둔 성종과 인수대비의 업보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36
연산군일기 2
- 사화(士禍), 그리고 무오사화의 시작

사화(士禍)는 조선시대에 조정 중신과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개국 이래 세종 성종 등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선비들 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향토관계 등으로 파벌이 생겼는데, 이를 크게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입니다.

훈구파는 세조의 정난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땅을 소유한 일파로서 정인지, 신숙주, 이극돈 등이 그 일파입니다.

그리고 사림파는 경상도 출신의 대학자 김종직을 필두로, 그 제자인 정여창, 김일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로서, 사림파는 세조의 정난에 동의하지 않으나 기회가 오면 정부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1차로 맞붙어 사림파의 선비가 무수히 죽는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바로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입니다.

연산군 시대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2차 사화가 또 다시 발생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입니다. 이와 같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와 더불어 후대의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합쳐 4대사화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정쟁은 크게 보아 훈구파와 사림파가 끝없이 대를 이어 대립하고 분파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이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는 불가피합니다.

지금부터 연산군 시대의 1차 사화인 무오사화를 간결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의 수장 이극돈(훈구파)은 사초, 즉 사관들이 비밀리에 작성하는 실록 편찬의 기초자료를 살피던 중 자신에 대한 민망한 기록(불경을 잘 외운 덕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는 등)을 발견하고, 이를 작성한 사관인 김일손(사림파)에게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사초에서 다른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볼 요량으로 사초를 자세히 보다가, “김종서, 황보인 등은 절개를 지키려다 죽었다”는 등 세조 집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세조는 아들인 의경세자의 후궁 권씨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권씨가 세조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등 세조를 비하하는 경천동지할 기록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무언가 피바람이 불 것 같지 않습니까?



37
연산군일기 3
- 무오사화(戊午士禍)(1)

사초를 살피다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거기에 세조가 며느리 격인 여자를 탐했다는 내용의 사초를 본 이극돈은 사지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극돈이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초의 내용은 본래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연산이 알게 되면 실록청의 당상인 자신이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기에, 이극돈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이극돈은 평소 아이디어가 풍부한 유자광을 찾아갔습니다.

유자광은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당구, 골프, 바둑, 고스톱 등 다방면에 큰 재주를 가졌으나 서자 출신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사회불만이 많은 자였는데, 세조 시절에 과감한 행보로 세조의 파격적 총애를 받다가 김종직의 제자인 사림파의 공격으로 출세의 길이 막힌 관계로 사림파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사람이었습니다.

유자광은 이극돈으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안의 폭발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즉시 훈구파 중신들을 찾아가 상의한 후, 연산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잖아도 피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연산군에게 이자들은 자기들 무덤을 파는 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지요.

유자광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연산은 사초를 볼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사초 일부를 직접 본 후 분노하여 김일손을 잡아들여 사초에 기재된 사실에 대해 엄한 문초를 하였습니다.

김일손은 고문에 못 이겨 김종서에 관한 이야기와 세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출처를 모두 밝혔고, 그 출처를 조사해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연루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자광은 사초에서 종전 것보다 훨씬 중대하고 폭발성이 강한 내용을 발견하게 되니, 이는 바로 역사시험문제에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 “조(弔)의제문"이었습니다.

“조(弔)의제문”은 초나라의 왕인 “의제”가 “항우”로부터 맞아 죽은 것을 슬퍼하며 “의제”를 조문한 것인데 이것이 무슨 문제일까 싶겠지만, 유자광은 이 글의 깊은 뜻과 엄청난 파괴력을 단 번에 파악하였습니다.



38
연산군일기 4
- 무오사화(戊午士禍)(2) 그리고 불길한 전조

“조(弔)의제문”은 중국의 “항우”가 왕인 “의제”를 때려죽인 것을 비난하는 한편 불쌍한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서,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쓰고,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실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弔)의제문”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으니, 이는 세조를 항우에, 단종을 의제에 빗대어, 결국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고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조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연산은 이들이 세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역심을 품은 것으로 간주하고, 거대한 옥사를 일으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한편,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은 김일손 등을 능지처사 하였습니다.

