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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5 - 광해의 외교 마인드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광해는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중국 조정에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전하께 죄를 얻는 게 낫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파병에 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광해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1만 3천 명의 군사를 모아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심하에서 누루하치의 대군과 맞섰으나 대패하였고, 강홍립의 군대 역시 후금 군대에 포위되어 괴멸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조선과 끝까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보고 강홍립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고, 결국 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에 투항한 강홍립의 처자를 구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으나, 광해는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더 나아가 강홍립을 통해 후금에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기까지 하였습니다.
광해의 의사를 확인한 누루하치는 조선에 화친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하나 같이 다음과 같은 논리로 화친을 거부하여야 한다며 광해를 강하게 압박하였습니다.
- 범같은 기세의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는 없으나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의 원수인 저들과 어찌 화친하겠나이까. 이것이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차마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옵니다.(나라가 망해도 화친은 안 된다?) 여러분이 임금 { 즉 왕 } 이었다면 나라의존폐앞에서 과연 어느쪽을 선택했을까요?
광해가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의 신하들은 태업을 하였고, 영의정 박승종은 아예 칭병을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는 등 광해의 외교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광해가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역도로 몰아 죽이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고, 신하들은 언제 옥사에 내몰릴지 전전긍긍하며 공포에 떨었지만, 그러한 죽음의 공포마저도 “사대주의”라는 완고한 도그마만은 넘어서지 못했으니, 이들의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대뇌구조는 참으로 연구대상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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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6 -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광해가 반정에 의해 끌려내려 간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요
실록에 나타난 반정 당사자들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둘째,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무리한 궁궐 증축을 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 셋째,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폐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중립외교에 관한 부분은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결국 크게 벌어진 결과물은 없다 할 것이고, 무리한 궁궐 증축이 있기는 했으나 이러한 정도의 공사는 다른 왕도 많이 추진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패륜으로 치면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가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인조반정 주도자들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한 것이고, 반정의 실제적 원인은 전형적 권력투쟁과 능양군의 원한에 기인한 권력의지가 맞물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그 중 다섯째 아들이 정원군이었는데, 셋째 아들인 능창대군이 17세의 나이에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몸과 마음이 상하여 시름시름 앓다 4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광해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그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짓기까지 하자, 정원군의 큰아들 능양군은 광해를 원수로 알고 광해를 몰아낼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능양군은 이귀, 신경진, 최명길, 김자점 등과 손을 잡고 3년여를 준비하였으며, 궐 안을 관장하는 훈련대장 이홍립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반정 준비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반정에 관한 사항이 새어나가게 되었으나, 이즈음의 광해는 그동안의 지나친 역모 고변과 옥사로 인해 역모에 대한 면역성이 강해져, 정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소실된 상태였습니다.(반정 당일에도 거사 상소가 있었으나 광해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1623년 3월 12일(광해 15년)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은 큰 어려움 없이 대궐을 접수하였고, 그 날로 광해는 폐위되었으며, 능양군이 인목대비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인조입니다.
인조반정 후 광해의 사랑을 받던 김개시는 즉시 목이 잘려 나갔고, 광해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메어 세상을 하직했으나, 정작 광해는 무려 19년을 유배지에서 더 살다가 6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 15년 세자 생활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훌륭한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결국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에 폐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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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1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태종이나 세조와 같은 반정의 완전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종과 같이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여건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인조는 반정이 서인 정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았고, 붕당의 폐해 역시 잘 알았기에, “당이란 말은 주자의 말이라 해도 듣고 싶지 않소”라고 하며 붕당의 활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도 늘 경계했습니다.
또한 반정의 첫 번째 명분인 사대의 예를 지키기 위해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하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약소국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약한 자의 눈치 보기에 불과하였으니, 이는 만고의 진리라 하겠습니다.
왜란이 끝난 지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1620년경의 약소국 조선은 또 다시 고통과 치욕의 길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인조 반정이 벌어지기 2년 전인 1621년 요동 땅이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에 넘어가면서, 명나라 요양성 장수 모문룡이 조선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모문룡은 의주 일대에서 후금 군에 의해 변발을 하게 된 명나라 한족들을 모아 후금의 발꿈치를 문 정도의 작은 전과를 올린 후 이를 과장해 본국에 보고하니,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에게 승진과 두둑한 상을 내렸습니다.
