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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101-120

by 恒照 2021. 5. 1.

101
숙종 7 - 장희빈(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하지 않자 86명의 대신, 대간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의 상소가 모반 대역보다 더 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 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 행위였습니다.(“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로 쫒아내고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책봉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특별한 잘못도 없이(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 폐서인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사가에 있는 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이라고 숙종에게 주청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인현왕후의 정치적 감각 부재?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곧이어 장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부는 영의정, 조부는 우의정, 증조부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장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오른 것입니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숙종은 이제 남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리라 마음먹고, 송시열의 처분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죄상이 흉역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고, 숙종은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사사하되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즉시 죽게 하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어명에 의해 바다를 건너 상경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거목이 특별한 죄목 없이 스러져 간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사람은 사림이 ‘송시열의 조선’이라 할 정도로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서인, 특히 노론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인물평은 송시열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잣대로 삼았습니다.(“김 아무개는 평생을 송시열의 뜻에 따른 사람으로서~~~”)

숙종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거목 송시열마저 한 방에 보내버리게 할 정도로 숙종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장희빈의 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자못 궁금하지만 전하는 문헌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ㅎ)

 

 

102
숙종 8 - 장희빈(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으나 집권세력다운 면모를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의 환국을 통해 언제든지 또 다른 환국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남인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중전의 오라비 장희재와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등 복지부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환국이 있은지 4년이 흐른 숙종 19년, 남인을 긴장시키는 일이 있었으니, 숙종이 새로이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삼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록에는 별 기록이 없으나, 야사에는 언제나 폐비에게 의리를 다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즈음부터 숙원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중전인 장희빈의 경계심이 커졌으며, 남인의 긴장감도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언제 환국이 있을지 모른다!)

한편, 기사환국으로 물러난 서인 진영에서는 일군의 무리가 비밀 자금을 모으고 궐내와 연결해 궁중의 소식을 수집하는 등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남인측에 포착되었고, 남인 최고 실세 우의정 민암은 그들 중 “함이완”이란 자를 협박해 역모를 고변하게 하였습니다.

함이완의 고변에 따라 관련된 서인들을 잡아다 고문을 하던 중, 이번엔 서인 유학, 김인 등이 “장희재가 김해성을 매수해 최숙원을 독살하려 했다”라는 고변을 하였습니다.

내용상 정반대되는 고변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니, 조정 안팎은 초긴장 상태가 된 채로 숙종이 있는 대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다시 뒤집기를 할 것인가~~~~~!)

이러한 때에, 고심하던 숙종이 드디어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 우의정 민암(남인)이 함이완과 혼자 만나 수작한 것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증좌도 없이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럽다.

- 국청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

숙종은 집권 남인 세력의 고변을 무고로 단정하고 영의정 권대운 이하 남인들을 모조리 쫒아내고 즉시 영의정, 훈련대장, 병조판서 그리고 승지와 삼사 관원들을 서인들로 채워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일어난 환국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숙종이 1694년(숙종 20년) 남인에서 서인으로 순식간의 물갈이를 해 버린 일련의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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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9 - 장희빈(6)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를 사양하셨습니다.

- 천만 뜻밖의 옥찰이 내려오니 감격에 눈물만 흘릴 뿐 무슨 말씀을 하리이까

의대를 받네 안 받네를 두고 몇 번의 연애편지를 더 주고 받은 후 인현왕후는 궁궐로 다시 들어왔고, 숙종은 자신의 경솔을 용서하라며 버선 발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중전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궁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이어서 인현왕후를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은 것은 물론입니다.

한편 인현왕후의 환궁에 기여한 숙원 최씨는 이 일로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랑을 동시에 받게 되었고, 숙빈의 직첩을 받은 뒤 급기야 왕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이 왕자가 훗날 영조가 됩니다)

졸지에 중전에서 밀려난 장희빈의 충격과 낙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과연 장희빈은 장희빈...

장희빈은 제주에 유배된 오빠 장희재, 그리고 희재의 첩이었던 숙정과 일부 남인을 동원해서 중궁전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바뀌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장희빈의 뜻대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 부터 7년 후 오히려 비극의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는데, 그 직후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했던 일 등이 모두 발각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죽은 인현왕후에게 부채의식이 있던 숙종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대노해, 장희재를 참형에 처하고, 장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 등 소론을 몰락시켰으며, 드디어 장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대신들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생각해 사사 만은 면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숙종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장희빈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42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묘소는 서오능)

장희빈의 인생 역정은 궁중 여인으로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다 할 수 있습니다.