또한 김일손을 격려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었고, 김종직의 제자로 거론된 많은 선비들을 장 100대씩을 쳐 유배 조치하였는데, 참고로 장 100대를 맞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오사화로 많은 선비가 옥사하고 사림파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러한 무오사화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외형상으로는 국문을 담당한 훈구파 대신들과 유자광이 승자 겸 주연으로 보였으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으니, 이는 사건의 총감독인 바로 연산이었습니다.

정치적 감각이 매우 발달한 연산은 김일손의 사초를 접하자마자 이 사건이 몰고 올 파장의 크기를 즉시 가늠하고, 사건을 김종직 사단 전체로 확대시켜 정국을 혹독하게 몰고 갔고, 이 일을 기화로 연산은 집권 4년 만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몇 해, 연산은 중급 이상의 정치를 펼치며 태평성대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정치를 펴는 듯하면서도, 잊을 만하면 폐비 윤씨의 일을 넌지시 던지곤 하여 대신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연산이 일정 주기로 끊임 없이 폐비 윤씨의 일을 들먹인 모습이나 이후의 잔혹사를 보면, 이 시기에 연산은 만연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속으로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는 한편, 복수를 할 힘을 기르고 그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무오사화가 있고 5년이 흐른 연산 9년 어느 날,

연산이 개최한 궁중 잔치에서 이세좌가 연산으로부터 받은 술을 마시다 술 몇 방울을 연산의 곤룡포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연산이 이런 사소한 해프닝을 이유로 이세좌를 파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별 일 아닌 것 같은 이 일의 대상자가 다름 아닌 이세좌였다는 것입니다. 이세좌가 누구입니까 이세좌는 바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사태가 사실은 연산의 광기서린 대 복수의 서막이었으니, 이때부터 폐비 윤씨의 일에 관여된 사람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아휴 살 떨려~~)



39
연산군일기 5
- 복수의 시작

술 몇 방울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이세좌를 파직한 연산은 그로부터 며칠 후 조정 중신들을 모아 놓고 “내가 이세좌를 파직한 것은 대간들이 반드시 벌을 청할 것으로 알고 그런 것인데, 아무도 벌을 청하지 않으니, 이는 이세좌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냐”라며 불호령을 내렸고, 화들짝 놀란 대신들이 이세좌에게 벌을 주기를 청하자 연산은 이세좌를 유배하고 그 아들들을 파직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연산은 두 달 만에 이세좌를 불러들였고 대궐로 불러 친히 술을 따라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신들은 연산의 지난 행동이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기쁜 나머지 돌아온 이세좌의 집으로 몰려가 축하를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느낌이 안오나?)

그런데 이즈음, 중전을 간택하는 간택령이 내려졌는데, 경기관찰사 홍귀달이 손녀딸에게 내려진 입궐령을 손녀딸이 병중이라는 이유로 따르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간뎅이가 부었네)

그러자 연산은 갑자기, 홍귀달의 이와 같은 행위는 신하들이 작당, 붕당하여 위를 업신여기는 데서 나온 것이고, 전일에 이세좌를 엄한 벌로 다스리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면서 홍귀달과 이세좌를 유배시키고, 이어서, 전일에 이세좌의 죄를 논할 때 엄벌하라 청하지 않은 신하들과 이세좌의 집을 찾아 축하를 한 신하들을 국문하는 등 믿기 어려운 조치를 쏟아내었습니다.

조정의 중신들은 이 일로 인해 엄청난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이는 이세좌가 바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장본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산이 별 것도 아닌 일을 이유로 몇 차례에 걸쳐 이세좌를 집중적으로 타격하는 것은 어미의 복수를 하려는 전조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연산은 이세좌를 타겟으로 한 조준사격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나리오를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연산은 이세좌의 아들, 아우, 사위들까지 장을 쳐서 유배조치한 날 저녁, 그러니까 갑자년(1504년) 3월 20일 밤, 느닷없이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소용을 불러 내 이들이 어미를 참소하여 어미가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직접 몽둥이로 이들을 마구 때려 혼절 시켰습니다. (갑자기 악귀가 쓰였나?)