모문룡은 후금이 보복에 나서면 도망을 쳤고, 후금이 물러가면 다시 또 싸움을 걸어가니, 당시 광해는 조선 땅에서 후금과 감정적으로 싸우는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피해를 입게 될까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이에 광해는 모문룡을 명나라로 돌려보내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모문룡을 가도(국경 근처의 조선 섬)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요동의 명나라 한족들을 데리고 가도로 들어간 모문룡은 이내 가도의 기막힌 가치를 알아차리고, 진을 설치해 장기 주둔을 할 태세를 취하였습니다.
작은 섬 가도에는 수십만의 명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흉년이 닥쳐 식량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상륙해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조선의 관아를 쳐 창고의 곡식을 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사기가 오른 모문룡이 툭하면 요동을 점령한 후금을 공격할 액션을 취하여 후금을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친명배금 정책을 선택한 조선이라 해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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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 - 정묘호란
이즈음 후금에선 중대한 정세 변화가 있었으니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1626년 숨을 거두고 평소 조선정벌을 주장하던 8남 홍타이지가 새 칸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오르자마자 모문룡의 일 등을 명분삼아 사촌인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627년 1월(인조 5년)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정벌토록 하였습니다.
후금의 막강한 전력 앞에 조선의 방어선이 속속 무너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란이 끝난 지 30여년 만에 이번엔 여진족에 의해 또 다시 조정이 피난을 가는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후금 총사령관 아민은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의 완전 항복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한양으로 내려오면서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였습니다.
후금은 조선에 명과 단교하고 양국이 형제(물론 후금이 형)의 나라로 지내는데 동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후금과의 화친은 가능하나 명과의 단교는 어렵다는 답신을 보냈고, 후금은 명과의 단교는 하지 않지 않고 양국이 화친하되, 그 맹세로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함께 마시는 만주식 의식을 갖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 오랑캐인 여진족과 위와 같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지나치게 야만스러워 선비의 나라인 조선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우여곡절을 거친 후 인조가 모후의 상중에 있음을 핑계로 선조는 향불을 태우는 의맹식을 거행하고, 백마와 흑우를 잡고 피와 골을 마시는 의식은 신하가 대신하는 방식으로 겨우 겨우 화친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명배금이니 뭐니 해 봤자 결국 힘 앞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화친이 되기까지 그리고 화친이 된 후 후금 군사들에 의해 조선 백성이 얼마나 많이 죽었고,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는 왜란 편에서 충분히 본 것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략하고자 합니다.
후금은 완전 철수를 하면서 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 조선 국왕이 하늘의 뜻을 알아 허물을 즉시 뉘우치고 화친을 이루게 했으니 두 나라는 영원히 형제의 우애로 지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포로로 잡혀 온 고려인이 조선으로 도망치면 즉시 붙잡아 보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이 도망쳐 올 경우 가급적 모른 척 했지만, 항의가 거셀 경우 부득이 몇 명이라도 잡아 다시 후금에 넘길 수밖에 없었고(나라가 아니라 왠수다 왠수!), 조선 사신이 심양에 가면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와 통곡하며 데려라 주기를 호소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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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 - 병자호란(1)
정묘년의 치욕을 당한지 얼마되지 않아, 인조는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하여 명국의 승인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후금에 대한 복수와 배척의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이 진정으로 정묘년의 치욕을 갚고자 한다면, 왕실이나 종친, 훈신들 나아가 양반들이 가진 갖가지 특전을 버리고 재정을 확충한 다음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군대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등 야무진 각오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조와 중신들은 “소중화”라는 관념과 대의에만 빠져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변 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물론이요 실질적인 준비도 전혀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문화 사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뼛속까지 뙤놈을 상전으로 모시겠다는것이지요~
그건 글코~ 어쨌든 후금은 이즈음 중국 공략을 잠시 멈추고 서쪽과 몽고족 정벌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드디어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의 사신 용골대가 사신으로 와 홍타이지가 황제로 오르는 일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히 반발하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소중화”를 외치는 조선이 오랑캐의 황제 등극을 동의할 수는 없었겠지요. 다음은 이 때 인조가 반포한 척화교서의 일부입니다.