장희빈으로 인한 개벽할 역사적 결과는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연유와 경위로 하늘과 땅을 거푸 밟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장희빈의 인생은 영원히 드라마의 극적인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역사는 비록 한 줄로 기록되지만 이처럼 많은 사연의 결과물들의 축약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에너지 또한 넘치기에 상상의 나래를 펴면 스토리를 지닌 역사의 매 순간이 드라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는 오천년의 유구하고, 찬란하고, 강인하게 이어져 왔다고 배웠는데 알것 다 알게된 나이되니 최근 천년은 그리 맞는 말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 동안 역사를 보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읽는 혜안들을 지니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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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
-유약한 왕 경종 즉위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 효종, 현종 때와 다른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습니다.

숙종이 반정의 위기 없이 여러 차례 환국정치를 펼칠 수있었던 데에는 사대부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상대 당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숙종의 환국 정치에 편승했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상대 당을 제거하기에 바빴으며, 또 다른 환국을 우려해 임금에 대한 비판과 견제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의 정치는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하였고(전성기 때의 광해도 하지 못한 일),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치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널리 알려진 도적인 장길산이 이때 활동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합니다.

장길산 일당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활동한 대규모 도적집단으로 조정에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상금을 내걸기까지 했지만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대단합니다)

성호 이익은 그를 홍길동, 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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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1720년(숙종 46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경종이 이었습니다.

세 살에 세자에 책봉되고, 열네 살에 생모인 장희빈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생모가 죽고 난 후의 19년을 불안과 긴장 속에 보냈습니다.

부왕 숙종은 살가운 애정을 걷어 들였고, 막강한 정치세력인 노론은 애초부터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에 그의 실수만 바라는
눈들이 번득였습니다.

세자생활이 무려 30년, 그 중 특히 근심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19년이니, 몸은 병들어갔고 정신은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경종을 지켜 준 것은 소론, 그러니 새 임금 경종은 소론 임금이라 불러도 좋았습니다.
(조선 후기는 붕당의 시대!)

그러나 조정은 노론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소론은 기반이 약했으며, 경종은 판세를 뒤집을 만한 힘과 지략이 없었습니다.

경종의 앞날이 암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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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2 - 노론의 무리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노론 세력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경종을 압박했습니다.

사실 노론 세력은 경종의 생모
장희빈을 제거한데 대한 보복을 우려해 경종의 즉위를 막아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바도 있었습니다.

노론 세력은 소론 세력이 경종을 충동질하여 보복을 하거나,
경종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 엉뚱한 종친을 양자로 삼아 세자에 책봉해 버리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노론 세력이 밀고 있는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습니다.

노론 세력은 경종의 심신이 매우 허약한 것을 노려 경종 1년에 계획한 바를 밀어붙였습니다.

이정소가 다음과 같이 총대를 멨습니다. 바야흐로 국세는 위태롭고 민심은 흐트러졌나이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지 않으니 신은 이를 개탄하옵니다.

빨리 이 일을 대비마마께 여쭈시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심이 사직의 대책을 정하는 길이옵고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는 길인줄 아옵니다.

경종이 보위에 오른 지 겨우 1년, 나이는 고작 서른넷이었고, 재혼한 왕비 이씨는 겨우 열일곱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자식이 없다면 득남을 위한 섭생을 권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일 것인데, 노론 세력은 거침없이 경종이 득남하지 못함을 전제로 또는 경종이 곧 죽을 것임을 전제로나 할 수 있는 무리한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경종은 노론 위주의 대신들과
삼사의 거듭된 압박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노론은 경종의 배다른 동생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세제로 세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비의 결재를 받는 무례마저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든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신하들이 선동하여 동생을 세제로 삼도록 한 행위는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습니다.

그런 뜻에서 노론 그리고 노론과 한 배를 탄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자 운명을 건 승부수였습니다.

이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한다면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을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경종이 후사를 본 후 후계구도를 새로이 하거나 또는 선왕 숙종과 같은 강력한 환국을 추진한다면 연잉군이나 노론 세력 모두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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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종 영조 3 - 경종의 함정

노론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세제로 삼도록 한 것은 엄연한 무리수였습니다. 소론이 이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소론 유봉휘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습니다.