이어서 연산은 이 여인들의 아들이자 이복 동생 둘을 불러 몽둥이로 이들을 치도록 하였고,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는 아들 하나는 몽둥이로 어미를 쳤으며, 눈치를 챈 어느 아들은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하였고,, 결국 그날 밤 자신의 모친격인 성종의 후궁 둘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연산은 이날 밤 성종의 후궁 둘을 때려죽인 뒤 장검을 빼어 들고 연산의 할머니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숙소에까지 난입하여 “왜 어머니를 죽였냐”며 할머니를 가혹하게 윽박질렀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인수대비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패륜이지 지 할머니인데)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이렇게 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40
연산군일기 6
- 갑자사화(甲子士禍) 그리고 광풍

<연산군일기>에서는 갑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고,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 어느 날 밤 미복 차림으로 찾아온 연산에게 임사홍이 울면서 “모후께선 투기한 죄밖에 없사온데 엄숙의와 정소용이 참소하여 폐비와 사사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하자, 폐비를 닮아 모질고 어리석은 연산이 그날 밤 엄숙의와 정소용을 손수 죽였다.

그러나 임사홍의 집에 사관이 동석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시점상으로도 연산이 어미의 죽음이 참소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 때는 이보다 훨씬 앞선 때이므로,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연산은 엄숙의와 정소용을 손수 때려죽인 후 “칠거지악이 있다 한들 그런 일이라면 버리면 그만이지 죽여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아비인 성종의 뜻에 반해 폐비를 추승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폐비를 사사할 때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귀양 가는 중), 윤필상을 참하고, 죽어 묻혀있는 한명회, 정창손, 정인지 등을 부관참시하였으며, 특히 한명회와 정창손은 이미 해골이 된 머리를 효수되기도 하였습니다.

연산은 그 외 어미의 죽음과 연관된 사람을 몇 더 죽이고 유배보냈는데, 단지 어미의 복수라면 이쯤에서 마무리되었을 것이나 연산은 어기서 멈추지 않고 피바람을 뜻밖의 방향으로 확대시켰습니다.

연산은 연산 아래에서 영의정까지 지내고 죽은 인수대비의 4촌 오라비 한치형을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부관능지, 즉 시신을 꺼내 머리, 팔, 다리를 모두 자르게 하고, 가산은 모두 몰수하였으며, 자식들을 국문장으로 끌고 나와 죽기 직전까지 괴롭혔습니다.

무오사화에서 갑자사화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세 정승은 한치형, 이극균, 성준이었는데, 연산은 한치형에 이어, 이극균, 성준을 모두 죽이고도 모자라, 그 후 이들을 능지하여 팔도에 돌리는 한편, 머리는 따로 떼어 백관 앞에 효수하였다가 다시 이를 팔도에 돌리도록 하였다가 다시 해골을 빻아서 바람에 날려버리게까지 하는 등 사람의 길을 벗어난 폭정을 이어갔습니다.

이어서 이들의 집이 있던 자리는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귀양에 그쳤던 부모, 형제, 자식, 사위들도 모두 참수하고, 과거 연산 즉위 후 입바른 상소를 올렸던 대간 등 연산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대간들을 찾아 내 과거의 일을 이유로 모조리 참수하여 효수하였습니다.

이즈음 감옥이 모자라 잡아 온 이들을 바깥에 둘 수밖에 없었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 얼굴이 장대에 꽂혀 걸리었으며, 대신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는 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tc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 101-120  (0) 2021.05.01
조선왕조실록 81-100  (0) 2021.04.21
조선왕조실록 61-80  (0) 2021.04.11
조선왕조실록 41-60  (0) 2021.04.01
조선왕조실록 1-20  (0) 2021.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