- 정묘년의 변을 당해 임시로 기미할 것을 허락했는데 오랑캐들의 요구는 한이 없더니, 요즘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하니,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 이에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 결 같이 결단해 그들을 물리쳤으니, 충의로운 선비는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종군을 자원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조선이 위와 같이 척화의 변을 토하고 있던 그 때, 후금은 조선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라 이름을 청으로 하는 황제국을 세웠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청태종)는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치기에 앞서 친명배금을 노골화한 조선을 확실히 복속시켜 배후의 후환을 없애겠다는 전략적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기어이 청나라가 대군으로 조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 조정은 조금 전까지의 의기는 어디로 갔는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청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3일, 3만의 군사만을 보냈던 정묘년과 달리 10만의 정예병을 보내 직접 한양을 치러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진군 도상에 있는 성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진격 속도가 놀라웠고, 인조 일행은 늘 하던 대로 짐을 싸 강화도로 도망을 가고자 했으나, 이미 청군은 불광동 근처에까지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정말로, 레알~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조선입니다~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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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4 - 병자호란(2)
청군의 급속 남진으로 인해 강화로 가지 못한 인조 일행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곧 청군이 쫒아와 눈보라 치는 남한산성을 에워쌌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화친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 가운데 청군과 굴욕적인 물밑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청나라 진영을 찾은 조선측 대표 박난영의 목이 잘리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갈팡질팡 하던 중 청나라 태종이 직접 남한산성까지 내려오게 되니, 조선 조정은 작은 계책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중대한 국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 1일, 이 와중에도 조선 조정은 모두 꿇어 앉아 중화 대국 명나라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한 망궐례를 올렸고, 이날 청 태종은 청군 진에 도착해 높은 곳에 올라 조선의 망궐례 의식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몹시도 휘날리던 1637년 1월 17일, 청태종은 드디어 다음과 같은 글을 인조에게 보내왔습니다.
- 정녕 그대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죽고 싶거든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조선 조정은 화친하자는 의견을 펴 온 최명길이 답서를 했는데, 신하들은 “왕이 성을 나가고도 임금이 보전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 때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최명길을 강하게 비난하였습니다.(그럼 어쩌라고!)
결국 왕이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최명길 초안의 국서가 청군에 보내졌고,
청군에서는 “황제가 이미 이곳에 온 이상 조선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척화를 주장한 신하 몇을 묶어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조선 조정이 이 문제로 또 다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던 때에 용골대가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 황제께서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마라. 추후에 남는 것은 조선의 멸망뿐이다.
그러면서 용골대는 봉림대군과 비빈 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쑥대밭이 되었으며(살아남은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봉림대군과 인조의 비빈 등을 청태종의 동생 도르곤이 잡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모두 울며 불며 다음과 같이 인조에게 간하였습니다.
- 성상께서 성에서 나가시면 보존될 확률이 반반이지만, 나가지 않을 시엔 열이면 열 망하고 말 것이옵니다 저언하!
삼전도의 굴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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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5 -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 27일 청 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습니다.
-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 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조선은 명과 단교한다.
-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등등등등등등...)
삼전도에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면제해주겠다는 큰 인심(!)을 썼고, 다만 죄인인 국왕이 정문인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등의 몇 가지 항복식과 관계된 요구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마침내 인조는 통곡하는 백성들을 뒤로 한 채 정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서 송파구 삼정동에 위치한 삼전도에 이르렀습니다.
인조는 “천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며, 청나라식 항복의 예인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소리가 나도록 부딪혀 조아리는 의식)의 예를 올리며, 항복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항복식을 마친 인조는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성 거리엔 청나라 그리고 함께 온 몽고 병사들이 넘쳤고, 가옥은 불타고 있었으며,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청 태종이 돌아가자 곧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등도 통곡 속에 인질로 청나라로 떠났습니다.