비록 그 성명을 다시 논의할 수 없을지라도 신하가 임금을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긴장한 노론은 즉각 유봉휘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명이 내려져 온 나라가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무슨 심장으로 국본을 흔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문하여 저의를 밝히소서

논란 끝에 유봉휘는 유배를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조정이 온통 노론세력임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세제를 세우는 일에 성공한 노론은 자신감을 얻은 김에 다음 단계의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세제 책봉이 있은 지 보름 후,
노론 조성복이 총대를 멨습니다.
전하께서 신료들을 만나거나
일을 결정하실 때 세제를 불러
시좌케 한다면 나라 일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감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물러나라는 주장 못지않은 위험천만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경종은 즉각 대리청정을 수용하는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내게 병이 있어 만기를 친람할 수 없으니, 영명한 세제로 하여금 대소 국사를 모두 청정하게 하라.

궁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소론 최석항은 늦은 밤에 달려와 청대해서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울며 빌었습니다.

그러자 경종은 한 번의 물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대리청정의 명을 회수해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대리청정을 말리지 않은 노론계 대신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은 죽기로 이를 말리는 것이 왕조시대 신하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소론계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자 노론계는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반격을 가하였습니다.
중신 최석항 깊은 밤 청대는
규례에 어긋나는 일이오니 최석항과 이를 아뢴 승지를 벌하소서.

그러나 모처럼 기세를 잡은 소론은 물러나지 않고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으며, 밀리면 역도로
처단될 수도 있는 노론 역시
사생결단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말없이 지켜보던 경종은
다시 비망기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토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7
경종 영조 4 - 노론, 함정에 빠지다!

전회에서 본 것과 같이, 경종은 대리청정을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최종적으로 다시 세제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처음에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의 입장에서도 경종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죽음이 있을 뿐 대리청정의 명을 따를 수 없사옵니다.

백관과 연잉군이 사흘 동안 대리청정의 명을 거둘 것을 청했으나 경종의 뜻은 확고부동해 보였습니다.

- 경들의 정성은 내가 이미 아오. 내 병세가 나라 일을 모두 감당할 수 없으니 비망기대로 거행토록 하오. 노론대신들이 모였습니다.

-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오.
  전하의 뜻이 저렇듯 확고하시니 이제 그만 정청을 그만 두고 전하의 뜻을 따릅시다.(잘됐지 모야!)

노론 대신들은 사흘 째 이어오던 정청을 중지하였고, 반면 소론의 최석항은 다시 반대의 소를 올렸지만 도승지 홍계적이 이를 물리쳐버렸습니다.

또한 우의정 조태구가 경종의 알현을 청했으나 역시 홍계적의 저지선에 막히고 말았으며, 양사는 오히려 조태구를 유배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경종이 갑자기 조태구를 만나겠다며 우상을 들라 명하였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물러났던 4대신 등 신하들이 급히 입궐하였고, 이 자리에서 우의정 조태구가 울며 대리청정의 뜻을 거둘 것을 청하자 경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 경들의 뜻이 정녕 그와 같다면 명을 거두겠소.

경종의 대리청정 파동은 결국 그 명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조정엔 알 수 없는 적막함이 짙게 감돌았습니다.(폭풍전야 같은 분위기?)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1721년(경종 1년) 12월 6일 김일경을 필두로 박필몽, 이명의 등 여러 신하가 연명한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유명한 김일경의 상소입니다.

- 임금에게 대리청정을 할 것을 청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것과 승정원과 삼사가 그들에게 토죄를 청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나이다.
- 법으로 엄단하시어 군신의 대상을 세우시고 흉적들로 하여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경종의 함정에 노론이 걸려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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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5 - 경종의 대반격

김일경의 상소를 접한 경종은 “진언한 것을 가납한다”라고 한 후,

그 즉시 승지들과 삼사들을 모조리 삭출할 것과 훈련 대장, 영의정, 좌의정을 모두 해임하고, 경종을 옹호한 조태구, 최규서, 최석항을 삼정승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숙종식 환국이 재현된 것입니다.(신축옥사)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던 것입니다.

경종은 노론의 거듭된 압박을 견디고 대리청정 과정에서 함정을 파 노론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렸고, 그러고도 바로 환국에 나서지 않은 채 김일경의 상소를 기다려 한방에 노론의 주요인사를 유배보낸 후 자신을 지원하는 소론으로 조정을 채우는 환국을 단행한 것입니다.