또한 삼전도에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고 항복을 기념하는 거대한 비가 세워졌고, 척화신으로 끌려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3학사)는 목이 잘리어 나갔습니다.
또, 청군이 포로로 끌고 간 조선인이 수만에 이르렀습니다.(수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까지 있음)
그런데 이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오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잡아 다시 보내야만 했고, 따라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 즉 돈을 주고 사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붙잡혀 간 사람을 데려오는 속환 금액은 갈수록 천정부지로 뛰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도를 하지 못했고, 더 한 문제는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부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조선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의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나라에 이혼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런 저런 다른 이유를 달아 어렵게 돌아온 부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조정에서는 이 여인들로 하여금 냇물(홍제천)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 주는 의식을 거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시대 여인들의 수난사는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지경이라 하겠습니다.
(젠장인지 된장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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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6 - 비운의 소현세자(1)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34세의 나이에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입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병자호란 후 1637년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인질로 잡혀온 항복한 나라의 세자,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고요한 가운데 언제나 당당했으며,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기를 쉬지 않았고, 조선 백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에게 조선 외교 문제를 따지고 들자, 소현세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기도 하였습니다.
- 내 비록 이역 땅에 와있지만 일국의 세자요. 장군이 어찌 이토록 감히 협박하는 것이요. 죽고 사는 일이야 하늘에 달려 있는 법 내 두렵지 않으니 예를 갖추시오.
심양의 왕들과 장수들은 점차 소현세자의 품격에 반해 시간이 흐를수록 세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특히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인품과 자질에 진심으로 반해 소현세자를 왕 모시듯 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는 벽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천외천, 즉 하늘 밖의 하늘이라 할 만한 서양의 사상과 문물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 등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으며, 소현세자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20대 후반의 소현세자는 청국이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조선도 서양과 청국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야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청국에서 국제 외교에 능숙했고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최초의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이러한 성장과 태도에 대해 의심과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습니다다.
소현세자를 반대하는 세력은 소현세자가 귀국하기도 전에 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내었고,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습니다.
선조가 이순신과 광해에게 느꼈던 것과 똑 같은 열등감과 두려움을 인조가 자기 아들인 세자에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아들에게도 이런맘을 갖을수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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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7 - 비운의 소현세자(2)
이즈음 심양에서는 청태종이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르곤이 청 태종의 여섯 살 난 아들을 황제로 세운 후 전군을 총 동원해 명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한편, 이때 명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북경을 접수했습니다(명나라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
그러나 청나라의 도르곤은 압도적 전력으로 어렵지 않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 한족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유연하고 절도 있는 조치로 인심을 얻고, 드디어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와 동갑인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이제 중원이 하나로 명확하게 통일되었으니 양국이 서로 못믿을 것이 없소. 세자는 그만 본국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하며 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습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 일행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벽제에서 대궐 앞까지 거리를 메우고 이들을 반겼습니다.
그러나 부왕 인조의 태도는 쌀쌀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데다 거듭된 전란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한 인조는 왕권 유지에 항상 불안감이 많았고, 세자가 청국 세력과 백성의 지지를 업고 자기 대신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남짓 만에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다가 4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자의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습니다.
말라리아는 증세가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나,
열대의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로 어린이나 노약자도 아닌 건장한 젊은이가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믄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병명이 학질로 진단된 후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습니다.
대신들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새로이 세자를 정함에 있어서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있음에도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서둘러 세자에 삼았습니다.
위와 같은 제반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자식까지 죽이면서 권력을 유지해야했던 임금, 조선왕중 최악의 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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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현종 1 - 효종 즉위
소현세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궁녀들 몇을 지목하여 죽였고, 강빈의 오라비들을 유배 보냈다가 불러 곤장을 쳐 죽였으며, 급기야 강빈을 폐서인하여 사사시켰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보냈고, 첫째와 둘째 아들은 현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아비이자 시아비이자 할애비입니다.