임금 자리를 빼고는 다 가졌다던 노론은 이제 긴장이 아닌 공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비교도 할 수 없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1722년(경종 2년) 충격적인 고변이 터져 나오니, 이른바 묵호룡의 고변입니다.

- 신이 눈으로 직접 모의하는 것을 보고 호랑이 아가리에 미끼를 주어 비밀을 캐어낸 뒤 고하는 것이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 노론 핵심의 자제들이 비밀리에 결사해 숙종 말년부터 경종 시해를 추진해 왔다.

- 이들은 삼수역(三守逆)을 모의했는데, 이는 경종을 시해 하기 위한 3가지 방법으로서,

 첫째 자객을 들여보내 임금을 시해하는 방법,

 둘째 음식에 독약을 타서 임금을 죽이는 방법,

 셋째 폐위 교지를 가짜로 만들어 대궐을 봉쇄하고 폐출시키는 방법으로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 할 것이 없었고, 경종 은 묵호룡과 그 배후의 김일경의 말을 모두 믿는다면서, 이미 유배를 떠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명을 처형해 버리고, 170여명을 유배해 버렸습니다.(임인옥사)

위와 같은 역모사건의 증거가 명백하지는 않아 그 진정성 여부는 알기 어려우나, 위 사건은 영종 조에 이르러 무고 사건으로 정리되고, 아울러 죽은 자들도 모두 신원되었습니다.



109
경종 영조 6 -영조 등극

소론은 옥사의 확대를 연일 청했습니다.

-궁인 김씨가 누구인지 밝혀 내어 독살음모를 파헤치소서

 (궁인 김씨는 경종 살해 음모 중 두번째 방법인 독살과 관련된 사람)

그러나 경종은 한결같이 옥사의 확대를 거부하였습니다.

-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너무 많아 찾아낼 수 없다. 경종은 옥사의 확대가 가져올 후폭풍을 걱정했던 것 입니다.

소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상궁 나인들에 대한 혹독한 조사가 이어질 것이고, 결국 실체가 있던 없던 소론이 원하는 답이 나올 것이며, 종국적으로 세제 연잉군이 위험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경종인들 어찌 연잉군에 대한 감정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는 사적인 감정을 누르고 대계를 택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우애일지도 모릅니다.

- 미우나 고우나 왕실엔 나와 세제뿐, 세제를 내친다면 종사는 어찌한단 말인가?

경종은 이 일 이후 병석에 다시 누웠고, 모처럼 게장과 생감을 먹은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위 고작 4년, 향년 37세였습니다.

항간에는 경종과 소론이 연잉군을 해칠 것을 우려해 연잉군을 따르는 노론 일파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퍼졌고, 지금도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경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이가 배다른 동생 연잉군, 즉 영조입니다.

역모에 이름이 오르고도 살아남는 경우란 드물었지만, 영조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보위까지 이었습니다.

젊고 영민한 영조는 다음과 같이 다짐했습니다.

-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지난 4년에 연연하지 말자. 당쟁을 조절하고 정치를 바로 잡자.

그러나 선왕 4년과 당쟁이 드리운 그늘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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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7 - 영조의 콤플렉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 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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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 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습니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영조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없는 무수리 신분인 데다가 그럼에도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 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등 일부 소론 세력 및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수되었습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으며,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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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8 - 사도세자(1)

영조 시대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8일 동안이나 가둬 죽게 한 일일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아비가 아들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조가 사도 세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 온갖 설이 분분합니다.

당쟁의 희생양이라거나 사도세자가 더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설입니다.

어쨌든...
실록 등 여러 기록을 따라가면서 도대체 왜 영조는 하나 뿐인 아들을 그토록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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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입니다.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오래 재위한(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왕후, 정순왕후 등 왕비 2명과 후궁 4명을 두었는데,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 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습니다.

영조가 등극하기 전에 태어난 첫 아들 효장세자는 10살에 죽었고,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1735년 1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4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던 영조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습니다.
-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최연소 원자, 최연소 세자)

그 종말은 참혹했지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일반적인 임금과 왕자의 관계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임금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 했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영조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커졌습니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합니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으며, 천지, 부모 등 63자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가지려고 했고,

영조가 기뻐하며 세자가 쓴 것을 입시한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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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9 - 사도세자(2)

어린 시절 사도세자의 영민함을 나타내는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세자가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영특함은 부왕과 왕실의 기대를 넉넉히 충족시킬 만했습니다.

세자는 8세 때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입니다.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에 발탁된 뒤 영의정에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 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습니다.

세자는 홍씨와 사이에 둘째 아들을 낳으니(첫아들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남), 이 사람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현군으로 평가받는 정조입니다.

뭘 해도 마냥 귀여운 어린 시절은 가고 세자에게도 본격적인 세자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략 10세 정도 되던 이때부터 세자를 향한 영조의 각별한 사랑이 식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에 비해 체격도 크고 힘도 셌던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를 더 좋아했고, 그나마 공부도 영조가 강조하는 경전보다는 잡학 쪽에 관심이 많았으며, 영조는 이런 세자의 모습에 조금씩 실망을 하면서 세자를 질책하는 경우가 많아져갔습니다.

- 당론으로 뭉친 노회한 신하들을 조절하고 다스리려면 학문과 지혜가 필요하거늘 공부는 좋아하지 않고 기가 뻗치니 참으로 걱정이다.

학문에 열중하지 않는 세자를 마뜩치 않아 하던 영조는 어린 세자에게 엄격한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연강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 하루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하고 어느 날에는 차대했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그러나 영조 자신이 실천했던 이런 엄격한 규율은 호방한 무인적 기질의 세자에게는 무거운 규제가 되었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자주 꾸짖었고, 세자는 부왕을 꺼리고 멀리하게 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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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0 - 사도세자(3) 

영조와 세자의 사이는 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더욱 멀어졌습니다.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습니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신하들의 형식적 반대 의례를 거친 후 재위 25년에 대리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의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뢴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依爲之)’고 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그러나 그 뒤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정무적 능력과 수신(修身)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런 불만은 양위 파동을 계기로 집약되어 폭발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위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였습니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지는데,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집니다. 영조도 선왕들처럼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습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미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고, 그 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습니다. 10살도 되지 않은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영조의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습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습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 어느 날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세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극력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시를 읽을 것이로되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전교를 거두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는 시경 소아의 한 편인 ‘육아시(蓼莪詩)’인데, 그 내용은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고, 영조는 양위 전교를 거두었습니다.

국왕인 아버지의 욕심과 기대가 과도하게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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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1 - 사도세자(4)

대리청정 이후 영조가 세자를 질책하는 일은 매우 잦았고 그 내용도 혹독하고 모질었으며, 세자가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영조가 세자의 반성문을 받아보고 세자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후 상복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 밖까지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세자도 상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고 묻자 영조는 “무엇을 뉘우치느냐 물었는데, 동궁은 후회한다고만 말하면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남의 이목을 가리는 데 불과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영조가 다시 선위 전교를 내리자 홍봉한은 세자를 두둔하며,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날 세자는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자는 부왕을 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부왕이 찾는다하면 불안감이 극도로 올라 정상인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위 사건이 벌어진 때 세자의 나이 22세, 이즈음 세자에게 부왕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세자가 죽게 되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7년 전인 1755년(영조 31년) 약방 도제조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뢰었다 하고,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의대증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임오화변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와 환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으며,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무렵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같은 궁궐 안에서 거주했어도 매우 멀었습니다. 세자는 궁궐에 있으면서도 길게는 1년 동안이나 진현(進見: 임금께 나아가 뵘)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영조는 그런 세자를 특별히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자를 보고 싶지 아니하는 영조에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세손이었습니다.

세손은 세자와 달리 영조가 좋아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즐겨했고, 영조는 각종 행사에 세자 대신 그러한 세손을 대동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으며, 급기야 대놓고 세손을 띄우기까지 하였습니다.

- 지금의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도다. 30년 명맥이 오로지 세손에게 달려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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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2 - 사도세자(5)


세자와 영조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영조 37년(1761) 세자의 관서(關西)행입니다.

세자는 그 해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직후인 5월 초, 서지수, 서명응이 세자를 면대해 아뢰었습니다.

- 저하께서 비록 궐 안에 계시더라도 일종 일정을 중외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사온데 하물며 여러 날 동안 길을 떠난 경우이겠나이까.

- 천리에 갔다가 오신 몸이면서도 아직도 지척의 진현(임금을 뵈알함)은 행하지 못하셨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예후이신데 아직도 아프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이 저하의 뉘우침을 의심할 것입니다.