소현세자!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주 어쩌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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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7년만인 1649년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무너진 지 30여년 만에, 이번에는 여진족 수장에게 삼배구고두의 모욕을 당했고,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주었으며, 장자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는 임금! 참으로 오욕으로 얼룩진 재위기간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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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1649~1659)입니다.
효종은 18세이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강화도 함락으로 청의 포로가 되었고,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볼모지로 가는 도중에 등에 업혀가던 세 살 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세자의 자리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효종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북벌’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대군시절부터 반청의식이 투철했던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청을 배척하는 세력인 재야 산림(삼전도 굴욕 이후 벼슬을 거부하고 재야에 묻힌 사림세력)을 대거 기용하고,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목표로 북벌을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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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현종 2 - 북벌의 실체(1)
전회에서 본 것처럼 효종하면 북벌, 북벌하면 효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을 계획했고, 재야 산림의 거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러들여 이들과 합작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고,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미 떠 있는 해라 할 수 있는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정말로 추진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미치지 않고서야)
더욱이 북벌의 파트너라는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출사요구를 거절하다가 말년에야 올라왔고, 재직기간도 겨우 10개월에 불과하였습니다.
실록을 보면, 송시열이 그 기간 동안 효종에 대해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진언을 한 것이 다소 나타나고 있을 뿐, 북벌에 관한 어떤 계책이나 사대부 사회를 향한 희생 요구 등 북벌과 관련한 어떤 발언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군역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원망이 컸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역의 폐해에 대해, 유계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습니다.
- 군역의 폐해를 바로 잡아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하여야 국가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이제라도 성지를 내리시어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진사, 유학, 서얼로서 허통된 자까지 60세 이하 아내가 있는 자들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져 모두 베 한 필씩 바치게 하소서.
이러한 상소가 논의에 부쳐졌으나 송시열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결국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사대부들의 힘이온데, 하루아침에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원망이 크지 않겠나이까”라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유계의 상소는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점을 보면, 송시열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하기는 커녕 북벌과 전혀 무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효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될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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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현종 3 - 북벌의 실체(2)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된 결정적 근거는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내용입니다.
송시열이 쓴 ‘악대설화’라는 책에는,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하며 다음과 같이 북벌의 의지와 전략을 깊이있게 상의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오랑캐를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나 송시열이 위와 같은 독대 내용을 공개한 때는 효종 사후 16년이 흐른 숙종 1년 때이고, 송시열은 이즈음 예송논쟁을 잘 못 이끈 죄로 유배되어, 죽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처지였습니다.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의 독대가 정녕 있었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고, 설령 위 내용이 독대 후 바로 기록해 둔 진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이 전혀 없는 점과 전회에서 본 사정을 종합해 보면, 송시열을 북벌의 기수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북벌은 송시열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효종의 단독 기치가 되고 맙니다.
효종이 북벌을 꾀한다는 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북벌 의지를 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나, 정작 효종실록에는 북벌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나 어떤 명령도 보이지 않습니다.(청에서 알면 골치 아프니까?)
그러면, 효종의 북벌 추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효종 북벌론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과 효종이 가졌던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기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군왕의 권력은 사상누각이라 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대부가 목숨과도 같이 숭배하는 주자의 나라 명을 오랑캐인 청나라가 침범했고, 그 오랑캐에 인조는 무릎을 꿇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계통을 중시하는 주자의 나라에서 장자도 아닌 몸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는 사대부의 지지를 얻을 묘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더더욱 컸습니다.
이에 효종이 사대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주자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멀리하는 것, 즉 북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본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효종이 북벌을 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북벌은 효종이 현실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목표라기보다는, 북벌을 강조함으로써 사림의 지지를 얻겠다는 정치적 계산과 더불어, 쉽게 침략당하지 않는, 즉 문약에 빠지지 않은 단단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합쳐진 다목적용 슬로건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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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현종 4 - 예송논쟁
북벌을 기치로 한 나름대로의 개혁군주 효종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41세)
효종은 귀 밑에 종기가 심각해 침의 신가귀로부터 침을 맞고 고름을 조금 짜낸 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곧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마디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고(타살설이 있으나 근거나 배경이 취약합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살형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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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죽은 후 선양에서 태어난 아들이 18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으니, 이가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 둘은 예송논쟁과 전례가 없을 정도의 흉년입니다.