- 관서행을 종용한 자, 관서행 뒤에 세자를 대신해 임금의 명에 비답한 내시를 회부해 죄를 밝히셔야 합니다.

세자는 관서로 여행을 떠나고서도 병이 났다며 내시로 하여금 임금께 올리는 비답을 대신 쓰게 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세자는 신하들의 관서행 거론에 “대조(영조)께서 아시도록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불만과 불안의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조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몇 달이 지난 그 해 9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영조는 뜻밖에도 승지들과 관원들을 벌주는 선에서 이 일을 조용히 덮었습니다.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는 느낌입니다.

조선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인 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날 실록의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계기는 비극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의 고변이었습니다(5월 22일). 이 사건은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대죄하자, 영조는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세자가 행할 일이냐?

- 왕손의 어미가 죽은 것은 네 행실을 지적했기 때문이 아니냐.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으로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실록에는 이틀 뒤 영조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세자가 유희에 내사를 모두 탕진해 시전에서 많은 돈을 빌려 썼고, 이를 갚지 않아 시전의 원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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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3 - 사도세자(6)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날부터 세자는 연일 엎드려 대죄하였으나 영조는 답이 없었고, 보름이 넘자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 아무래도 나를 살려두지 않을 모양이다.

세자는 “내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라며 칼을 뽑아 휘두르기도 하였고(누구를?), 그날 밤 여러 괴상한 비어가 삽시간에 궐 안에 퍼졌습니다.

영조의 분노와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며칠 뒤 영조는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새벽에 영의정과 우의정을 입궐케 했습니다.

신하들은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영조는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면서 개탄했습니다

또한 영조는 신하들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지금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부당(父黨)ㆍ자당(子黨)이 생겼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이 발언은 임오화변의 근본적 원인이 정치적 문제에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로 거론되나 반드시 그리 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편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임오화변이 있던 바로 그 날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 어젯밤 소문이 더욱 무서워 큰일이다.
- 내가 죽어서 모르면 모를까 살아 있으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또 세손과 빈궁을 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 울며 아뢰었습니다.

-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옵니다.

- 어미 된 정리로 차마 드리지 못할 말씀이오나 성궁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시옵소서.

- 다만 다 세자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겠나이까. 처분은 하시되 은혜를 끼쳐 세손 모자를 편안히 하시옵소서.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 영조는 선원전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세자를 불러 휘령전으로 나선 후 문을 4-5겹으로 막고 총관 등으로 하여금 궁의 담쪽으로 칼을 뽑아들게 하더니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 세자는 관을 벗고 맨발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라.
-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노라!

세손이 알고 뛰어 와 울며 용서를 구했지만, 그 외 입시한 3정승, 승지 등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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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4 - 사도세자(7)

자진하라는 영조의 서슬 퍼런 명에 세자는 울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세자가 자결하려 하자 춘방의 신하들이 이를 막았고, 결국 왕은 뒤주를 내오게 하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습니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뒤주에 8일을 가두어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통론은 세자가 뒤주에서 8일을 보낸 후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자가 죽을 때까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영조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어찌 30년 부자의 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하겠노라.

장례는 두 달 뒤 치러졌는데, 영조는 친히 정자각에 들어가 곡하며 말했습니다.

- 그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그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그리고는 “삼종의 혈맥과 만세의 통서가 오로지 세손에게 있도다”라고 하면서 세손에게 동궁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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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아비가 세자의 자리에 있는 자식을 죽인 이 사건의 완전한 진실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청은 ‘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나경언의 고변서도 불태워져 존재하지 않으며, 그 당시의 ‘승정원 일기’ 역시 뒤에 세손의 청으로 사라졌습니다.

때문에 당대부터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과 해석이 있어왔고,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명이 많습니다. 그 내용은 대게 이런 것입니다.

- 세자는 경종을 모셨던 상궁 밑에서 자라면서 큰아버지인 경종과 소론에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 대리청정 과정에서도 소론에 가까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집권 노론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 하여 노론과 손잡은 후궁 문씨와 그녀의 오라비, 노론 출신 정순황후와 그 가문, 골수 노론인 세자의 장인 홍봉한 등이 합세하여 왕과 세자의 사이를 적극적으로 이간질하는 등 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소설의 소재로는 적당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신빙성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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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 15 - 사도세자(8)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 간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노론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가 세자의 죽음에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그 녀가 대궐에 들어왔을 때 고작 열다섯 살의 나이인데다 이때는 영조 35년으로 이미 왕과 세자 간의 관계가 충분히 악화된 때라는 점에서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기운 태도를 보였다는 해석 역시 지나칩니다. 세자의 대리청정의 영역은 극히 제한적 이었고, 영조의 눈치를 보느라 대부분의 일을 “대조께서 결정하신 일이오”라는 식으로 처리했다는 기록이 많은데다, 세자가 영조나 노론의 뜻에 반해(즉, 소론을 위해)한 결정적이거나 그럴듯한 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영조가 노론의 득세를 경계하여 노론에게 당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임오화변 당시의 기본 정치구도가 이미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벗어난 때였습니다.