예송논쟁은 왕이 죽었을 때 예법상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남인과 서인 간의 격렬한 논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수년간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유배되고 더러는 죽곤 하였습니다.
효종이 죽은 후 그 상례(喪禮)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남인과 서인 간에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서인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남인은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로서 장자(長子)가 아니므로 1년간 모친이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허목, 윤휴 등 남인의 주장은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나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와 다름이 없으므로 모친이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종시대의 이러한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었습니다.
2차 예송논쟁은 현종 말년에 효종의 부인이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1년설을 주장했고, 서인은 대공설(大功, 8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조선을 좌우하는 사대부들이 편을 나누어 몇 해에 걸쳐 논리와 꼬투리 잡기를 총동원해 물고 물리는 싸움을 이어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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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현종 5 - 환국의 시대 돌입
전회에서 본 예송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고,
반면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는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몇 해 동안 죽고 살기로 논쟁을 벌이고, 이 문제로 귀양에 사람이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부국강병을 위해 이리 오래 논쟁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본질이고 또 한계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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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백성은 방납과 가혹한 군역 등으로 큰 고통을 받았는데, 현종 말년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기근이 연속해서 찾아왔습니다.
조선 8도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각종 전염병이 들끓었으며 곳곳에 파묻지 못한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비가 오면 냇물에 시체가 떠내려갔으며, 거리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넘쳐났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때의 실록에 각 도의 감사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월별로 보고 한 것이 나오는데, 전국의 아사자와 병사자의 합계가 1만 명을 웃도는 달이 많았습니다.(축소 보고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15년 재위 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도 없이, 또한 죽음에 이른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남인과 서인의 예송논쟁과 당파싸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근 외에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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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죽은 후 그의 외아들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입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입니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습니다.
숙종은 이러한 당쟁의 중심에 서 한평생을 보냈는데, 이러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정치사적 단어는 “환국(換局)”(정치적 국면의 전환)입니다.
환국은 당파의 교체와 정책의 변화, 인명(人命)의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익숙한 주제는 환국의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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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 - 경신환국(庚申換局)(1)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의 정국에서 정국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입니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 숙종의 가까운 외척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김석주의 조부인 김육(대동법 추진)과 반목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김석주는 한직에 머무르다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들을 줄줄이 내쳤고,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허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소년군주 숙종의 지원에다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 않아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측 사람들을 탁남(濁南)이라 불렀습니다.(남인의 분열)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 그랬는지 힘이 강해지고 도가 지나치면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무사안일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한편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이 트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에는 김석주의 처세와 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 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 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김석주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라는 것을 숙종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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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 - 경신환국(庚申換局)(2)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의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을 영상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대노했습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 총융사 등의 병권에 관한 요직을 서인측 인사로 물갈이해버렸고, 승지와 대간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습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 소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습니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 대간들이 남인의 비위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늘 제시되는 이러한 유악사건은 갑작스런 환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여집니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매우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신환국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드라마였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 뒤집기 한판이었습니다.
김석주는 곧이어 정원로 등에게 허견(남인 실세)이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들로, ‘삼복’이라 불리었음)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정원로의 집에서 허견과 삼복이 모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복평군이 허견에게 “왕은 곧 돌아가실 것이오. 그대의 아비는 나를 왕으로 세우려 했는데 나는 곧 병조판서가 될 것이오. 그대와 피를 나누어 마셔 맹세하고 함께 의논하여 서인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한 것을 김석주가 정원로로 하여금 고변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남인의 실세 허적과 허견 그리고 삼복(三福)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 축출,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석주가 확실한 증거 없이 역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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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
- 서인의 복귀와 노론,소론 분열
전회에서 본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남인이 떠난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습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습니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습니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 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익훈은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 외척의 발호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돌며 그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송시열의 한 마디로 사태가 잠잠해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사류들이 이번에는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서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소론이라 불렀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이라 불렀습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조 때 동인, 서인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하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입니다.
한편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빠른 죽음이 그에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넉넉하게 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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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4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글의 진행상 아직 희빈이 아니나 역사의 결과물이므로 편의상 장희빈이라 함)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릴 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른 것에 비하면 매우 한미하다 할만 했는데,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는데, 장차 나타나는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런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 나게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 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습니다.(얼씨구나~)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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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5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그녀를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장희빈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맞으며 반드시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688년 장희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참으로 컸고, 특히 그 아들이 총애해 마지않는 장희빈이 낳은 것이니 그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숙종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들어오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당하관의 아내가 뚜껑이 있는 옥교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그 종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숙종은 전교에 따라 입궐한 왕자의 외조모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크게 분개해 사헌부 법리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했는데, 이들을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숙종 15년 1월,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인 숙종은 마뜩치 않아 하는 대신들의 뜻을 누르고 아직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을 희빈(정1품)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젊었고(28세와 21세), 따라서 정비인 인현왕후가 대군을 낳을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한 것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무리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뒤집기의 달인 숙종이 또다른 뒤집기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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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6 - 장희빈(3)
원자 책봉이 강행되자 팔순의 나이에도 파이터 기질이 여전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며 정면으로 반대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숙종은 이미 명호가 정해졌는데도 이를 재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라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서 송시열의 토벌을 청하지 않았다하여 도승지 이하 네 승지와 대간들을 파직한 후 삼정승에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을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조정을 남인으로 완전히 물갈이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대간들의 청을 받아 송시열을 제주에 안치한 후 대부분의 서인을 파직하고 유배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기사년에 느닷없이 정치적 국면이 확 바뀌니 이것이 기사환국입니다.
경신환국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서인 집권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전에 김석주와 공작정치를 일삼던 김익훈이 일흔의 나이에 형신을 받다가 죽었으며, 김환, 이희 등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사환국은 지난 번 경신환국과 닮아 있었지만, 경신환국이 숙종 묵인 아래 김석주가 각본과 연출을 한 것이라면, 기사환국은 숙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각본과 연출을 직접 담당하였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돌아온 남인의 핵심 표적은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김수항이었습니다.
- 저들의 죄는 찰대로 차서 김안로나 정인홍을 넘어서옵니다.
먼저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김수항이 특별한 죄명도 없이 사사되었습니다.
숙청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즈음 숙종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중전이 "꿈에 선왕께서 말하기를, 장희빈은 본디 복이 없어 아들도 없고, 궁 안에 두게 되면 남인과 결합해 나라에 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자가 탄생하지 않았느냐. 중전의 투기가 선왕까지 들먹일 정도로 극에 달했으니, 더 두고 볼 수가 없다.
아무리 장희빈 덕분에 환국되어 정권을 잡은 남인이지만, 결정적 하자도 없는 한 나라의 국모를 폐하자고 하는 일에 선뜻 동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동조했다가 일이 잘 못 되어 멸문지화를 입은 연산군 시대의 일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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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7 - 장희빈(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 대역보다 더 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 행위였습니다.(“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로 쫒아내고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책봉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특별한 잘못도 없이(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 폐서인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사가에 있는 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이라고 숙종에게 주청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인현왕후의 정치적 감각 부재?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곧이어 장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부는 영의정, 조부는 우의정, 증조부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장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오른 것입니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숙종은 이제 남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리라 마음먹고, 송시열의 처분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죄상이 흉역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고, 숙종은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사사하되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즉시 죽게 하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어명에 의해 바다를 건너 상경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거목이 특별한 죄목 없이 스러져 간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사람은 사림이 ‘송시열의 조선’이라 할 정도로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서인, 특히 노론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인물평은 송시열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잣대로 삼았습니다.(“김 아무개는 평생을 송시열의 뜻에 따른 사람으로서~~~”)
숙종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거목 송시열마저 한 방에 보내버리게 할 정도로 숙종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장희빈의 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자못 궁금하지만 전하는 문헌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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