또한 후궁 문씨와 그 오라비가 세자의 비리를 확대 과장 하여 이간질했다는 것도, 영조가 세자의 관서행을 넉 달이 지난 후에 알게 된 점이나(이것은 왜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았을까?), 이들의 이간질은 정조가 집권한 후 일방적으로 발표된 것임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일도 별로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또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친자식의 처분 을 청했는데, 영빈 이씨는 노론이 아닌데다, 친모가 친자식 의 죽음과 맞바꿔 얻을 당파적 이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세자는 그 원인이 어디 있던 중대한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이 분명하고, 상당한 정도의 살인 행각을 저지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당쟁 희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다만, 이상하리만치 이 부분에 관대한 입장을 보입니다)

사도세자가 사람을 많이 죽인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참으로 많습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가 내관 김한채를 죽여 그의 목을 잘라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가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이 사건은 실록 에서도 드러납니다.(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친정을 비호할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세자였던 남편, 왕이 될 아들의 친부를 살인마로 거짓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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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영조16 - 사도세자(9)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해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것만 보더라도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정조가 읽고는 제목을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다는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옵니다.

-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가 많은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라는 점은 영조가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가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또,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는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을 죽인 사실도 나오는데,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재위하면서 탕평책 등의 정책으로 신하들을 쥐락 펴락 했던 노회한 정치 9단 영조가 노론의 책략에 넘어가 또는 노론의 압박에 의해 자기의 친자식을 죽이는 결단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영조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단순히 왕재를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왕족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그대로 살려 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조에게 세자는 크게는 사직과 작게는 가문의 수치이자 암덩이였고, 이런 세자가 보위를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단순히 폐세자 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 후왕인 정조가 생부를 폐세자 상태로 두기도 어려울 것이고, 왕의 아비가 살인 행각을 벌일 경우 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즈음 세손(후일 정조)이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한편, 신하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세자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왕이 되어도 그렇고 폐세자가 되어도 그렇고)

다만, 정조의 입장에서 생부가 희대의 살인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즈음의 승정원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습니다.

승정원 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120
정조 1 - 정조 등극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 그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일단 지난 여러 회에서 살핀 바를 종합 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영조와 세자의 출발은 여느 왕과 세자와 다름이 없었다.

- 그러나 영조의 세자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고, 그 기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영조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세자는 정상궤도를 이탈하게 되었다.

- 결국 세자에게 정신질환이 생겼고, 세자는 그로 인해 세자 직의 유지는 물론 더 나아가 임금이 될 수도 없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 사직에 대한 부담과 절대권력에 대한 욕심이 매우 컸던 영조는 세자의 무너진 모습,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자질을 갖춘 세손의 등장에 갈등했고, 신하들은 물론 세자 본인도 이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했다.

- 단순히 폐세자를 해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영조도, 그 어미인 종친도, 신하들도 잘 알고 있었다.

- 영조는 드디어 결단을 하고, 어미 영빈 이씨, 장인 홍봉한 등이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세손 등 여럿을 보호하기 위해 이에 동조하였다.

- 당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 희생양으로 세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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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열한 살 세손, 할머니가 청하고 할아버지가 명하고, 외할아버지가 도운 아비의 비극 앞에 권력이 얼마나 무섭고 비정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깨우쳤습니다.

어린 세손은 영조가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영조는 "조선에 너와 나 둘뿐이니 네 할아버지를 생각해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하라"는 전교를 했고, 세손은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지난날의 참변은 대의에 따른 것이라는 점과 향후 이를 흔들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다짐 받았습니다.

영조는 임오화변 이후 14년을 더 살다가 1776년 52년을 재위 끝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사도세자의 아들이 25세의 나이에 등극하니, 이 사람이 바로 흔히 개혁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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